[1] 손에 아무 것도 쥐지 못하여 자신의 주린 배말고는 움켜쥘 것 없는 이들도 많은데, 손에 쥐었음에도 가득 채우려는 심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기 몸뚱이의 생존이다. 먹고 먹어서 영원해보자는 생각이다. 그런데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 자기 몸뚱이 위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게 된다.
사회구조도 문제가 있다. 손에 쥐었음에도 가득 채우는 것을 말리기는 커녕 더 열심히 욕망하라고 등 두드려 주는 것이 오늘날 사회가 한다는 교육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은 내 손에서 차고 넘치도록 무언가를 쥘 수 있을 때 그것을 성공이라 말하지 않나? 공을 이룸이다. 그 공이란 먹고 사는 문제다.
사람은 끝도 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욕망을 물질로 충족시키는 것을 성공이라 하니, 결국 해야 하는 것은 남들을 빤히 쳐다보는 날카로움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팔아 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 짜먹자는데 날카롭다. 남들 등쳐먹는데 날카롭다.
소크라테스가 달리 죽었나? 소크라테스가 있던 아테네는 전쟁통에 남자들이 다 죽어나가서 전체인구의 1/10만 남아 있을 때였다. 사람들 온통 생존의 문제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더욱 본질적인 질문을 물었다. '인간 도덕의 토대'. 사실 전쟁을 막으려면 군사력을 키울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전쟁을 하면 안되는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묻는 것이 바른 해결책이 맞지.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그 도덕의 토대를 묻기만 하면, 그 질문에 걸리는 사람은 족족, 자신이 이 도덕적 토대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오히려 뭉쳐서 생존을 강구해야 할 아테네를 분열시키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빤히 쳐다보다가 죽였다. 예수는 달리 죽으셨나? 회당에 손 마른 사람을 데려다 놓고, 예수가 이 사람을 고쳐주는지, 안고쳐주는지 빤히 쳐다보는 종교 지도자들의 맘에는 뭐가 있었을까? 손에 쥐었음에도 가득 채우려는 맘 말고는 다른 사람을 빤히 쳐다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거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게 눈에 힘주다 눈 빠진다.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중심으로 놓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들을 빤히 이용해 먹고자 쳐다보는 것이 오죽할까. 세상을 둘로 나눠보는 눈은 피곤하기만 하다. 오래 못가지. 그런데도 눈이 벌개가지고, 성공, 성공 하고 있다면, 본인에게 다시 물어봐야 한다. 도대체 뭐가 성공이냐?
[2] 존 로크가 말했다. '노란 돌을 먹을 것과 바꾸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노란 돌, 환한 구슬. 이거 집에 쌓아놓는다고 다 무슨 소용이야? 이것 쌓아놓고서 흐뭇한 것은, 이제 먹고 살만해 졌다는 생각에서 오는 안락이다. 그러나 그 집에 반드시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아무리 노란 돌과 환한 구슬을 문설주에 걸어논다해도 결코 그 죽음의 천사를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부하고, 높아지고, 이 따위 것들로 교만해지는 것은 스스로의 허물이 될 뿐이다. 너를 옭아매어 날아가지 못하게 한다. 허물은 찢고 벗어야 하는 것이다. 찢고 벗어야 날 수 있지.
[3] 공을 이뤘다 치자. 공이 뭐냐? 자신이 속한 집단의 부와 귀함에 일조하게 된게 공이지 다른 것 아니다. 이것 참 잘한 것이지. 그런데 '잘'한 것은 물과 같아야 한다. 무언가 잘 했으면, 이제 잘 흘러가야한다. 돈만 흘러가지 않고, 그 공을 이룬 사람도 흘러가야 한다. 거기서 칭찬 받고, 더 부하고, 더 높대고, 더 교만할 생각말고, 몸을 빼! 이것이 하늘 따라 가는 길(道)다.
예수는 참말로 공을 이루셨다. 많은 사람이 그로 인해서 인간다움을 맛봤으니 정말 공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문에 죽으셨다. 몸을 뺴신 정도가 아니라, 몸을 내놓으셨다. 그래서 그 자신이 하늘 따라 가는 길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