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간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영원에 가깝다. 이것을 노자도 알아서 두번째 행에 버금 차(且)를 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태극기에도 나온다. 가운데 태극은 형이상을 뜻한다. 겉을 두르고 있는 원은 무극(無極), 즉 다함없음이요, 가운데 있는 중심점은 태극(太極)이다. 그리고 이 무극 안 태극을 중심으로 음과 양이 나눠진다. 이 태극이 있고, 이 태극 주위로 만물이 생겨난다.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은 하늘이다. 하늘 천은 가로줄 세 개로 표현한다. 그리고 땅이 생긴다. 끊어진 궤가 3개 놓인다. '천장지구'를 이 하늘과 땅이 영원하다고 번역하면, 잘못 번역한 것이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에 버금갈만큼 길고 오래지만 하늘과 땅은 무극도 태극도 아니므로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
그렇다면 영원에 버금갈 만큼 하늘이 길고, 땅이 오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이유를 알면 사람도 길게 오래 갈 수 있지 않겠나? 노자는 말한다. "저 스스로만 살지 않아서야". 하늘과 땅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하늘은 비를 내려주고 수증기를 둘려받아 구름을 만든다. 땅은 몸을 받아 새로운 몸을 돌려준다. 하늘은 하늘 혼자 사는 법이 없다. 비를 온통 자기 것이라 우기는 법이 없다. 땅도 땅 혼자 사는 법이 없다. 몸을 받지도 주지도 않겠다며 자신을 굳히는 법이 없다. 그래서 길고 오래다.
흔히 '짧고 굵게 살겠다'는 말을 하지만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내 욕망을 극도로 추구하며 살다가, 늙어서 어려움이 오기전에 죽겠다는 무책임한 소리다.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여 자신을 채우다가 터지겠다는 소리 아닌가? 이러지 말자. 하늘과 땅을 닮아 모든 것을 주고 받으며 길게 오래가자.
[2] 언제나 그렇듯 노자는 자연현상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에서 도적적 의미를 발견한다. 곧 인간다움이다. 그런데 '몸' 이야기를 한다. '몸을 뒤로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몸을 뒤로 두었는데 앞서게 된다니, 이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자기 몸을 배불리고 치장하는데 앞서지 않고, 오히려 몸을 뒤로 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앞섰는가? 자기 마음이 아니다. 뜻이다. 예수는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보다, 자신의 맘보다, 뜻을 앞에 두셨다. 그 뜻이 예수의 몸과 맘을 이끌어나갔다. 그래서 자기 몸을 제물로 내어놓을 수 있었다. 자기 몸을 제물로 내어놓으면 하나님께 먼저 간다.
찢기고 상한 채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몸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의 제물된 몸 앞에, 모든 교만들은 꺽어지고, 모든 비천함은 일으켜세움을 받는다. 굽었던 진리의 길이 곧아지고, 누구나 걸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 된다. 그 길 위에서 모든 몸들이 '그'를 바라본다. 그의 제물됨을 통해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간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3:5,6
예수는 끝까지 자기 몸을 밖으로 두고자 했다. 그래서 그 몸이 없어졌나? 아니다. 밖으로 두고자 한 몸은 오히려 '온전히 있다'. 존(存) 이라는 글자가 그러하다. '有'나 '在'나 '存'이나 모두 '있음'이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다. 류영모 선생의 풀이를 따르지면, 有는 손에 고기를 들고 있는 모양으로 '소유'를 뜻하는 것이다. 在는 흙에 있는 것으로 형이하의 세계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存은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다. 영원히 있는 것이다. 그 아들의 몸이 지금 어찌 되었나? 자기 몸을 끝까지 밖으로 두려 했던 그의 몸은 존재(存在)한다. 하늘과 땅에,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에.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 여전히. 그래, 부활! 몸 없어짐이 아니야. 몸의 새로워짐이다.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는 여전하다. 그러나 너와 나는 이제 서로 먹고 살기 위해서 경쟁하고 싸우지 않는다. 몸이 '계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이 새로운 몸을 가지고 서로 끌어안는다.
류영모 선생은 '계'라는 표현을 새로운 차원을 뜻할 때 사용했다. 즉 절대계, 형이상의 세계, 보이지 않는 차원, 곧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 '계'이다. '있다'의 높임말이 '계시다'인데, 이것은 하늘의 차원에 있다는 말이겠다. 반대말은 '예'다. '예'는 '여기'다. 상대계, 형이하의 세계, 보이는 차원, 곧 땅이다. '씻어난 이의 몸이 계있다.' 그가 새로운 몸으로 여기 하늘에 계시다.
[3]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자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에 빠지면 안된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면서도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려면 개체성을 강조해야 하는데, 개체성을 강조하면 개인주의로 빠지기 십상이요, 그렇다고 다시 전체만을 강조할 수도 없는 이 상대계의 모순!
본문의 '사사로움(私)'을 보라. "사사로움을 버리면서 사사로움을 이룬다?" 이것이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 놓인 좁은 길이다. 어찌 해야 하는가? 이미 노자는 우리게 답을 주었고, 한 사람의 역사 속에서 그 답이 온전히 구현되었다. 섣부른 방식으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면, 지도자를 한 사람을 의지한다던가, 강대국과 편을 먹는다던가, 우선 경제부터 살려놓고 생각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방법은 하나, 우리가 그를 따라 우리 모두가 씻어난 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씻김을 받고, 우리가 남을 씻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오직 이 방법만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기 떄문에. 이 길 밖에 없음은 우리들 자신을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