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에 사로잡힌 소년(9:14~29)
그들 네 명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율법학자들이 그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무리가 예수를 보자마자 놀라서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예수께서 물으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무리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선생님, 제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그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렸습니다. 귀신이 그를 사로잡을 때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입에서는 거품이 나오고, 이를 갈며, 온몸이 굳어집니다.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믿음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더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얼마나 더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느냐? 그 아이를 내게 데려와라."
그 사람이 자기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귀신이 예수를 보자 곧바로 경련을 일으키게 했고, 아이는 바닥에 넘어져 구르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예수께서 물으셨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심지어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불이나 물에 던져 넣을 때도 많았습니다. 어떻게든 하실 수 있으면...제발 부탁드립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말씀에 그 아버지가 크게 외쳤다.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무리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을 예수께서 보셨다.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말 못하게 하고 못 듣게 하는 귀신아, 내가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말아라!"
그러나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큰 경련을 일으키며 나왔다. 아이는 죽은 것 같았다. 실제로 몇몇 사람이 "아이가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게 도와주셨고, 그러자 아이가 일어났다.
집으로 들어와 그들만 있을 때 제자들이 물었다.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러한 부류는 오직 기도로만 쫓아낼 수 있다."
0. 불
오늘 본문은 귀신들린 아이에 관한 본문입니다. 귀신은 이 아이를 집어 삼키고 종종 불이나 물에 던져 넣어, 아이를 괴롭게 했다고, 이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증언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심지어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불이나 물에 던져 넣을 때도 많았습니다. 어떻게든 하실 수 있으면...제발 부탁드립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불. 여러분에게도 삶에 불쑥불쑥 찾아와,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불이 있습니까?
저에게는 불이 있습니다. 사탄이 종종 그 불에 저를 던져넣고,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그 불못이 있습니다. 그 불못에 던져지는 것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어느 날 집에 차압 딱지가 붙을 수도 있고, 어느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어서 두 다리에 힘이 풀릴 수도 있고, 무언가에 헤어나지 못하는 중독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인생도 평탄하지 않습니다. 불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얼마 전에 불같은 상황이 닥쳤습니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에게 막 소리를 질렀던 일이 있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저희 동네 고3 아이들 모아다가 성경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지금은 그 아이들이 모두 대학생이 됐습니다만) 아이들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경 공부하러 매주 나왔고, 이것은 그 아이들의 부모와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이런 일들은 자꾸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습니다.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하고, 욕먹는 동안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 공부 잘 하고 있었는데, 그 부모가 차를 끌고 오더니 아이를 납치하듯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전화로 저에게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당신이 누구길래, 우리 애들을 데리도 무엇하는 것이냐" 그래서 진정하시라고, 저는 이단이 아니고, 수원 성도교회 청소년부 전도사고, 담임 목사님은 김민호 목사님이라고 말씀을 드렸죠. 알고보니, 예전에 학부모님들에게 명함도 다 돌렸는데, 이 아이가 부모에게 혼날까봐 몰래 몰래 모임에 나왔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이었습니다. 한참 욕을 먹고, '죄송합니다'를 반복하고나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끊고나니 열이 받는 거에요. 제가 잘못한 것이 없거든요.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1. 불 앞에서 논쟁하는 두 사람
그래서 선생 대 부모가 붙었습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는 부모의 말에 저는 반박해야 했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이들을 위해서 이것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따져 말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올라가더라고요. 그렇게 한참을 통화하다가 뚝 끊고, 다시 전화해서 또 뚝 끊고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별로 제 얘기를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고, 저 역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대체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이는 어떻습니까? 불과 같은 상황을 맞은 것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 날 밤,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하는 부모와 선생 사이에서, 아이는 괴로운 밤을 보냈을테니까요.
그런데 이 장면은 마치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괴로움에 빠진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돕지는 못할망정, 자기 말이 맞다고 논쟁하고 있는 양 쪽. 논쟁은 하지만 정작 불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구해줄 수 없는 모습. 그 날 밤은 논쟁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가 없음을 사무치도록 깨우친 밤이었습니다.
그 날 그러한 사건을 겪고나니, 머리칼이 잘린 삼손 마냥 기운이 빠져버렸습니다. 부모 한 명 설득할 수 없고, 그 속에서 힘들어하는 친구 하나 도울 수 없는 제 자신에게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저에게 말씀하시듯, "말은 언제나 청산유수"인데 결국, 말은 말일 뿐이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상태가 이 모양이 되었을 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이지만, 으레 그렇듯, 오히려 상태가 안좋아지면 기도도 잘 안하게 되잖아요. 그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넋을 놓고 설교 준비 할 생각도 않은 채 하루를 보냈습니다.
집에 돌아와보니, 부모님은 이러한 아들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뷔 드라마를 보시며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왕가네 식구들>이라는 드라마인데, 이 날은 제가 이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첫 날이기도 합니다. 드라마는 참 생각없이 시간 보내기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운 없고 상심한 와중에도 드라마는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드라마 장면 중에 정신이 버쩍나게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거기 딸이 한 명있는데, 딸이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학교 교감 선생님이에요. 그 아버지가 딸에게 얘기해줍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 공부 못한다고 뭐라하지 말고, 편부편모 가정인 아이들 사랑으로 감싸주는 교사가 되어라".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딸이 난생처음 사랑에 빠져서, 집에 남자를 소개하려고 데려 왔는데, 중졸에다가 이혼 가정에서 자란 남자인거에요. 이것을 알고서 그 부모는 그 딸의 결혼에 반대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딸이 밖에 나가서 한 잔 하고 들어와서는, "아버지는 이중인격자에요! 저한테는 공부 못하는 애들 뭐라 말고, 이혼 가정 애들이라고 괄시하지 말라더니, 이게 뭐에요!" 이렇게 소리지르다가 형제들에 의해 끌려나갔습니다.
딸의 이러한 절규를 들은 아버지가 마당으로 나와 한숨을 쉽니다. 그 때 이 아버지의 어머니되는 나문희씨가 옆에 와서는 이런 대사를 날립니다. "고저, 부모는 자식한테 불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 가르치고, 선생은 불 가운데 들어가서라도 사람 구하라 가르치는 거야. 너는 부모니까 어쩔 수가 없는거야." 저에게는 이 대사가 하나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이들 일주일에 한 번 성경공부 마저도 반대하는 부모가 이해가 안되고, 그들을 틀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아, 부모는 그러한 사람이 부모구나.'
부모는 자기 자식의 생존에 온통 관심이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제 입에 뭔가를 집어넣는 것이 행복하다며 연신 제 입에 뭔갈 넣어주십니다. 나이 서른 둘에 싫다 싫다 해도 어머니는 너 먹는게 좋다며 먹이십니다. 그럼에도 몸이 이렇게 마른 것은 정말 불효가 아닐 수 없는데. 하여간,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식이 살아남는 것이 부모의 전부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귀신 들리자, 예수 앞에서 절규했던 것과 같이, 마치 저에게 전화했던 어머니가 자기 자식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는 저를 귀신 보듯 했던 것 같이, 부모에게는 자식이 생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편에는 선생이 있습니다. 이 선생은 부모의 바람과는 다르게, 자식에게 희생을 가르칩니다. 설령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 가르칩니다. 역사 속에서 이렇게 가르쳤던 선생들이 여럿 있습니다. 머리 속에 떠올려보니 세네카라는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이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닮으려는 사람이었는데, 옳은 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 마저도 내어놓아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 결국 사람들의 음모에 의해 자살할 것이 선고되었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고결한 자존심을 지킨 이 선생은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래서 선생은 제자들에게 불 가운데서 타죽더라도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생은 부모가 보기에 이런 선생은 자기 자식을 불구덩이에 집어넣으려는 귀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선생이 보기에 부모는 아이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 무식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둘이 모이면 답이 없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찌 길러야 할까요? 부모가 옳습니까? 선생이 옳습니까? 자식이 생존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자식이 옳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한 쪽에서는 생존을 말합니다. 우리 자식의 생존에 해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한 쪽에는 선생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보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선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생존입니까? 옳음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루에도 몇번씩 부딪치는 물음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논쟁으로는 저 불못에 빠져있는 아이를 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논쟁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럼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논쟁만 일삼고 있던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믿음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더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얼마나 더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느냐? 그 아이를 내게 데려와라."
너네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떠들줄은 알아도 믿음이 없어서, 사람 하나 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을 믿지 않는단 말입니까?
생각해보면,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옳음을 추구할 수 없고, 옳음을 추구하지 않으면 생존이 의미 없습니다. 부모가 말하는 생존은 마치 바다 위에 띄워놓은 배와 같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말하는 옳음은 그 생존의 배가 항해하는 목적입니다. 배 없이 목적지로 갈 수 있습니까? 목적지 없이 배가 출항할 수 있습니까? 즉, 자식의 생존과 옳음의 추구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선생은 사실 같이 움직여야 할 사람들이지, 서로 각을 세우고 논쟁해야할 사람이 아닙니다.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가기 위해서는 함께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생존의 배를 띄운 바다가 더이상 사람을 집어삼키는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곧 유리바다가 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의 바다는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바다에 수장되었고, 우리는 대홍수로 인해 인류 전체가 바다 밑에 잠긴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다는 곧 죽음을 상징하고, 그 어떠한 인간도 끝내 정복할 수 없는, 그 앞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괴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계속 그 바다를 정복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출애굽 때 바다는 갈라져 언약 백성에게 길을 내어주었고, 요단에서 언약 백성의 발목이 들어가자 또 역시 물이 갈라졌으며, 예수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밟으시고, 계시록에 가서는 짐승들의 탄생지였던 바다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유리바다만이 남아 창조의 아름다움을 반사합니다.
다시 말해, 부모도 선생도 믿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바다의 정복, 곧 죽음이 정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말로 하면, 부활입니다. 바다가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면, 이제 이 배는 생존의 배가 아니라 생명의 배, 곧 구조선이 됩니다. 그리고 이 구조선은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방향입니다. 그 배를 타고 부모와 선생은 함께 갑니다. 더불어 함께 가시는 한 분이 더 계십니다.
예수는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생존을 말하는 부모에게도, 그 사람의 생존은 신경 않고 옳은 말로 사람을 후벼파는 선생에게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논쟁에서 그치지 않고, 진실한 걸음을 걸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이것입니다. 우리의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믿으면 정말로 올곧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의 생존이 보장되었습니까? 언제 우리가 올바르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까? 바로 부활입니다. 삼 일째의 그 날은 우리의 생존이 죽음 마저도 깨뜨리고서 보장된 날입니다. 따라서 올곧게 걷는 우리의 걸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살아있음을 그 어떤 것도 해할 수 없습니다. 거반 죽었던 우리의 몸이,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 치유되고 회복되어, 세상의 불과 물을 지나는 거룩한 행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부활을 믿을 때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해주시고, 바로 이어서 산에서 변화된 몸을 보여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 역시 부활을 가리키는 사건입니다. 그 분은 모든 공생애 순간순간 이 부활을 염두해두셨습니다. 죽음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 이것을 믿어 올바르게 살아가는 새 백성이 출범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놀라운 것은, 죽음의 패배로부터 새롭게 태어나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를 믿는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불 얘기를 하자면, 타오르는 삶의 불 길 앞에서, 도망치자는 부모도 아니고, 고매함으로 불길 속에서 죽자는 선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논쟁을 그치고 손을 잡아 함께 믿어야 할 것은, 불을 진압하고, 불 길에 타버려 무너진 모든 것을 새롭게 세워가는 한 분입니다. 곧,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말미에 등장하는 다음의 표현을 읽어보면, 이 본문이 부활을 소리치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큰 경련을 일으키며 나왔다. 아이는 죽은 것 같았다. 실제로 몇몇 사람이 "아이가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게 도와주셨고, 그러자 아이가 일어났다.
아이는 죽은 것 같았고,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선언해버렸습니다. "아이가 죽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믿음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신 이후에 보여주신 것은, 그 아이를 다시 일으키시는 상황의 대반전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일어났다." 이 '일어나다'라는 말은 부활을 의미하는 초대교회의 독특한 표현이었습니다. 즉, 이 장면은 우리에게 너무도 선명하게, 분명하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아들이 일어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에 잠기어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 길 속에서 타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물 가운데, 불 가운데 지날 지라도 우리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일어나셨음을 믿지 않습니까? 그럼 그 부활의 예수를 믿는 우리 자신들도 죽음을 뚫고 일어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무덤에 던져진 그가, 이 세상 모든 죽음의 무게를 뚫고 일어났듯이, 오늘 우리 역시 죽음을 깨뜨리는 두번째 열매들이 될 것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빈무덤에서 우리의 생존이 보장되었고, 우리들의 무덤들도 빈 무덤이 되지 않겠습니까?
3. 하늘에 소방호수를 꼽고서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꼭 확인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의 무능력입니다. 그들은 물과 불에 빠져 헤매는 사람들의 119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귀신들을 잘만 쫓았으나, 이상하게 이 소년에게 제자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채, 공허한 말들만 늘어놓았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들어와 그들만 있을 때 제자들이 물었다.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러한 부류는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
이러한 부류는 '기도'로만 쫓아낼 수 있다고 쓰인 사본도 있고, '기도와 금식'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고 쓰인 사본도 있습니다. 기도이든, 기도와 금식이든, 핵심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소방수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로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이 구절이 어찌 들리십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너랑 나랑 하자' 이 땅 여기저기, 사람이 있는 모든 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사람들은 신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 불길로 들어가,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는 일, 너와 내가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한 하나님과의 비밀스러운 준비. 이것이 기도요, 금식인 것입니다.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님과 나만의 작전을 짜는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새생명의 능력을 구하셨을 것입니다. 그 준비는 곧 현실의 결과가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늘과 연결된 소방호수입니다. 이 소방호수 가지고서, 불 길 피해서 달아나는 사람들과 정 반대 방향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 손해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괴로움 겪는 사람들의 짐을 짊어지려는 사람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세상과 거꾸로 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화재를 진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아멘이라 고백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도 각자가 이 비밀스러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소방호수를 하늘에 꼽고서 불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죽자고 하는 것 아닙니다. 불 끄자고 하는 것입니다. 안 될 일 하는 것 아닙니다. 이미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감람산 언저리에서 홀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예수를 생각해봅시다. 그 때 예수께서는 괴로움에 신음하며, 인생의 뜨거움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셨을 것이고, 하나님께 깊이 간구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통해서 죽음을 생명으로 역전시킨 능력이 흘러나왔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류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떠한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이 자리에 혹여나 그러실 분 없겠으나,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 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다음 구절을 힘차게 읽고 함께 기도하십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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