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1:17~34

from 창고 2014. 8. 3. 20:15


욥 21:17~34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니라

그의 달 수가 다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속셈도 아노라

너희의 말이 귀인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이 살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 하는구나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


누가 능히 그의 면전에서 그의 길을 알려 주며 누가 그의 소행을 보응하랴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앞서 갔으며 

모든 사람이 그의 뒤에 줄지었느니라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


  오늘 본문은 욥과 소발이 서로 논쟁하던 내용중에 한 토막입니다. 욥이 집도 자식도 다 잃고 피부에는 병이들어 정말 두 눈뜨고 못볼 지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로하고자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 중 '소발'이라는 친구가 이 욥을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합니다. "악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그로부터 위로를 얻으라." 즉 가산을 탕진하고, 병에 걸리며, 재앙을 겪는 사람은 악인이며,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발의 이 말은 참으로 잔인한 구석이 있습니다. 지금 욥이 어떠한 상황입니까? 소발이 말하는 악인의 상황입니다. 소발의 말은 이것입니다. "니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거야. 그러니까 너의 죄를 인정하고,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굴복해." 그런데 이 말은 욥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욥은 딱히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선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에게도 어느날 갑자기 자식들이 죽고, 재산을 잃었으며, 몸에는 병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그에게 소발의 말은 위로는 커녕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격입니다. 악인은 다름아닌 너고, 니가 겪는 어려움은 곧 하나님이 죄를 깨달으라고 주는 재앙이니까 어서 잘못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할 말입니까?


  우리도 이렇게 흔히 말합니다. 병에 걸리거나, 삶이 어려워진 사람을 보며, "하나님이 치셨나봐", "그러게 평소에 예수를 잘 믿지 그랬어." 이런 말하기가 얼마나 쉬운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말은 사실도 아닐뿐더러, 위로하는 말도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죄할 뿐입니다. 나는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으니 괜찮고,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너는 틀렸다는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었던 자에게 이러한 오해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예수께 묻기를,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인 것은, 그가 죄가 있기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가 죄가 있기 때문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상하게 답하는 사람들도 세상에 참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생하는 사람들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것이라 말합니다. 또는 "다 그 사람 업보지" 라고 말합니다. 혹은 "그 사람 운이 안좋았구만"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들은 다 거짓말입니다. '전생', '업보', '운' 이러한 말들은 이뤄지지 않을 껍데기 뿐인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다 갖다 버려야 합니다. 이 말들이 사람을 망칩니다.


  사람에게 갑자기 어려움이 찾아오고, 생각지도 못한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은 전생의 업보 때문도 아니고, 내가 악인이라 심판받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운이 나빴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선한 이들이 고난을 당하고, 오히려 악인들은 고난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런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에게 보이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사람이 겪는 고생, 어려움이 일어난 이유는, 다른 아닌 하나님의 일을 그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 대답합니다. 즉 고생에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뜻이란, 고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고생을 통해서 드러나시는 하나님은, 소발이 말했던 것처럼 고난을 통해서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저 지금 겪고 있는 이 땅의 문제를 얼른 해결해주기만 하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님입니까? 삶의 어려움을 통해 드러나시는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삶의 어려움들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강력한 어려움은 단연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죽음을 이기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사, 바로 그 하나님,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믿도록 하십니다. 자신이 문제가 없다 생각하고, 무언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감추십니다. 손에 쥔 것 때문에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정작 중요한 보물을 놓친채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려움과 고생은 손에 있는 것을 다 내려놓게 만들어버립니다. 손에 있는 것을 내려놓으니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죽음과 가까워지니, 인생이란 그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삶임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우리 속에 모시게끔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정죄하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잘 먹고 잘 살게 하시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아직 하나님이 세상에 죽음을 폐기처분하실 하나님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발은 바로 이 말을 가지고 욥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너의 고생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이 네 속에 드러나실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봅시다. 병에 걸린 이가 있습니까? 돈 문제 때문에 괴로워 하는 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주어 그들을 도와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을 속에 모셔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우리 안에 계신데, 우리가 아낄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명예가, 내 직위가 나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청지기요, 맡은 것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사람을 살립시다. 그렇게 우리가 손에 쥔 것을 아낌 없이 고생하는 자에게 내어 주고, 그 역시 삶의 어려움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속에 모시도록 도와줍시다. 석가는 인생이 고생이라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떠나서 다시는 태어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허무한 말이 어디있습니까? 인생이 고생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고생은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고생입니다. 이 얼마나 참된 위로입니까? 그 분을 우리 속에 모실 때, 우리에게 부활이 약속되고, 그 날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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