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이었는데요. 제가 교회 오려고 수원역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롯데리아 맞은편에서 51번 버스를 타야하거든요. 그래서 버스 언제 오는지 알려주는 전광판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10분, 전전, 하더라고요. 그 날 따라 어찌나 버스가 안오는지 진짜 한참을 들여다 봤습니다. 그러다가 '잠시후 도착'이 빨간 글짜로 깜빡깜빡 뜨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제 타야지 했는데, 이게 안오는거에요. 그래서 다시 버스 알림판을 보고 있었는데, 이게 또 작은 화면에 51번 순서가 되려면 한참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하염없이 들여다보는데, 옆으로 뭐가 붕 지나가더라고요. 보니까 51번이에요.  아, 이렇게 허탈할데가 있나. 저는 51번만 기다렸는데, 알림판만 들여다보느라, 정작 51번을 놓쳐버렸습니다. 부랴부랴 뛰어서 92번을 타긴했는데, 그 날 교회 지각할 뻔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가만 생각을 해보니, 저랑 비슷한 낭패를 본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누구냐하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이 사람들은 메시아라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하면서 기다렸냐하면, 안식일이라는 알림판을 들여다보면서 말입니다.

  안식일이 어떤 날인가요? 이 날은 쉬는 날입니다. 노동이 없는 날이죠. 그런데 이 정도의 의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날은 아무도 싸우지 않아요. 먹고 사는 문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곧 평화에요. 평화는 별거 아니에요. '싸움 없음'이 평화에요. 안식일날 싸움 없습니다. 경쟁없습니다. 게다가 천지 만물 지으신 하나님께서 6일간 일하시고 하루 쉬셨잖아요? 하나님이 일을 마치시고 쉬시면서 자신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누리셨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축하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평화와 창조세계를 축하하는 일. 이것이 안식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 열심히 지켰어요. 그리고 이 안식일의 주인공도 기다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거든요. 그래서 로마로부터 자유를 안겨주고, 안식일도 잘 지키게 해주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사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사람을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인데, 이 다윗 때에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 평화가 왔거든요. 그런 다윗과 같은 메시아.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그 안식일의 주인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면서.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진짜 메시아가 나타났거든요. 그러니까 버스가 온거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버스를 못알아봐요. 계속 알림판에만 매달려 있어요. 안식일을 꼭 지켜야 한다 이래요. 안식일을 안지키는 메시아는 상상할수도 없다 이럽니다. 그런데 얘네가 정말 안식일을 사랑하고, 그 법 주신 하나님께 충직하고, 해서 그런게 아니라요. 그 속내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 로마에게 대항하고 있었잖아요? 누군가와 갈등을 빚고 싸우려고 할 때 우리편을 단결시키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우리는 이래서 옳아, 재네는 저래서 나뻐." 이런거 자꾸 얘기해야죠. 정치판에서 보여주는 대부분의 힘들은 이런 식으로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전 정권 나쁘다. 심판하자. 우리에게 힘을 실어줘라. 이스라엘도 비슷하게 한거에요. 그리고 이것에 안식일을 써먹은거에요. 남 심판하는 일에. "우리는 안식일 지켜, 그러니까 우린 좋은 편, 우리 빼고 이방 사람들 다 나쁜 편, 왜? 쟤네는 평화와 창조세계를 축하하는 안식일도 안지키니까."

  이런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난주에 개콘에 보니까 어떤 개그우먼이 "대한민국 사람, 나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둘 중 하나야" 그러더라고요. 이 말이 참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들 편 가르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잘못된 기준을 가져다 놓으면 두 패로 자연스럽게 갈립니다. 자기 자신을 기준 딱 삼으니까, 나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두 패가 딱 나뉘지 않습니까?  만약 '잘생김'을 기준으로 놓으면 어떻습니까?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으로 나뉘죠. '키'로 하면 어떻습니까? 제가 이것 때문에 참 모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으로 나눠지겠죠. '돈'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으로 나눠지지 않겠습니까? '살'로 하면 어때요? '뚱뚱한 사람', '날씬한 사람'으로 나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못생겼고, 키도 작고, 돈도 없고, 뚱뚱해.' 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기준에 빠진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 그대로 귀하죠. 그런데 자꾸 되도 않는 기준으로 사람을 두 패로 가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나중에는 돈 많은 자들과 돈 없는 자들 패를 갈라서, 서로를 심판하자 하지 않았습니까? 프롤레타리아니 부르주아니 이름 붙여 가지고 온 세계가 두 패로 나뉘었던 일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거 이미 성경의 등장 인물도 아니고, 등장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이 세계 대표로 다 보여줬던 거에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세상을 두 패로 나눴습니다. 기준을 안식일로 놓은거에요. 그랬더니 이스라엘이 생각하기에, 세상이 두 패로 갈라집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우리', '안식일을 안지키는 니놈들' 그리고 심판하자. 이럽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사람을 두 패로 나누는 기준이 아니에요. 평화의 메시아. 그 분만이 사람의 기준이고, 심판의 권한 있으십니다. 예수님이잖아요. 안식일은 그 평화의 메시아를 가리키는 알림판이지, 사람 편 가르는 기준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니 편 내 편에 빠지면, 그 평화의 메시아가 옆에 와도 모를 만큼 양심이 무뎌져버립니다.

  여러분, 버스가 오면 알림판을 계속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 버스 타야죠. 버스 타려고 알림판 들여다본 것 아닙니까? 버스가 오면 알림판은 기능을 다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해 안식일을 지켰다면, 평화의 주인이 왔을 때 알림판에 미련을 왜 갖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은 이상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련의 정체를 들여다보니까, 얘네는 안식일이 의미하는 평화보다, 이것을 빌미로 니 편 내편 만드는 일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줄 버스가 왔는데도, 알림판을 보고 있는 사람과, 안보고 있는 사람으로 나눠서 싸움이나 벌이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하면, A.D. 66년에 안식일 지키는 이스라엘과, 안식일 안지키는 로마랑 갈등하더니 결국 붙었어요. '유대전쟁'이라 하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찌 되었습니까? 지도 위에서 지워졌습니다. 패 가르고 싸우다가, 나라를 다 잃고 남자들은 거진 다 죽고요. 나중에 마사다라는 지역에서 최후까지 로마에 항전했던 유대 사람들 시신이 1960년대에 발견되었는데요. 집안의 가장이 자기 처자식들을 다 죽이고 제비 뽑은 열 명이 나머지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들도 자결해서 960명이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안식일 안지키는 놈들 손에 죽느니, 우리 손에 죽는다 이러면서 끝까지 그 편나누기를 멈추지 못하고서 말입니다. 그 안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많았고요. 안식일 지키려다가 버스 놓친 것입니다. 평화라는 버스가 이미 그들을 지나쳐버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냐 안오냐 싸우는 사람들만 남았던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어볼까요?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개정)

  우린 경쟁 사회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편 나누는데 얼마나 빠른지 몰라요. 혹시 여러분들도 편 나누셨습니까? 교회에서, 직장에서, 혹시 가정에서. 혹여나 그러하셨다면, 니 편 내 편 하셨다면, 뭘 가지고 내가 니 편 내 편 나눴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 주신 그 귀한 율법, 안식일 가지고도 편 나누면 안되는게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가지고 편을 나누고 있는지 반성하고 뜯어 고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지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이스라엘 사람과 마찬가지로요. 그 평화의 버스 언제 오실지 모른다 했는데, 그 버스 왔을 때 우리가 그 버스를 알아볼 수 있는 깨끗한 마음 아니면 그것만큼 아쉬운 일 없잖아요? 51번 버스를 놓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개정)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본다 했습니다. 청결한 건, 내 편 니 편 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느 특정 편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시는 그 하나님이 보이는거에요. 버스를 안놓친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개정)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생업을 포기하고 예수님 오실 날만 세고, 기다리라는 이단 사이비가 하듯 깨어있라는 것이 아닙니다. 파당을 만들지 않고, 패 가르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양쪽을 화해시키는 사람으로, 평화의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는 맘과 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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