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다고 증명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만일 정말로 여러분이 이 복음의 소망 위에 세워져가며
굳게 서서 이로부터 다른 곳으로 떠밀려가지 않고
신실함을 계속되게 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창조세계에 선포된 후에 여러분이 들은 것이며,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악한 행실들로 ~ 적이 된: 몸과 마음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몸 가는 데 마음이 간 경우입니다. 몸이 악을 행하므로 마음이 멀리 떨어지게 되어 하나님과 적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나의 삶도 그렇습니다. 나의 행실이 악할 때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리 도망가 숨으려고 합니다. 마치 수풀 속에 숨으며 두려워 죄에 대해 하나님께 변명하려 했던 아담과 하와처럼 말입니다. 몸이 죄로 기울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적으로 여기며 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마귀의 작전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모여 성읍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잘살아보세'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시민권을 갖습니다. 하나님 나라 국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죄와 나를 분리해야 합니다. 내가 죄와 하나되는 순간, 나는 세상과의 구별을 잃어버립니다. 이 죄는 아주 작은 내면의 악함으로부터, 체제나 구조가 내게 치르도록 요구하는 댓가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시스템과 구조 속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날마다 다니엘처럼 그 구조와 나를 분리해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리된 인식이 살아있어야 그 속에서 정화조로 역할할 수 있는 거룩함의 힘이 주어집니다. 이를 통해 구별된 작은 한 개인은 개인보다 큰 공동체, 구조, 시스템, 국가를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합하여 혼합됨이 아니라 십자가의 끌어안음과 같은 속죄의 끌어안음 말입니다. 한 분이 온 세상을 끌어안으심처럼, 우리도 그의 영광에 대한 간절함과 소망을 힘입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속죄를 함께 경험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밀어내고 하나님을 끌어안으며, 예수님을 통해 세상으로 침투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의 살몸으로 화해시킴: 몸으로 행한 것(행실)의 댓가를 몸으로 치룸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은 흔적을 담는 그릇입니다. 생각의 흔적, 감정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죄를 기억하며 죄를 담고 있다면, 그 댓가는 몸의 죽음인 것입니다. 죄 없는 의로운 몸을 찢는 것 만이 속죄하는 길입니다. 죄로 오염된 몸은 스스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생명이 떠나 죽음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세계는 연결되어 있어, 죄 지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다스림 아래 놓인 전 피조세계가 죽음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타락의 사건이 발생하자 마자 하나님께서는 이를 막으시기 위해 의로운 자기 아들을 보내시길 약속하셨습니다. (창2:15, 21) 하나님은 애초에 사랑하는 자들을 죽음에 내버려주실 마음이 없으신 것이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깊으신 뜻을 나는 티끌만큼이라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렴풋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뿐입니다.
그렇게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사람에게 의미를 두고 계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움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움이 멸하는 것을 보고 계실 수 없었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과 이야기, 의미, 아름다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격입니다. '소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껏 약속하시고 의미를 두시고 계시는데, 마음으로 하나님과 적이 되고 타인과 적이 된 우리는 나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가치와 의미있음에 동의하고 이를 몸소 믿으며 실천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타인을 말도 안되는 가치로 칼부림하며 비교하며 서로를 종 삼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종 삼기 위해, 구조 속에 종됨을 택하고 있습니다. 참된 자유와 아름다움의 시선 없이 질투와 깎아내리는 눈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종 될 이유 없는 아들의 종 되고 죽으심을 통해, 그를 믿음으로 나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의심으로 파멸한 인격이 사랑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돌이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사랑하시고 다스리심이며,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찢어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잃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셨습니다. 생명 잃은 자들이 참 생명을 외면하며 죽음으로 달려갈 때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찢어 주시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자, 우리에게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는 왕되심의 이치입니다.
세상은 이 '하나님되심'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요? 그들에게 이 사랑이 와닿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자유인이 된 자는, 같은 부르심으로 타인을 향한 종됨의 자리로 향해야 합니다. 분명한 예수님의 걸음을 따르면 세상과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명령에 거스름이 없고, 세상에 굽힘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진리에 대해 굽힘이 없되, 철저히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따라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희생이나 고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나는 어떤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섬긴다고 하였는지 돌아봅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 함은 위에 지혜자로 군림하여 자비를 베풀어주는 모양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방법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여야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길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철저히 죄를 벌하며 멸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죄 값을 대신 치루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설 때 우리의 곁에 함께 서실 것입니다. 거기 서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무죄를 몸소 증거하십니다. 그 죄 값을 이미 의로운 아들이신 예수께서 지불하심을 믿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주셨기에, 이 법정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서로 오른쪽 눈을 찡긋 하십니다. 그러나 그 죄 값은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실함으로 값 없이 의롭다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를 '친구'라고 대변해주시는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옆에.
*이 복음의 소망: 이 예수의 신실함에 대해 들음으로 인해, 내 안에도 그의 신실함의 씨앗이 심겨져, 예수에 대한 신실함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법정에 예수께서 우리를 신실함으로 선언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나, 정상적인 인격적인 사이는 쌍방의 노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응답하여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소망을 향해 견고히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실함이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자들의 마땅한 변화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자녀와 서로 진실한 앎에 있기 때문에, 이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끌고 아버지께 나아가시고, 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향해 날로 세워져가며 거룩해져 가며, 그 뜻으로 하나되어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들로 세워져가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선택하는 의지와 마음'이 회복되어 자라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신실함 위에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신실함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선언될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듣고, 바울이 '종되었다' 고백한 이 복음은, 따라서, 우리 삶의 서사 전체를 뒤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 복음은, 단순히 내 죄를 가리워주는 검은 천이 아니라 참되게 아버지를 알아가는, 영광을 뵙고 영광을 덧입어 빛으로 끊임없이 초대되는 과정입니다. 이 세대 후에 오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갈 삶, 시들지 않는 참된 생명, 아버지의 얼굴을 아는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