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4~20

  요한이 체포된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 돌이켜서 복음을 믿어라!"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고,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거두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곧바로 그들은 그물을 두고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배에 앉아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종들과 함께 배에 두고 예수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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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이야기들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숨이, 단 한번의 단절도 없이 계속되어 왔듯, 이야기는 연결되어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시작이 있었습니다. 그 시작에서 끊어지지 않고, 그 위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기어코 달려왔습니다. 


  마가복음, 그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했습니다. 뜬금없이 등장한 세례요한! 그러나 그의 등장은 뜬금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 위에서, 마땅히 그가 나타날 때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는 출애굽을, 광야를, 요단강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나날을, 엘리야를, 즉, 이스라엘 역사의 이러저러한 장면들을 상기키시며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왕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왕이 오실 것이다!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


  그리고 예수의 세례. 그의 말대로 그 왕이 나타났고, 그 왕은, 악으로 넘실대는 풍랑을 가르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한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역사의 장면들을 늘어놓은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어 길을 낼 바로 그 사람, 아담에게 옷을 내어준 짐승, 죽임당해 피를 흘린 아벨, 아브라함의 쪼개진 제물, 하늘에 들린 놋뱀, 라합의 붉은 줄, 그 역사가 기다려온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 아들이라고,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구약은 끝나고, 세례요한은 저물고, 마침내 태양이 언덕 위로 솓아오릅니다. 무수한 등불들이 시대를 밝혔으나, 이제 등불들이 필요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태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태양과 같이 빛나는 분이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 돌이켜서 복음을 믿어라!"


  오늘 우리는 이 한 구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오랜 시간 살펴볼 것입니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씹고 맛보아, 이 구절이 가지고 있는 맛과 의미를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조금만 먼지를 걷어내면, 이 구절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인격을 뿜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인격을 마주하면, 오늘 우리 삶으로 동일한 인격을 뿜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1. 때가 찼다


  신약, 새로운 약속의 시작은 이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때가 찼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때가 찼다"에서의 때는, 역사가 말해온 바로 그 때입니다. 찼다는 것은, 바로 그 때가 마침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무르익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때가 되었으며, 역사는 무엇을 내놓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인류의 역사는 괴로움의 역사였습니다. 자신이 불행하기를 원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나, 진정으로 행복했던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점은 언제부터 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타락 이후부터 말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충격적인 곤경에 빠졌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려하나 진리를 추구할 수 없는, 정의가 손에 닿을 듯 해서 달려가보지만 결코 정의를 손에 넣을 수 없는, 무수한 혁명과 전쟁이 계속 되었으나, 그 누구도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역사를 인류는 숱하게 경험해왔습니다.


  무엇을 예로 들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아담과 하와의 일을 들 수 있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했던 최초의 인간이자, 최초의 죄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부터 스스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때부터, 아니 이 때에도, 그 절정의 시간이, 신의 위대한 역사가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을 저주하실 때 하시던 말씀들 중에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아담과 하와와 뱀의 잘못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어떠한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뜬금없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손은 뱀과 원수가 됩니다. 그리고 뱀의 자손은 바로 그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의 자손이 '자손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손입니다. 단수입니다. 한 사람입니다. 그 여자의 자손은 뱀의 머리를 박살냅니다. 뱀은 그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특정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이미 에덴에서 예언되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 가면 더욱 이상한 그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번 주에 확인했던 그림 기억 나시죠? 제물이 쪼개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핏 길, 그 위를 걷는 하나님, 반드시 지키겠다고 선언된 약속. 


  이런 그림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자식인 이삭이 산을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리아 산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태울 나무들을 아브라함이 아닌, 죽을 이삭 본인이 지고 올라갑니다. 모리아 산은 오늘날의 예루살렘입니다. 자기가 죽을 나무를 지고, 예루살렘을 오르는 아들의 모습, 우리는 여기서 또 이상함을 느낍니다. 무언가 역사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음을 우리는 구약의 곳곳에서 확인합니다.


  말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 출애굽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이동하고 있을 때, 그들은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곳에서 쓰디쓴 물을 발견합니다. 제가 예전에 '물'은 죽음을 상징한다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쓰디 써서 먹을 수 없는 이 마라의 물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방법은 독특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나무를 그 물에 넣습니다. 그리고는 그 죽음을 상징하던 물이, 달아져서 생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나무가 무엇이겠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기생 라합이 하나님 군대의 정탐꾼들을 받아주었습니다. 그 때 라합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창문에 내려뜨려 이스라엘에게 보인 것은 당대에 너무 드문 색깔인 '붉은 줄'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위임을 받았습니다. 즉, 그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피해 계속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도망다니던 다윗에게 세 명의 측근이 언제나 함께 했습니다. 마치 세례를 받아, 하나님께 아들로 선언 되었으나,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다녔던 한 사람과 대단히 닮아 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명의 측근을 어디든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 어두움의 깊이를 이기게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계십니까? 


  나라를 잃고 포로기에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많은 예언들 중에서 이미 두 개의 노래를 배웠습니다. 종의 노래와 왕의 노래. 


  만약, 이것이 진짜 역사라면,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린 에덴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출애굽의 이야기, 그리고 광야에서의 이야기, 가나안에서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 그리고 포로기 시절 위대한 예언들이 정말 역사라면, 우리는 이 역사들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들은 충격적으로 단 한 사람을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위대한 시인이 시를 적어내려 가듯이, 이 기록된 역사들은 시대와 장소를 달리 하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지의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이십니까?


  물론 이 미지의 인물에 대해서 이런 저런 기록들이 있었으나, 인류는 이 미지의 인물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며, 자기가 죽을 나무를 등에 지고 모리아 산을 오를, 죽음의 물을 생명수로 바꿀, 기생 라합의 붉은 줄이 상징하는, 왕이지만 끊임없이 도망다녀야 했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 자체였던, 종의 노래와 왕의 노래의 주인공, 그를 인류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었습니다. 역사가 기다려왔던, 인류에게 암시되었던, 그 한 사람이 마침내 그 정체를 세상에 드러낼 날이 마침내 도래한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역사의 교향곡을 복음서는 이 한마디에 압축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2. 하나님의 나라, 오는 다스림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 돌이켜서 복음을 믿어라!"


  그 다음 내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이 내용들을 들은 바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는 국가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나라는 왕의 다스림입니다. 즉, 이 최초 예수의 설교는, "하나님, 즉, 왕의 다스림이 오고 있다!" 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복음서를 고쳐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입니다. 잘못 끼어도 한참 잘못 끼웠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나라는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과 상관없는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다스림이 바로 이 땅으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창조주의 다스림을 떠난 땅에, 충격적인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떠나니 땅에는 악이 창궐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괴롭다는 사실말입니다. 행복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으나, 아무도 완전하게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정의를 붙잡으려 하나 정의는 언제나 우리의 손을 빠져나간다는 사실 말입니다.


  1992년도에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에서 유혈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보스니아인들, 크로아티아인들,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무려 40여만명이 죽었습니다. 집단 학살들이 벌어졌고, 많은 부녀자들이 성폭행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지금도 대량 학할 현장에 대한 발굴과 신원확인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그럼 보스니아에만 이러한 참극이 벌어졌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죠. 그럼 이것은 역사 속의 비극이냐, 아닙니다. 지금 오늘 우리에게 벌어지는 비극은 모두 동일한 양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문제, 인간의 문제, 악의 문제, 그것이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의 틈바구니에서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오게 될 것이라고. 만약 당신이 현실 속에서 악을 대면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을 지으신 창조주의 다스림은 그 악을 해결합니다. 공정하고 분명하게 그 다스림은 한 사람을 통해 이 땅에 실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체입니다.


  그 다스림이 어떤 다스림일지, 어떤 방식으로 오게 되는 것인지는, 우리는 역사가 기다려온 이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그와 함께 하기 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3. 돌이켜서, 복음을, 믿어라


  여기서 돌이킨다는 말은, 이전의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이전의 자신의 사고방식과 굳은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왕의 다스림은 신선하고 독특하며, 우리가 이전에 살아온 삶의 궤적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전의 삶에서 돌이키지 않고서는 참여할 수 없는 삶입니다. 정녕 그러합니다. 성적에 대해서 미련을 두고서, 진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세상 욕심에 대한 미련을 두고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말한 신의 다스림을 믿는다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돌려 그것을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돌이켜서" 입니다.


  그렇다면, 돌이킨 후 어떻게 합니까? 복음입니다. 이제 복음입니다. 복음은 왕의 대관식에 대한 소식입니다. 즉, 새로운 왕이 즉위 했으니, 이제 그 왕의 통치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드러운 메시지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이 복음은 혁명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품고 있는 메시지는 '이전의 왕은 틀렸다' 는 사실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수한 독재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목이 잘려 죽었고, 예수의 제자들은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순교했습니다. 이전에 당신들을 다스리던 것들이 다 파라오요, 세상의 거짓 왕들의 술수 였으며, 이제 진정한 왕이 나타났으니, 그 왕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생명을 저당잡고 있던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폭로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불이야" 라고 소리를 지르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군가는 그 말을 믿을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네 전도사님 말 믿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 왜냐하면 "불이야"를 믿는 순간, 여기서 뛰쳐 나가는 행동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왕이 폐위되고, 인자가 왕위에 등극했다는, 이 위대한 역사적 진실을, 이 예수가 선언한 바로 저 메시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은 결코 당신을 가만히 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 왕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자기 자신의 인생을 조명하여, 그 왕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개혁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 일은 백성의 일입니다. 그의 통치를 받는 백성만이 이 일의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의 백성입니까? 아니면 백성인 척하는 이방인입니까? 구분은 단순합니다. 그 분의 메시지가 당신의 일상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입니다. 만약 그 분의 메시지가 당신의 일상속에서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하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 자랑스러운 왕의 백성으로 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음을 그저 마음에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은 "불이야"입니다. 그것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그 옛날 출애굽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이 땅에 새로운 출애굽이 벌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일상을, 악으로부터 건져내어, 진정한 왕의 다스림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출애굽이 이 한 사람을 통해 벌어졌고, 그 사건이 당신에게 글자의 형태로 눈 앞에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 선택이 놓여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서 복음을 믿어, 삶을 새롭게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 돌이켜서 복음을 믿어라!"


  이 메시지는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이것이 당신이 지금 이순간부터 이번 일주일에 물어야 하는 신의 물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의  심판자로 인정된 예수의 물음입니다. 아니,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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