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32~43


0.


  배신자. 그리고 자신을 먹어야 한다는 최초의 만찬. 그리고 다시 배신자. 이제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밤을 보내십니다. 겟세마네라는 곳입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는 올리브산 한 쪽 기슭에 있습니다.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예수는 자신을 이 곳에서 짜내십니다. 


1.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 본문은 구약을 인용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시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은 영웅이시고, 하나님이시니 모든 것에 초연하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복음서는 예수를 그렇게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셨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해하며, 고민하는 인간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예수는 기도하러 가셨는데, 그들에게 보이신 모습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고, 내 마음이 죽도록 고민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지쳐서 낙망하고 불안해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는 기도하십니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기도는 참으로 처참합니다. 예수는 이미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때'가 지나가기를 구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최후의 시험이 시작된 듯 합니다.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사탄은 예수를 시험했습니다. 그 시험 내용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한 시험이었고, 둘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문제였고, 셋은 세상 권세를 얻는 문제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과 관련지어 이렇게 읽어볼 수 있습니다. 먹을 문제를 해결하면, 빈곤하게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평민 계급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려서 천사들이 받아주면, 그토록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지도계층들로부터 정당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로마와 싸우자고 폭력으로 들끓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종교를 지배하는 왕이 되면, 죽을 리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다 마다하고 죽어야 한다니요. 


  그것도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에 반항하는 혁명가에게 주는 사형틀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로마에 군사적 반란을 꾀한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원수라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십자가를 지실 그 어떠한 혐의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죽음은, 누군가 나를 흘겨만봐도 기분이 나쁜데,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면 나도 그 사람 미워지는게 사람인데,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죽음입니다. 게다가 모든 제자들은 배신할 것이요, 예수는 철저히 혼자맞게 될 죽음입니다. 그것도 나무에 매달리는 죽음입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나무에 매달리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 했습니다. 즉 예수는 사람들의 외면은 참을 수 있었다 해도, 끝내 하나님 마저도 고개를 돌리시는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그는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에게서 끊어진 채 처절하게도 온갖 저주를 뒤집어 쓰고 홀로 죽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죽음이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피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사역하시는 내내 이것은 시험거리였을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피하고자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이 방금 최후의 만찬에서의 그 잔입니다. 피입니다. 제물의 피. 언약의 피입니다. 즉 자신이 제물되어서 피흘리는 이 부당한 죽음을 피하면 안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꼭 이래야만 합니까? 왜 입니까? 왜 꼭 이래야만 합니까? 예언서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슥 13:7~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이 하나 뿐인 아들, 목자를 날카로운 칼로 칩니다. 이유는 한 가지 입니다. 세상의 3분의 1. 3분의 2는 모두 망하고 세상의 3분의 1만이 남습니다. 남은 그들은 시험을 받습니다. 그 시험은 은과 같이 연단되고자 받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 됩니까?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리라" 하나님과 이 백성은 서로의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위해서 예수는 죽으셔야 했습니다. 지난 주 본문의 표현에서 찾으면, 하나님 나라의 새 것입니다. 십자가로 새롭게 된 언약, 그 언약으로 사는 새로운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 부르고, 하나님은 그들을 내 백성이라 부릅니다. 이 사람들이 이 땅에 생겨나야, 이들이 하나님 뜻 따라 세상에 하나님을 전할 것 아닙니까? 창조된 모습 그대로 함께 살아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만천하에 보일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을 다시 깨우지 않겠습니까? 타락을 뒤집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생겨나려면, 한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마치 씨앗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듯,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한 사람이 생명을 위해서 부당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고민하십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내가 모든 것에서 끊어져,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면, 하나님의 소망이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사람이 새소망을 얻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소망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2.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런데 이 최후의 시험을 이렇게 극복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다 지친 몸으로, 희망을 꿈꿀 수 없는 맘으로, 그가 마지막 붙잡았던 것은 아버지의 원이었습니다. 원은 뜻입니다. 끝내 자신의 뜻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언가 뜻하신 바가 있고, 그것이 끝내 옳을 것이라는, 자신이 역사상 가장 비참하게 죽더라도 그 죽음 뒤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이것을 끝내 믿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실함'이라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영어로는 faithfulness인데, 제가 보기엔 가득 차 있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게 맞아!', '이게 옳아!' 하면서 기쁘게 확신있게 걸어가는 힘찬 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마음에 놓인 한 줄기 실처럼 보입니다. 그 실은 보이지도 않을만큼 가늘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실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 길 끝에 아버지 계심을 믿고 한 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실함입니다. 신실함을 다른 말로 이렇게 번역하기도 합니다.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신실했고, 하나님은 그 신실함을 의롭다 선언하셨다."


  '믿음, 곧 신실함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 이르는 마음. 그래서 '믿'은 '및'입니다. 믿음은 미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 다다릅니다. 거칠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이 천지입니다. 그럼에도 하늘 아버지께 이르는 마음. 그 마음에 애써 움직이려는 몸. 하나님께서 그 맘과 몸을 받으셔서 새로운 맘과 몸으로 돌려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현실 마다 다른 선택과 판단을 하며, 풍랑 속에 요동치는 배처럼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릴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믿는다면, 여러분의 고민으로 가득 차 있는 맘, 그 맘 속에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은 한 길이 놓여 있음을 알 것입니다. 마음 속에 놓은 그 실 한 올을 알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 가세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더라도, 아버지를 믿는 맘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세요.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죽기 직전에 보여주신 모습이었으니, 우리도 죽더라도 그렇게 걸어요. 고민하여 죽게 된 순간, 그는 아버지를 믿고, 그는 죽으려 합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죽지 않고, 믿고 죽으려 합니다. 그렇게 지친 몸과 맘으로, 아무도 돌파하지 못했던, 저주와 죽음을 뚫고 반대편 생명으로 나아가는 돌파를 감행하십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죽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고민하게 합니까? 여러분이 죽고 다시 살아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보다 더 고민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영생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감입니다.


  이제 예수의 맘이 달라졌습니다. 고민하여 죽을 것 같은 마음이 원이 되었습니다. 이 원은 누구의 원입니까? 아버지의 원입니다. 그 원, 아버지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하나님의 원대로 죽고자 하는 맘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기도가 있었습니다. 마음이 고민하는 것은 몸이 죽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어찌 달라진 것입니까? 몸이 죽고자 하니, 마음이 사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의 관계는 시소와도 같습니다. 몸이 맘을 다스려야 합니까? 맘이 몸을 다스려야 합니까? 몸맘이면 안되고, 맘몸이어야 합니다. 마음은 몸의 관제탑입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흘러들어오고, 몸이 그 뜻에 복종합니다. 더이상 몸의 생명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몸은 생명을 위해 내어줘야 합니다. 예수는 이거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을 이뤄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제자들의 곁으로 돌아오십니다.


3. 깨끗한 맘 지키면, 깨끗한 몸 받으리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지금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은 시험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올곧은 맘으로, 함께 이 위기를 뚫어나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시험의 정체, 예수께서 짊어지신 고난의 무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기도 안하는 핑계로 많이 크리스찬들 사이에서 인용되는 이 말씀은, 영어로는 이렇습니다. "The spirit truly is ready, but the flesh is weak." 마음이 하나님과 같아졌는데, 그 맘으로 살기에 이 몸이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언가 느끼죠. 맘으로 하나님과 같아진 사람들의 결말을 말입니다. The spirit truly is ready, but the flesh is strong 하고 말하려면 말입니다. R. 부활입니다. 맘으로 하나님과 같아진 이들이, 그 맘에 합당한 몸을 입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마음이 건강한 육체를 얻게 되는 것



  기도하시고 난 뒤 예수께서는 더이상 고민하지 않으십니다.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십니다. 이 '동일한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험에 들지 않고 맘이 깨어있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 기도 아니겠습니까? '깨끗'이란 말이 그런 말입니다. 류영모 선생은 '깨끗'이라는 우리 말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끝까지 깬다'는 것입니다. 그럼 깨끗합니다. 맘을 깨고 깨고 또 깨어서 죽는 날 까지 깨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깨고 또 깨어서 하나님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맘이 깨끗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맘이 깨끗한 자에게 깨끗한 몸을 주십니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몸의 한계를 깬, 새 몸을 주십니다. 깨끗한 몸. 곧 부활의 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맘이 깨어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몸도 깨어날 것입니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잠이 덜 깼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이제 할 말도 없습니다. 기도는 기억입니다. 우리의 영원 전으로 거슬러, 우리의 아버지이신 그 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잠은 잊음입니다. 잘 때는 모든 것을 잊어야 잘 잡니다. 현실에서 보았던 것, 들었던 것 마저도 모두 깨끗이 잊는 것입니다. 자꾸 현실을 잊으려는 제자들을 예수께서는 세 번이나 깨우셨습니다. 그리고 깨나서,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기억합니까? 지금이 시험의 때요, 하나님 붙잡아야 할 때임을 기억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끝까지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끝까지 잤습니다. 예수는 끝까지 생각하려고 했고, 제자들은 끝까지 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제는 자고 쉬라', 이 말은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전까지는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간 되었습니다. Time is over.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서 보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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