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1~1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0.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언제나 전체 그림 안에서 분명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마치 퍼즐 전체 그림을 알아야, 각기 퍼즐 조각들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마가복음 13장은, 결국 두 가지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1.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다.
2. 무화과 나무가 열매맺는다.
이 상반되는 두 개의 문장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뜻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분명 이스라엘이 망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열매 또한 기대하라 하셨습니다. "잎사귀가 나고 가지가 연해지면" 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 두 개의 문장을 가만 들여다보면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말라버려서 죽어버린 나무인데, 그 나무는 생명을 낳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것이 도통 무슨 말이겠습니까? 죽은 나무에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마치 100살이 넘은 할아버지와, 이미 생리가 멈춘지 한참된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가능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을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말라버리는 나무와 열매는 상관없는 듯 보입니다.
1.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 이후, 우리는 이제 마가복음 14장으로 진입합니다. 그 시작은 이러합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이 표현이 오늘 본문 전체의 해석의 틀을 제공합니다.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파라오의 이집트에서 마지막 날 밤, 어린양을 죽여, 그 양 덕분에 죽음에서 넘기운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무교절은, 출애굽할 때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빵을 먹었음을 뜻하는 날입니다. 둘다 출애굽의 날입니다. 유교절을 지내고, 그 이후 무교절을 지냅니다. 어린양을 죽이고, 빵에서 누룩을 없게 합니다.
이걸 가만 생각해보면 또 의미가 있습니다. 빵은 몸이에요. 예수님이 오병이어하실 때, 빵을 찢으면서 이는 내 몸이라 하셨거든요. 누룩이 상징하는 것은 죄에요. 갈라디아서에 '적은 누룩이 빵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몸 다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교병'이라 불리는 누룩 없는 빵은 몸에서 죄를 없게 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 자유의 날. 이 이집트 노예 생활의 마지말 날 밤, 어린양은 죽고, 이후 사람들은 몸에서 죄를 없게 합니다. 이 몸이 자기 몸 뿐 아닙니다. 공동체도 몸입니다. 공동체에서도 죄를 없게 합니다. 이런 날이 유월절과 무교절, 출애굽입니다. 이걸 머리 속에 딱 넣고서, 본문을 읽으라 해서, 마가가 오늘 본문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이 유월절, 무교절 이틀 전날 하셨던 행동 자체가 출애굽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출애굽과 아주 긴밀한 관련이 있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어지는 이야기를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가 밝혀집니다. 제대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저는 오늘 설교의 결론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 생각해봅시다. 죽는 나무에서 열매 맺는 것.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불가능입니다. 잘 사는 것만 생각하는 세상은, 잘 죽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일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생명을 낳는 방법입니다. 산모의 경우 그러한데, 만약 산모가 아이를 낳을 적에, 죽을만큼 힘을 주지 않아서, 아이가 나오지 않으면, 산모도 죽고 아이도 죽습니다. 그래서 산모는 죽을 힘을 다해서 아이를 내보냅니다. 이 고통은 어마어마하다고 하는데, (저는 안겪어봐서 잘 모르지만) 그 죽음 언저리에서 고통 속에 힘을 줄 때, 생명이 나옵니다. 그래야 산모도 살고 아이도 삽니다. 죽음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이죠. 우리는 모두 이 과정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씨앗이 열매 맺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그 씨앗은 열매 맺는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으로 생명 낳는 일이 다름 아닌 출애굽입니다. 그 어린양이 죽지 않았다면, 오늘날 유대인들도 없고, 오늘날 기독인들도 없습니다. 어린양의 죽음 때문에 탈출의 역사가 있었고, 언약 백성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생명 낳는 일은 특이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생명들이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그러니 예수 죽음을 통해서 사람이 생명 얻었다는 말은 낯선 말이 아닙니다. 죽음없이는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말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말라버리는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가 맺힌다는 말은, 자연스러운 생명원리임과 동시에 어떠한 암호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말라버리는 것을 통해서 열매가 맺힐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출애굽의 날이다. 출애굽의 날에 죽는 것은 어린양이다. 이것은 분명히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여기에 말라가는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참으로 개판아닙니까? 종교 지도자란 자들이, 누구보다 생명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죽일 생각입니다. 제대로 죽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사람이, 치밀하게 죽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유의 날인 유월절 가까워오는 이 때에, 한 사람이 못마땅해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라는 작자들이 이러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 이러한 민족, 이러한 나라, 말라버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요즘, 이 나라의 말라버림을 보고 있습니다. 온통 문제입니다. 문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시민들의 발은 바다에서도 묶이고, 땅에서도 묶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정부를 믿지 않고, 이 와중에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지고 이기냐, 머릿속에 니 편, 내 편, 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걸 말라버렸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궤계'라는 말이 나오는데, 속임수, 작전, 함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죽이려는데 정당한 방법은 없으니 속여서라도 죽이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들이 예수를 따르므로, 부당하게 그냥 죽였다간 민요, 즉, 폭동을 일으킬 수 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축제 때는 피하도록 하자. 이것에 결의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자유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예수는 자유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모두가 자유로 인해 기뻐할 때, 한 사람은 자유를 빼앗기는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한단 말입니다. 언제나 말라버린 나라 안에서는 옳은 사람들이 핍박을 받습니다. 나라가 말라버린다고 정직한 외침을 하는 자는 언제나 돌을 맞습니다. 이미 세력을 잡고 있는 자들을 흩어버릴 수 있는 것은 진실 뿐인데, 말라버린 나라에서는 그 진실의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눅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죽이고자 하는 너희 이스라엘 말라버린 나무다. 나는 푸른 나무다. 그런데 푸른 나무가 죽습니다. 왜 죽습니까? 잡아 죽이려는 마른 나무들이 있어서 죽습니다. 만일 누군가 여러분들을 잡아다가 죽이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예수를 그렇게 하려는 자들이 공모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어서 피하거나, 먼저 이들을 치거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식사중이십니다. 그것도 문둥병, 몸뚱이 끄트머리가 썩어서 떨어져나가는 병에 걸린 자의 집에서 밥먹고 계십니다. 유대사회에서 밥 먹는다는 것은 동류다, 친구다 라는 뜻입니다. 남들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와중에도, 그는 비천한 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예수께 이 일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때 정말 우발적이고, 특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여자가 나타나서 나드로 만든 향유를 깨서 예수의 머리 위에 붓습니다. 나드는 꽃 이름인데, 이 꽃을 따다가 꽃향기 나는 기름을 가리켜 향유라 합니다. 이 여자는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자입니다. 밥 먹는 예수의 머리 위에 향유를 통째로 들어다가 붓습니다. 아마 예수의 머리위에 이 기름을 부었을 때, 방안 전체가 꽃향기로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여자가 이러한 우발적인 행동을 벌였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문화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얇은 세마포로 싸서 돌무덤에 안치시킵니다. 시체는 3일 뒤부터 부패가 시작되는데, 이 때 악취를 방지하기 위해 시신 위에 주기적으로 향유를 부어줍니다. 그리고는 시체가 다 썩어서 뼈만 남으면 추려다가 납골함에 담아 보관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장례 풍습입니다. 즉, 이 여자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이 여자도 감지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아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별별 방법들을 다 고안하고 있는 와중에, 그걸 몰랐겠습니까? 제자들이라고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쉬쉬했던 것 같습니다. 설마. 인자가 설마. 예수님이 설마 하고서 이 문제를 덮어 두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 문제를 덮어두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예수님이 죽임당하실 것 같으니,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마음으로 예수께 찾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예수의 죽으심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벌였던 창조적인 방법이 시신에 붓는 향유를, 예수께 미리 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리는 당시 이 여자가 몰랐던, 좀 더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1.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다.
2. 무화과 나무가 열매맺는다.
1'. 예수가 죽는다
2'.
이 2' 항목에 어떠한 문장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13장과 14장은 이렇게 구성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이야기의 전모를 아는 상황 속에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저 2'. 에 들어갈 내용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자 역시 예수의 죽음을 감지했을 지언정, 그 이후의 일을 생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저 2'에 들어갈 문장을 말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뭔가가 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몇주째 마주하면서, 고민하게 됩니다. 진정한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아무도 아이들을 건져낼 수 없고, 온갖 흑색선전과 불신으로 가득한 이 나라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그런데 기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2'.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무언가 일이 벌어졌고,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생명으로 시작되어 생명으로 마칠 이 시간의 지평 위에서 죽음이 끝일리 없습니다.
3.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러나 죽음이 끝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의 방식을 납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라면, '죽음으로 생명을 낳는다'인데, 이 사람들은 그러한 방식 원치 않습니다. 죽음이 끝이니까, 죽기전에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있다면 돈 모으는 일입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돈 모으는 일만큼 열심내야 할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여자가 향유를 깹니다. 이 향유가 3000만원 짜리입니다. 아마 여자가 가진 전재산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향유옥합"이란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이 여자에게 3000원만원 전재산은 목숨줄입니다. 이것 없으면 당장 먹을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그 너머 아무 것도 없다면, 이 여자는 이 3000만원짜리 향유를 그렇게 한순간에 깨뜨리면 안됩니다. 그런데 깼어요. 다 깨어 예수께 부어버렸어요. 적어도 분명한 건, 이 여자에게 내일은 없다는것입니다. 내일은 없고 예수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깨요. 깰 수 있어요. 끝까지 깰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도, 자기 재산도 끝까지 깨니, 이 여자는 깨끗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방식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죽음이 끝이라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것을 돈 가지고 의미 부여 하려고 합니다. 돈이 목숨줄이니, 그것만큼 중요한 것 없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1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오늘날 3000만원 정도라 칩시다. 3000만원을 그 자리에서 깨어 예수의 머리 위에 부은 행동을, 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거 가난한 사람 줬으면, 얼마나 유용하게 썼을 것인가. 하며 이 여자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가만 두어라. 지금 이것이 좋은 일이다. 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다. 이 여자가 한 행동은 잘한 일이다. 하십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을 이 여자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예수의 죽음. 이 죽음이 끝이라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게 짜증날 겁니다. 그 돈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 돕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까운 거에요. 돈 욕심 난 거에요. 당장 예수께서 죽임당하실 판국에, 여자는 그것을 느끼고 있는데, 이들은 못 느낍니다.
예수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운 이 시점에 그는 어린양입니다. 피흘리고 먹힐 고기입니다. 또한 그는 죄없는 몸입니다. 그 몸이 찢겨 그 살점을 먹어야 이스라엘은 출애굽합니다. 그러니 이 보다 중요한 죽음이 어디있겠습니까? 이 죽음은 그냥 개죽음이 아닙니다. 옳은 소리 했다가 그저 죽고나서 끝이고,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지는 그러한 죽음이 아닙니다. 돈으로 따질 수 있는 죽음도 아닙니다. 다시,
1.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다.
2. 무화과 나무가 열매맺는다.
1'. 예수가 죽는다
2'.
2'.가 있는 죽음입니다. 이것이 뭔지 그 정체는 앞으로 밝힐테지만 말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어떤 방식으로 맺을 것인가?' 이 질문이 중요하다고, 이 질문이 남겨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번에 답이 나왔습니다. 죽음이에요. 그 방식이 죽음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무엇이기에 정의와 평화를 낳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의 죽음은 어린양의 죽음, 출애굽의 죽음이에요. 부당함을 끌어안는 죽음이에요. 그래서 그는 인류의 씨앗이에요. 그가 죽어서 생명이 나와요. 그는 인류의 어머니입니다. 그의 산고의 고통으로 생명이 나와요. 그는 어린양이에요. 어린양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어요.
그 분은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 자신의 감정, 자신의 느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어요. 그 큰 뜻에 맞추기 위해서,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 내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리고 궁극에는 자신의 생명 마저도 하나님께 드려요. 즉, 제물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버려서, 태워 올려지는 거에요. 이것이 예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충격적인 말씀, "세계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말은 이미 예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의 소식이 온 세상에 두루 전해질 것을, 왜 예수의 죽음이 온세상에 전파됩니까? 그 죽음이 생명 낳는 죽음이라 그래요. 세계의 생명의 싹을 틔우고자 인류 대표의 씨앗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죽음이에요. 지금 팔레스타인 구석에 있으면서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세계를 위한 것임을 알고 계셨다 이 말입니다. 결코 자신의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 안하셨다는 거에요. 사람이 이런 생각 갖기가 쉽습니까? 그냥 나 죽고 끝내자 이러기는 쉬워도, 자기의 죽음에 의미가 있어서, 그 죽음으로 세계를 건지겠다는 생각을 갖게가 쉽냐는 겁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이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예수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인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이었어요.
게다가 이 복음의 소식이 전파되는 것에는, 여자의 행한 일도 전해져서 기념될 것이다 합니다. 3000만원도 싸요.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데 고작 3000만원? 이것은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의 눈에는 보이고, 누구의 눈에는 안보여요. 여러분의 눈에는 보입니까? 죽음을 깨고 나오는 생명. 그 생명 앞에 돈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보이냐는 겁니다. 안보이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거에요. 내 욕심, 내 생각, 내 판단이 다 살아 있는 거에요. 그렇게 산 나는 생명 못낳습니다. 예수의 가치는 죽으려는 나에게만 보입니다.
4.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이 자리가 아픈 자리입니다. 예수의 제자중에, 예수의 방법을 도통 받아들일 수 없어서 불만 가득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아마 예수꼐서 '죽음으로 생명 낳는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챘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눈치채냐 안채냐가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하냐, 안하냐 입니다. 이 머리좋은 가롯유다, 그것을 알았는데, 받아들이기가 싫어요. 죽음으로 생명낳는다니 헛웃음이 나옵니다. 내가 3년간 따라다녔건만, 죽을 생각만 하는 대장이 한심해보입니다. 배신의 때가 다가온 것이죠.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가롯유다의 배신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에요. 은전 30냥. 이것이 그의 선택의 값 쯤 되겠습니다. 예수의 죽음의 가치를 알아보면, 30냥이든, 3000냥이든, 중요하지 않아요. 그 죽음이 생명 낳는다는 사실 믿으면, 심지어 내 목숨 마저도 아깝지 않아요. 그러니 목숨을 걸어서, 생명 낳는 일을 하는 산모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 낳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14장 들어왔는데, 예수와 이 여자 말고는 그러려는 사람 없습니다. 심지어 제자중에도 없어요. 밖으로는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고, 안으로는 제자가 스승을 팔아버리는 처참한 상황 속에, 향유로 머리가 젖으신 예수가 식탁에 앉아계십니다. 어떤 생각이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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