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항상 그림을 그리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화가도 아닌데 이게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들 생각을 넘은 큰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해를 잘 못하고 갸우뚱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아, 그렇게 되는 것이구나' 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소위 '최후의 만찬'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따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야기가 커져만 갑니다. 이렇게 말해봐야 소용없고, 실상을 확인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
먼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출애굽기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BC 1446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전입니다.
출 1:11~16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파라오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몹시 싫어하였고, 그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이집트 사람들이,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다.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이것을 뭐라 말해야 합니까? 지배당함, 자유없음, 억눌림과 개고생, 착취당함, 집단 유아살해. 이스라엘은 이러한 상황이었습니다. 파라오의 힘에 억눌려 옴싹달싹 못하는 상황입니다. 예전 동대문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이러했습니다. 닭장 같은 작업 공간에 갇혀 먼지 가득한 비인간적인 노동현장에서 서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옷 만드는 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것 뿐입니까? 이 지배당하고, 자유없고, 억눌리고, 개고생하고, 착취당하고,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을 인류의 역사에서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대강으로 땅을 온통 뒤집어 놓으니 생태계는 파괴되었고, 머리에 생명 아닌 것들을 가득 집어 넣어놓으니, 세월호는 뒤집어졌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이? 출애굽이. 그러니까 출애굽은 더이상 인간과 인간이 지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를 되찾는 것입니다. 억눌리고 개고생하던 것에서 평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집단 유아살해나 세월호 사건 같은 끔찍한 재난이 벌어지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만약 1960년대 평화시장에서 가장 바라던 것은 이러한 출애굽이었을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가장 바랬던 것도 바로 아이들의 구조, 곧 출애굽이었습니다. 이 출애굽이라는 말은 그저 오래전에 있었던 이스라엘만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 상징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여행을 떠나는 것. 그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것을 출애굽이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머리 잘 쓰는 순서대로 줄을 세워서 여러분들의 미래를 압박하는 작금의 상황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꿈꾸는 것도 역시 출애굽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를 억합하는 끝판왕인 죽음에서부터 새롭게 살아나는 것도 출애굽입니다.
이 위대한 사건이 역사 속에서 계속 기념되었고, 그 의미를 보전해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식사'입니다. 그 날을 끊임없이 기억하며, 이 위대한 정신을 인류에 배달한 집배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을 통해서 출애굽의 의미가, 성서 기록과 유월절 식사 전통을 통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단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서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많은 수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사야서를 읽으면 가슴이 시원해진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제2의 출애굽을 맞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뿐입니까? 이 유대인들이 보존해온 출애굽의 기억은 세계 각지의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자유를 갈망했는데, 정말로 그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실제 역사의 기록이니, 이 얼마나 가슴 시원한 소식이었겠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하면 지금 이 시궁창같은 현실에서 출애굽할 수 있을거야'. 자유를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 성서 읽는 사람들은 다들 이 생각을 했단 말입니다. 출애굽 생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3500년 전 출애굽의 역사가 유월절 식사를 통해 예수님에게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출애굽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우리가 예전에 살펴본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광야와 같은 들판에서, 하늘에 축사하여 빵을 찢어 먹는 것은, 마치 만나를 먹으며 광야를 걷던 그 시절 그 얘기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출애굽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죽기 직전의 식사 장면에서 까지 그 얘기를 하십니다. 지금 유월절 식사에서 최후의 만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한 정신. 출애굽입니다.
2.
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 때 무엇을 먹는지에 관해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이 날에 먹는 것은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을 죽여서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먹습니다. 그리고 혀에 대기도 괴로운 쓴 나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까 말했던, 지배당함, 자유없음, 억눌림과 개고생, 착취당함, 집단 유아살해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상기시키는 맛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누룩은 마음이 삐뚫어진 것을 상징하고(얼마전 부터 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빵은 몸입니다. 즉, 마음이 삐뚫어지지 않은 사람을 먹고서, 출애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하나 하나 살펴봅시다.
막 14: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떡이라 되었지만,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개역성경에 번역된 떡은 모두 빵입니다. 팔리스타인 지역 사람들은 떡 안먹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번역될 때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해서 떡이라 된 것이죠.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빵이라 하면 모를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 누룩없는 빵을 들어 복 내려달라고 기도하시고, 그것을 찢어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빵을 찢고서 그것을 자기 몸이라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오병이어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자의 살점을 먹어야만 그 속에 생명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번엔 잔을 가지고 포도주를 따라 각자 한 잔씩 나눠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막 14:23~25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지금 마시는 이것이 나의 피, '언약의 피'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더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는, 지금 마시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말을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림은 출애굽 그림임을 염두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게 자유를 짓밟히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을 속박에서 건져서 자유를 찾는 여행을 떠나게 하셨나요?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지신 것은, 언약을 기억해서 입니다. 제가 출애굽 중요하다 중요하다 했는데, 그 출애굽은 언약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니 '언약-출애굽' 이렇게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선동에 출애굽을 이용하지 않게 됩니다. 출애굽은 언약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그 언약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세운 언약이라 했습니다. 그 언약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언약입니다.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즉,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1) 한 사람으로부터 여러 사람이 된다는 것이요, 2) 삶의 터전을 얻어, 3) 복과 저주의 통로가 되어 땅의 모든 민족이 이 사람들을 통해 복을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이 세번째 말도 참 생각해볼수록 신기한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복과 저주의 통로가 되는데, 결국 이 사람들을 통해 모든 족속이 받는 것은 복뿐입니다. 저주가 없습니다. 마치 정수기 필터와 같습니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이 다 들어오는데, 이 사람들을 통해서는 깨끗한 물만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저주를 복으로 변환하는 무언가를 마음 속에 두게 된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어쨌든, 이것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고, 이 언약 때문에 출애굽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피 얘기를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이 주신 이 잔이 바로 이 아브라함 언약을 위한 피라는 것입니다. '피'에 관해서 생각하려면, 창세기 15장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약, 즉 어떠한 약속을 하기 위해서는 양 편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양 편이 이러 이러한 약속을 한다 했을 때, 그 가운데에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죽여 피흘리게 합니다. 그럼 그 언약 당사자 사이의 땅이 온통 피로 흥건해집니다. 이렇게 제물을 죽여 피를 낸다는 것은, 이 제물의 생명을 걸고서, 반드시 이 언약을 지키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잔을 주시며 "이건 내 피, 언약의 피다" 라 말씀하신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브라함 언약을 지키기 위한 제물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피흘림으로, 이 아브라함 언약이 이뤄진다 이 말입니다. 즉, 이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사람이 나오고, 그 여러 사람이 삶의 터전을 얻어, 이들을 통해 온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이상한 말씀을 하나 보태십니다.
막 14: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포도주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포도주 잔을 돌리셨는데,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을 마시는 날까지는 다시는 포도주 안 마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로, 예수님이 다시 포도주를 마시시는 때는 언제일까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날이 하나님 나라의 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때가 바로 그 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최후의 만찬 이후, 언제 포도주를 마시셨습니까?
요 19:28~30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이 이 때 포도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무엇을 이루신 것입니까?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순간, 예수께서 죽으신 이 절망의 순간은 하나님 나라의 새 것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스리시는 새로운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순간, 즉, 아브라함 언약에서 말한 '여러 사람'이 생겨나는 시작이 바로 이 때라는 것입니다.
3.
오늘 설교 서두에, 예수님은 큰 그림을 그리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이 최후의 만찬 속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출애굽 전통을 이어받은 십자가입니다. 인류의 모든 지배당함, 자유없음, 억눌림과 개고생, 착취당함, 재난에서의 출애굽을 이루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언약 이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예수가 제물되어 피흘리심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눈치 챘겠지만, 지금 예수님의 식탁에는 가장 중요한 메인 메뉴가 빠져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불에 그을린 어린양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린양이며, 자신이 고난에 불에 그을려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에서는 어린양 구이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어린양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살점을 사람들이 먹고서, 즉, 그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 사람이 태어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들이다 이 말입니다. 이것들을 예수께서 이미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최후의 만찬을 사이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지난 주 살펴봤었던 가룟유다 얘기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 생존만 추구하다가, 돈 따라 갔던 그 못난이 말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바로 뒷부분에는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막 14:26~31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출애굽의 어린양으로, 사람들을 출애굽시킬 것이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양쪽으로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배신자라는 사실입니다. 가룟유다도 배신자고, 베드로도 배신자입니다. 이건 그저 제가 생각해본 것입니다. 어디 나와 있는지도 모르겠고, 신학적으로 타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의 머리 속에 이것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괴롭기 짝이 없는 인류의 아픔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머리를 짓누르는 가시 면류관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죽으시는 예수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 제물되어 죽으십니다. 온통 피를 흘리시겠다고 말씀 하신 가운데, 그 한 쪽으로는 배신자가 있고, 그 또다른 한쪽으로도 배신자가 있습니다. 무슨 장면인 줄 알겠습니까? 그런데 한 배신자는 끝내 자살하여 정말 못난 사람으로 죽었고, 또다른 배신자는 마음을 고쳐 먹어, 새로 태어나 예수를 위해 죽었습니다.
이런 그림으로 이해가 되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 분은 하나님이시며, 말씀이신지라, 창조 때와 같이 그 분이 말씀하시면 이루어집니다.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님 말씀은 우리를 한 가지 사건으로 향하게 하고, 그 사건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께서 생각하시고, 말씀하신대로, 현실이 이뤄지는 것이라면, 십자가를 통해 제물되신 예수의 피흘림을 믿는 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이 복을 받게 될 그 일도 확실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일이 역사에 처음 벌어졌는데, 그렇다면 그 식사를 '최초의 만찬'이라 불러야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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