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12~21


1. "무교절의 첫날, 곧 양잡는 날"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이 날이 어떤 날인줄 알겠지요? 유월절과 무교절. 이 날은 출애굽의 날입니다. 이 날 모든 가정들은 식사를 준비합니다. 이른바 유월절 식사입니다. 제가 자꾸 자꾸 얘기하니까 여러분 이미 익숙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또 얘기 합니다. 이 유월절 밤을 생각해보는거에요.


  이 날 밤에 다른 집에서는 다 잔치를 준비합니다. 유대인들은 해 뜰때가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해 질 때가 하루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그 날 밤에 온 가족이 모이는 거에요. 모이면, 그 집안에서 가장 나이 어린 아이가 집안의 가장 어른에게 물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왜 오늘 밤이 다른 날들과 다른 밤이에요?" 그럼 할아버지가 얘기해줍니다. "얘야, 그 날은 말이란다..." 하면서 출애굽 이야기를 설명해주시죠. 파라오의 발 아래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그런데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죽임당한 양, 곡소리로 가득해진 이집트, 이 포로들을 건져내신 하나님과 그의 종 모세, 그 모세를 추격하는 이집트 군대, 바다의 갈라짐, 그 사이를 행진하는 언약 백성, 그리고 광야. 시내산에서의 율법 받음. 마침내 얻은 가나안. 이런 얘기를 들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명절, 이 유월절과 무교절은 둘 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명절이고, 유월절이 끝나면 곧장 무교절이 이어집니다. 이 날에 다들 잔치하느라 난리가 납니다. 우리가 36년간 노예살이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려 430년을 애굽에서 종살이 했습니다. 이만하면, 자기들 역사를 온통 까먹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조선에서도 일본사람이 되고 싶어서 앞장 서서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했던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역사고 나발이고, 그저 고생 않고 살았음 좋겠다 싶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뒤집히는 날이 왔죠. 왕인줄 알았던 파라오는 하루 아침에 패배자가 되었고, 노예였던 이스라엘에게는 하루 아침에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이 날은 기쁘다는 말로는 모자릅니다. 반전의 날. 모든 것이 뒤집힌 날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잖아요? 물론 그 때도 이런 날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파라오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악하고 죄 많은 나라에서 고생없이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모두의 예상을 뒤집어 엎고 찾아온 그 날. 바로 이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친일파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운 날이요. 힘겹게 버티던 민중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날을 기념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바로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도.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이게 무슨 말인줄 알겠지요? 어디서 우리도 출애굽 기념할까요? 이 말입니다.


2. 우연아닌, 역사의 필연으로 준비된 식사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공간이 준비가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지독히 운이 좋은 분이시죠. 나귀도 거저 얻어타셨죠. 유월절을 기념할 공간도 임대료 없이 거저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다 말하기에는, 그 분은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럼 그 분은 운이 나쁘다 얘기해야 합니까? 아니면, 좋다 얘기해야 합니까? 어쩌면 좋은 운, 나쁜 운으로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자성어는 우리에게 아무런 교훈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안만 줍니다. 잘될 때 망하게 되고, 망할 때 잘되게 된다. 잘되라는 겁니까? 망하라는 겁니까? 이렇듯 '운', 일방적인 '잘됨', '못됨' 으로 생각하면 인생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뭘해도 잘해주기만 한다는 신은 가짜입니다. 뭘해도 저주만 내린다는 신도 가짜입니다. 한쪽 방향만 있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시간이 있고, 이 시간은 어느 한쪽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에 의해 뜻있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섭리'라 부릅니다. 뜻을 풀면, '미리 내다봄'이라 할 수 있는데, 미리 내다볼줄 아는 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역사를 이뤄간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이 그러합니다. 죽기 위해서 가는 예수의 마지막 식사가 치밀하게 준비됩니다. 섭리입니다. 역사에는 방향이 있고, 그 방향에 따라 조금도 오차가 없이 치밀하게 무언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유월절 식사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인류는 이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단 한 번의, 기이한 죽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식사 장면은, 사실 그 죽음이 있기 이틀전이고, 이 죽음 이틀 전에 벌이는 죽음 준비입니다. 그 시작으일 향유 옥합 깨뜨린 여자가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공간에서, 바로 그 시간에.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 이 식사가 죽음을 준비하는 치밀하게 계획된 식사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이 식사에서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아닙니다. 이 그림은 다빈치가 그린 것인데, 유대 문화를 모른채 성경만 읽고서 상상해서 그린 것이라, 당시 상황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을 글로 배운 것이죠. 유대인들은 저렇게 의자에 반듯이 앉지 않고요. 긴 의자에 기대어 앉습니다. 그래서 거의 절반쯤 누워서, 아주 편한 자세로 식사를 갖습니다. 성경에 기대어 앉았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 표현은 다 밥먹었다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렇게 기대어 먹는 것은, 그리스의 자유민이 밥먹는 방식입니다. 종은 기대어 먹지 않습니다. 옆에 서 있죠. 다른 집들도 이렇게 할까요? 아마 그들은 어디 갈 사람 채비를 하고서 급히 먹으라 했던 말씀대로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식사는 독특해요. 종살이 하던 이들이 예수와 함께 자유인이 먹는 자세로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예수님의 식사를 '최후의 만찬'이라 부르기는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 날은 최후의 만찬이지만, 최초의 만찬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를 잇는 것이지만, 이것은 분명 이 전 식사와는 다른 새로운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떤 면에서 최초의 식사라 부를 수 있을지는,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그 전에, 여러분은 만약 죽기 직전 마지막 제자들과의 식사라면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가장 해야 할 말, 중요한 말을 그 날 밤에, 모두가 잔치를 벌이고 있는 그 날 밤에, 그 준비된 다락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대어 앉아, 하시지 않겠습니까?


3. 사람 파는 못난 이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 시작은 배신자에 관한 얘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는 열둘이 모두 있었습니다. 다 앉아서 먹는데 예수께서 한 사람이 자신을 팔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제자들은, "나는 아니지요" 하고 있었습니다. 인자가 죽을 것이라고 이미 전에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가 있지만, 이러한 방식일줄은 제자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자라는 단어에 대해서 기억이 날 것입니다. 모든 악이 심판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이양받는 그 인자. 그런데 그 인자가 죽는데다가, 그 죽는 방식이 참으로 참혹합니다. 제자에 의해서 배신당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예수께서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역사이나, 그 예수를 죽게 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 잘 생각해보니, 우리 말에 이 구절을 표현할 수 있는 딱 들어맞는 말이 있어서 놀랬습니다. 류영모 선생이 설명했던 '못난이'라는 말이 이 구절에 딱 들어 맞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못난 사람은 없잖습니까? 다 이미 났기 때문에, 나지 못한 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 사람 중에서도 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 못 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긴 났지만, 난 사람 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못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너 못났다 하시는 것입니다. 왜 못났습니까? 인자를 죽게 하니 못났다 그 말입니다. 사람을 죽게 하는 사람 못난 사람입니다. 사람을 살리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 주셨는데, 그 생명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난 구실 못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못난 사람의 이름도 알고 있습니다. 가룟출신의 유다.


  우리는 유다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떤 이가 유다입니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사람 파는 사람이 유다입니다. 사람이라는 단어와 판다는 술어가 붙어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을 '판다'니요.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돈으로 가치 매김하는 것이 유다짓입니다. 즉, 사람을 파는 것이 사람 죽이는 일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흔하게 사람 팝니다. 사람을 돈으로 평가하는게 사고 파는 생각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자라서 높이 보고, 가난해서 얕잡아 보는 것이 유다의 시선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자를 높게 생각하는건 부자에게도 미안한 일입니다. 돈 때문에 높게 보는건 사람 잘못보는 일입니다. 잘못봤으니 그 사람에게 미안한 일 아닙니까? 가난한 이를 얕잡아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입니다. 부자를 높게 보는 이가 가난한 자를 얕잡아봅니다. 기준을 그렇게 세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 주 우리가 본 것과 같이, 예수님의 방법, 죽음으로 생명 낳는 방법을 못받아들이면 유다입니다. 이 방법이 못마땅해서 스승을 팔아치운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돈으로 가치매기는 것, 죽음으로 생명 낳는 예수의 방법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그 마음에 사탄이 들어갔다하는, 유다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4. 준비된 어린 양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는 축복하시는 그 자리에서 유다를 쫓아내지 않습니다. 저 같으면, 저 놈이여. 저 놈을 쫓아내. 하든지, 아니면 유다야 너 그러는 거 아니다. 하고 설득했을텐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죽으려 하지 않고 죽이려하는, 사람을 사고 팔려고 하는 이 사람을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가 자신이 말했던 방법을 싫어하고, 자신을 팔아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에게도 빵이 돌아갔단 말입니다.


  이 빵이 무슨 의미인줄 알면 놀랄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오병이어의 재연입니다. 똑같니 빵을 들어 축사하십니다. 그리고 빵을 찢으십니다. 이 빵이 무엇입니까? 오병이어 때나 최후의 만찬 때나 이 빵이 무엇이겠습니까? 몸입니다. 인자입니다. 예수 자신입니다. 찢기는 무교병일 것입니다. 누룩없는, 즉, 죄가 없는 몸이 찢겨짐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달리 해석할수 없도록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그리고 잔을 가지고 감사기도 하시고 제자들이게 나눠주시니 다 마셨습니다. 말씀하시길,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는 무슨 말입니까?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안마신다 하셨습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이 한 구절은 다음 주에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놓친 사실이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에 메인 메뉴가 어디있습니까? 어린양은 어디있습니까?


이튿날 세례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개정)


왜 최초의 만찬인지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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