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3:14~26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0.


  우리가 지난 주 배웠던 내용들을 정리해봅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적에 어떤 얼빠진 제자가 성전 멋있다고 뻘소리를 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건물 성전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서 조용히 묻기를, 이 일이 언제 벌어지겠으며, 어떤 징조가 있을까요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 성전이 무너지는지, 그 때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 정확히는 리모델링한 제 2성전이 무너질 적의 일입니다. 그 날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A.D. 70년입니다.


  그 성전이 무너지던 A.D. 70년이 가까울수록, 유대와 로마의 사이는 극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유대는 로마와 무력으로 몰아내야 한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로마도 이것을 가만두지 않을 심산이었습니다. 사회가 불안해지니 많은 사람들이, 내가 메시아다 나를 따르라, 내가 메시아다 나를 따르라 사람들을 현혹했고,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세상을 둘로 쪼개려는 듯,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서로 죽일들 하였고, 사람들이 이러니 사람들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자연도 지진과 기근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렇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했습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산고의 시작.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한 시작이니 이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했습니다.


  다만 어느 쪽에 편 들어 서로 싸우자는 움직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했습니다. 서로 죽이자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 편에도 들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심하면 사람들이 끌고가서 때리고 매질하고 지도자들에게 끌고 갈텐데, 그 때 성령께서 그 끌려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했습니다. 핍박하는 자를 용서하는, 그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말씀을 하게 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둘의 분열은 점점 속도를 높여갔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자식들이 부모를 죽게했던 일마저도 벌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A.D. 66년 유대전쟁이라 불리우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1. 도망가라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분위기도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두려워 말고, 견디라 하셨던 예수께서 이제 분위기를 달리하여 도망치라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언제 입니까?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서지 못할 곳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이 내용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니엘 11: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이 내용은 예언입니다.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이제 막장에 치닫게 되는데, 그 막장의 끝은 예루살렘 성소에서 이방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유대성전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던 공간입니다. 그 성전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성소는 1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만큼, 그것도 들어갈 때 죽임당할 수도 있어 발목에 끈을 매고서 들어가는 그러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소에 이방 신상을 분향하는 행위는, 한 민족의 인격을, 자존심을, 완전히 깔아 뭉개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멸망으로 치닫는 일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로마에게 대항하려 했던 이스라엘이나, 그 이스라엘의 중심을 능욕하는 제국이나, 한 쪽을 죽이면 자신은 살 것 같지만,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죽이면 다른 하나도 죽습니다. 꿀벌이 멸종되면 꽃과 나무가 열매맺도록 수정될 수가 없어서 사람도 죽는다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벌이 죽어도 세계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데, 사람이 죽는 것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 하나 죽어도 그 부모를 비롯 모든 가족이 평생 시름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데, 한 민족을 그렇게 깔아 뭉겨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까? 짧은 승리의 쾌감, 내가 대장이라는 자만심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를 죽이면 나도 죽습니다. 너를 멸망시키면 나의 멸망도 찾아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소를 더럽힐 때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5절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전까지는 두려워 하지 말아라, 나중까지 견뎌라 하셨던 예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 성소에 들어선 것을 보거든 이제는 도망치라 했습니다. 서로 둘로 나눠서 싸우는 것을 넘어 이제 한 쪽을 멸절하려 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라 하셨습니다. A.D. 66년, 유대전쟁이 발발하여, 이후 7년여의 기간동안 서로를 죽일 듯 싸우더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운명을 달리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A.D. 70년, 로마 황제 티투스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깃발을 가지고서 성전을 능욕하더니만, 그 성전을 모두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그 아름답던 돌들이 떨어져서 모두 박살이 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와의 전투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죽고, A.D 72년 까지 전쟁은 이어졌는데, 끝까지 저항하던 사람들의 시신이 1963년 대대적으로 발굴 되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묘사한 한 대목을 인용하면, 


  '로마 군대가 마사다 성벽을 부수기 시작한 날 밤,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960여 명의 동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비굴한 항복이냐, 로마인의 칼에 의한 죽음이냐. 벤 야일은 제3의 선택을 제시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한데 모아 불살랐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가족 중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끊게 했다.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열 사람을 뽑아 나머지 남자들을 죽이게 했다. 뽑히지 못한 남자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열 사람만 남게되자 그들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마지막 사람은 다른 아홉 명을 죽인 뒤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은, 1916년이 되어서야, 벨포어 선언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사이로 강제로 비집고 들어간 것이지, 유대 전쟁이후, 남은 얼마 안되는 유대인들은 평생을 떠돌이로 돌아다니며 실향민으로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2.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아직 유대전쟁이 발발하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그들이 제대로 알아먹고 실천으로 옮겼다면, 생존보다 생명을, 자기 자신을 비워 예수 인격으로 하나됨을 추구했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했습니다. 아니 안했습니다. 자기 생존을, 왜곡된 중심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심정으로 우리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아마도 이것을 못알아 듣는 사람들을 염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듣고 깨달았던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아, 이것은 지금 로마와 싸우면 안된다는 말씀이구나. 로마의 멸망을 바라는 것은, 곧 우리의 멸망을 재촉하는 일이구나. 우리 싸웠다간 성전도 무너지고 정말 큰 일 나는구나. ' 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 빙산에 부딪치기 일보직전인 타이타닉과 같습니다. 예수는 경고방송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무너진다. 니네 잘못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다. 환란의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복수심에 붙타는 자들, 혹은 저 말씀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던 용기 없던 자들에 의해, 이스라엘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것은 최후의 심판에 관련된 구절이 아니라했습니다. 그렇게 오해되지만, 이것은 분명 A.D.70 성전 무너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늘 우리에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우리는 알게 되었으니, 세계 대표로서 보여준 이스라엘의 실패를 또 다시 반복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의  '읽는 자'가 우리 아닙니까? 잘못된 공동체의 중심. 그 왜곡된 중심에 대한 열심이 결국 서로를 파멸의 길로 몰고 간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확인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번드르르한 성전도 중심이 될 수 없고, 생존을 향한 불타는 의지도 중심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부심도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동체의 중심도 아니고, 중독되어서는 좋을 것 하나 없는 군더더기들입니다. 군더더기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지, 결코 중심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진정한 중심은 무엇일까요?


3. 진정한 중심

 

  다른 나라 말고, 이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봅시다. 제가 '왜곡된 중심'이다 했는데, 마음에 잘 안와닿을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주의"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슨 무슨 주의'라는 것은 그것을 중심 놓겠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공산주의는 공산을, 자유주의는 자유를. 그러나 이 세상 어떤 '주의'든 간에 중심될만한 것 하나 없음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지금 세계는 자본으로 하나되었는데, 이것이 인간다운 삶을 가져다 주던가요? '공산', 즉, 함께 생산하는 것이 중심이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레닌이든, 스탈린이든, 모택동이든, 김씨 3부자든, 극악무도한 짜먹는 놈들만 만들어내지 않았나요? 자유가 중심이면 될 줄 알았는데, 현대가 말하는 자유는, '자신의 쾌락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로 여겨져서, 건들지 말라는 것이 자유가 되지 않았나요? 이 세상 모든 '~주의'들은 다 거짓 중심입니다. '민주'주의면 좋습니까? 백성에게 주권을 주는 것은, 독재정치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피한 타선책일 뿐입니다. 늘, 중우정치의 위험 속에 남 탓하면서 말입니다.

  이 '주의'가 '주의'와 만나, 오늘 읽었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비스무리하게 진행된 우리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6.25입니다. 무슨 무슨 주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는 것이지, 이것으로 사람 죽이자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잘못된 중심에 꽃혀서, 동족의 가슴에 총검을 찔렀던 우리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 다 이미 유대인들이 세계대표로 경험했었던, 보여주었던 아픔이었습니다. 우리가 당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조심하였더라면, (당시에도 우리나라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 본문의 의미를 알고서, 그대로 행했더라면, 그러한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서로 미국편이다 소련편이나 편나누기 할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이 민족은 하나님 아래서 하나'라고, 생명을 걸어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의 대다수였다면 그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허나, 우리 민족의 정신은 말씀대로 힘이 없었고, 우리 민족의 심성은 복수심의 땔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에서 깨우침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그 비극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3.1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렀지만, 우리 민족은 참다운 독립도, 자유를 누려본 일도 없고, 6.25가 벌어진 이후, 하나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국의 역사 위에 여러분들이 있습니다. 이 비극을 극복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자기 몸뚱이 하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은 명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역사를 가진 조국에 태어난 것에, 여러분은 아무런 의견을 보태지 않았습니다. 그저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 자유, 노래를 부르고, 자유 엄청 좋아하지만, 우리의 존재가 시작되는 그 처음은 전적인 타율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은 명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의지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있게 한 누군가의 뜻을 살아내기 위해 이 땅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됨입니다. 그런데 건물 성전 따위로 하나됨이 아닙니다. 돈 중심으로 하나됨 아닙니다. 이 민족이 분열의 역사를 끝내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 그래서 진정한 하나되는 것에 필요한 중심은 오직 하나 입니다. 전체를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의 인격, 그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 이것 말고는 다른 중심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중독되어도 좋은 유일한 것입니다. 


  중독은 한자로는 가운데 중(中)에, 독 독(毒)을 씁니다. 독의 한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독이어서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생존을 위해 살지 말자 말자 했지만, 생존이 나쁜 것입니까? 생존은 '살아 있음' 아닙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이 좋은 살아 있음에 중독되어서, 이것이 삶의 중심이 되면, 이 좋은 것도 썪습니다. 무너질 공든 탑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생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망할 것입니다. 중독은 영어로 addiction입니다. ad는 "~에 붙어 있음"이란 뜻이고, diction은 라틴어 dicere에서 왔습니다. '판결하다, 선언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addiction은 "어디어디에 붙어 있다고 선언됨, 판결됨"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디어디 붙어 있다고 선언되어야 할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인격. 그 인격에 중독되어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것, 이것에 우리의 마음도 목숨도, 힘도 뜻도 다 태워 하나님 앞에 제물로 나를 드리도록, 그 인격에 사무쳐 사는 것. 이것 말고는 우리가 중독되어 마땅한 것이 없다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중독되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일에 중독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죄에 중독되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사람 아니고서야, 참된 하나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1+0만이 =1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제로로 만드는 사람 아니고서야, 하나,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도 자신을 제로로 만드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모두 비우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하나님도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둘로 분열되는 그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 않고, 하나되는 예수 복음을 말하며,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더라도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이 되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 중독된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못합니다. 개인은 못합니다. 하나님께 중독된 사람'들'만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혼자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말씀 보려 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나님 찾아 자신의 인격을 돌아보려 하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곤욕입니다. 쥐약입니다. 잘 안됩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할 수 없어도 공동체는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어도, 두 세 사람 안에서 말씀은 그들 중에 계십니다. 자신을 제물로 드리려는 두 세 사람 사이에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공동체의 이름을 모였다면, 옆에 있는 사람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 할 수 있다면, 우리 공동체는 건실하게 설 수 있습니다. 번듯한 눈에 보이는 중심 없어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그 예수의 인격으로 무엇보다 튼튼하게 설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인격. 이것이 보이지 않는, 그러나 모두가 중심삼아도, 다른 이들을 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체를 살리는, 공동체의 참된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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