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초등부 서른 한 번째 말씀


구속함을 얻은 우리 IV

-몸이 다시 사는 것과


0. 지난 이야기


1) 전쟁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직 잔여병력이 남아 있습니다. 이미 승리의 십자가 깃발은 적의 진영의 중심에 꽃였으나, 아직 사탄의 잔여병력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 붙는 자에게는 승리를, 사탄의 졸개들에게는 패배를 선언하는 평화유지군인 것입니다.  


2) 그 전쟁의 종결을 믿는 자에게만 영혼의 정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혼의 정화에 대해서 오랫동안 다루었습니다. 마음에 있는 악이 소멸되는 정화의 과정을 걷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승리를 믿는 그 직후부터 임을 말씀드렸습니다.


3) 그 전쟁의 승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1. 죄책을 용서받은 죄인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둘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럼 우리 안에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까? 여러분 안에 죄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죄는 오늘도 시퍼렇게 살아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진리를 보지 못하게 눈 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그 더러운 힘은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온전히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나. 여기 있는 나 그대로 입니다.

  이제, 두번째 질문입니다. 그럼 그러한 우리에게 죄책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죄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십자가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가 받아야 할 죄책에 대한 형벌들을 모두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는 있지만, 죄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우리의 죄책을 모두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냥 죄인 아닙니다. 형벌을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죄책없는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제사가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는 그 사람은 그 믿음대로 그 완전한 제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책이 전가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만 찾아오는 기적입니다. 치유입니다. 나음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 우리의 죄책이 모두 넘겨진 제사. 그것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이미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 두 발로 서기도 전에 그 제사는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완전한 제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2. 완전한 제사의 제물


  그런데 어제 여러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 중에 많은 친구들이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제 우리가 나눈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는 이 위대한 제사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이 영원한 제사에, 어떤 제물이 올 수 있느냐의 물음입니다. 이 자리에, 인간의 죄책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는 자리에, 다른 피조물이 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자리에 오기 위해서는,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잇는, 인간의 죄책을 대신 감당하는, 이 영원한 제사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는 제물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의 죄책을 대신 지어줄 수 있죠. 죄가 있는 제물이 어떻게 다른 피조물들의 죄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말만 하는 양치기 소년이 저의 증인이 되어 줄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용불량자가 빚보증을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피조물은, 절대 다른 피조물의 죄책을 대신 감당해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에 비틀 거릴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피조물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는 제물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 영원한 제사의 제물은 마찬가지로 영원해야 합니다. 제사가 단 한번, 완전하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제물은 영원해야 합니다. 모든 시간을 초월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소나 양으로 제사는 한 번 드린 것으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소나 양은 영원하지 않거든요. 이것은 완전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자꾸만 드려야 하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이것으로는 죄책을 완전하게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위대한 제사에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죄,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죄.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대신 져주는 제물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영원해야 합니다. 그럼 다시 조금 전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죄책을 대신 감당할 수 있는 피조물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 피조물은 첫째 죄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영원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있다면 말씀해보십쇼. 죄가 없고 영원한 피조물, 무엇 입니까? 그런 피조물이 어디있다는 말입니까? 피조물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죄가 있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럼 우리의 죄책을 대신 감당할 수 있는 피조물이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다시 물읍시다. 인간의 모든 죄책을 감당할 수 있는 제물은, 첫째 죄가 없어야 하며, 둘째, 영원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실 수 있는 유일한 한 분 누구이십니까? 


히브리서 4: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히브리서 7:24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계시는 분이므로, 제사장직을 영구히 간직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뿐이십니다. 그 분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영원하십니다. 죄가 없으시며, 영원하신 그 분께서 우리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에 매달리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진노의 형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말 그대로 주님이십니다.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으신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왜 예수의 십자가 달리심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그 십자가의 제사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죄책이 영원하고, 완전하게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간과해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은 완전합니다. 이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책이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를 믿는 자에게, 죄책은 없습니다. 결단코 없습니다. 죄책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를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혼잡케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얕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은 모든 죄들이 거기에,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단 한 번의, 영원한, 그리고 완전한 제사입니다. 죄책을 완전히 소멸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 완전한 제사를 믿으십니까? 아멘.

  그렇다면 우리의 죄책은 전가 되었습니까? 예스.

  우리에게 죄로 인해 받을 형벌들이 남아 있습니까? 노.  

  

  감사하십시오. 예수를 믿는 당신에게는 죄책이 없습니다. 따라서 형벌도 없습니다. 그 죄책은 모두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용서되었고, 형벌을 모두 그 제물께서 모두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슬프지만 기쁜 소식입니다. 아프지만, 행복한 소식입니다. 십자가 제사는 곧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왕을 죽인 살인범, 암살범들을 살려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짜 삶을 가르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십자가로 부르시고, 그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셨습니다. 그 영원하고 죄 없으신 아들의 죽음은, 그 십자가로 부름받은 모든 사람의 죄책을 없이 하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3. 그 용서의 효력


  이 용서. 우리 대신 죄책을 아들에게 전가시키신, 이 위대한 용서는 그저 '아 그렇구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효력으로 그 사람의 인생에 다가옵니다.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전에는 이 세상의 질서를 따라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그 사람 안으로 돌입하고 침략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수를 믿음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은 죄책감이 없는 그 완전한 반석 위에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주는 실제적인 효력이 발생합니다.


-마음의 정화

  그 첫번째는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그 보배로운 피가 묻어 있습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납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어집니다. 죄가 아닌 의를 갈망하게 됩니다. 사탄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보게 됩니다. 이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선한 방향. 이전에는 꿈꾸지도 않았던 진리를 향한 갈망. 그것이 그 마음 안에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악에 오염되었던 그 마음이 점점 시간에 따라 정화되는 것입니다. 악에 물든 마음에게 시간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그 마음에게 있어 시간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것은 180도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한 사람의 시간은 죽음이, 한 사람에게는 시간은 생명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육체의 새로운 삶

  그 두번째는 그 사람의 육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육체는 어떠합니까? 타락한 육체의 비참함을 요한복음 11장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33~38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님, 와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단 말이오?"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어귀는 돌로 막아 놓았다. 


  예수님께서는 죽어버린 육체를 보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은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눈 먼자를 보게하는 당신이, 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은 사람을 살리십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분은 우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릴 수 있으시면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셨습니다. 비통은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프다는 뜻입니다. 그 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나사로를 볼 수 없어서? 나사로가 불쌍해서? 아닙니다.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보신 것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에 빠져서, 썪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아픔을 예수께서는 아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타락은, 자기를 높임은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로마서 7:24,25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죽음은 이 땅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정지시키는 어마어마한 힘입니다. 이 강력한 힘에 인간이 빨려들어가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진 인간의 비참한 결과요, 운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의 효력은, 그 죽음이라는 강력한 소용돌이를 소용없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8:21,22

  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인간이 겪게 된 타락의 비참함을 우리 주님은 슬퍼하셨지만, 그러나 그 분은 거기서 주저 앉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깨뜨리시는 장본인이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장례를 뒤로 하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서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시는 우리의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붙잡아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의 마음에는 그 분의 피가 뿌려진다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의 육체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히 10:22, 새번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맑은 '물'로 깨끗이 씻습니다. 이 물로 씻음은 세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어, 몸을 물로 씻고 예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자는 다시는 예전의 습관과 죄악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왕을 암살하려다가 붙잡힌 자객과도 같습니다. 왕을 살해하려다가 붙잡힌 자객을 그 왕이 용서해주었습니다. 그 용서에 감복한 그 자객은 자진하여 그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것은, 그 왕의 신하가 된 자객이 왕의 은혜를 모르고 다시 왕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믿는 자의 죄는 곧 용서에 배신으로 답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죄는 곧 2차 반역입니다. 물로 몸을 씻고 예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옴이 갖는 의미는, 이제 예전의 더러운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토한 것을 먹는 개가 되지 않고, 진창에 뒹구는 돼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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