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초등부 열 여덟번째 말씀


깨어진 거울들XI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걸음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들은지도 벌써 열 여덟번째 시간입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충격적으로 잘 집중했고, 여러분들의 똘망똘망한 눈빛은 한편으로 저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글을 다 뗸지도 몇 해되지 않는 여러분들이, 말씀을 쓰고 듣는 그 모습들은 다시 저를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바로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옳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무엇이라 외치며 이 일을 시작했는지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처음 선언했던 그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오늘부터 어린이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날 그렇게 말씀 앞에 어린이 되기를 결심한 우리들은 그 날이후로, 그 분의 말씀을 따라서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그 걸음은 쉽지 않지만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걸음입니다. 그 걸음은 나약하지만, 쓰러질 때마다 그리스도의 잡아주심을 느끼게 되는 걸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지금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 자리에 이 '어린이 됨'의 위대한 일에 동참하지 않은 친구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무릎꿇는 이 정직함을 외면하는 자 있습니까? 오늘 다시 한 번 어린이의 정직한 걸음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이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바이킹 타봤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때 바이킹 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바이킹 뿐만 아니라 모든 놀이기구에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꺅꺅 소리를 질러가며 놀이기구 앞에 줄서고 있을 때 저는 회전 목마에 올라탔습니다. 제가 회전 목마를 느릿느릿 돌고 있을 동안 친구들은 저보다 열 배 빠른 속도로 환상특급을 즐겼습니다. 저도 친구들과 함께 타고 싶었지만, 그럴수는 없었습니다. 너무 무서웠으니까요.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에버랜드로 소풍을 왔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바이킹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리다고 핑계댈 수 있었지만, 중학교 3학년 씩이나 되어서 바이킹도 못탄다고 했다간, 친구들에게 놀림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탔어요. 눈 딱 감고 탔습니다. 

  그 날 저는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무중력 상태에서 느껴지는 그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그 쾌감,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정점의 높이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그 교감과 환호. 열 두번 정도 탔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좋은 건축가가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실제로 집을 지어봐야 한다. 좋은 하프 연주가가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실제로 하프를 연주해봐야 한다. 바이킹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이킹에 대해서 백 날 연구하고, 쳐다본다하더라도 소용없습니다. 바이킹을 타봐야 합니다. 바이킹을 타봐야 바이킹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말씀으로 하자, 말씀이다 참 말들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해서 백 날 떠들어봤자,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바이킹도 타보지 않았으면서 바이킹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시점에 와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 말씀대로 살아봐야, 내가 진짜 죄인임을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봐야, 그리스도에게만 희망이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말씀대로 살아봐야, 말씀의 참 맛, 믿음의 선배들이 말하는 하늘로부터 오늘 기쁨을 알 수있습니다. 다른 방법 없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그것 뿐입니다. 어느 날 말씀이 나의 죄를 말하고 있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씀이 구원을 말하고 있을 때 내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 그것은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주 안에 있는 보물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삶으로 말씀을 증명하게 될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해왔어, 앞으로도 해나갈 것이며, 영원히 영위해 나갈 그 작업들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다음 화면을 봅시다.


1. 고대 문서의 해독


  이것잠이 이번 주 암송 구절입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못 읽죠. 저도 간신히 읽을 줄만 압니다. 이 글씨들은 히브리어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 언어들로 기록되었습니다. 언제쯤 기록되었을까요? 다음의 그림들을 봅시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고대문서입니다. 그것도 최하 3000년 이상된 고대 문서들입니다. 그것도 다 낱장으로 있고, 찢어지고 바랜 원본들로부터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복사본이 생겨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본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지루한 글자들의 나열을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볼때, 어쨋든 저쩃든 그 말씀을 보는 사람은 고대 문서를 해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해독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 고대문서들을 해독하고, 그 안에서 의미들을 끄집어내고, 또 그 의미들로 살아내는 작업. 이 시간을 초월한 작업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향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저 글자들을 다 읽어낼 줄 알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것은 신학자들의 몫입니다. 그러나 어쩃든, 기독교인이라면, 저 고대문서의 의미에 따라 살아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씀 공동체입니다. 이 말씀 공동체에 속한 자,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수천년 전 쓰인 이 글자들이 오늘 나의 삶과 절묘하게 맞아들어간다는 것을 저는 기적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들이 생겨났습니다. 말씀이 정말 중요해, 말씀이 정말 중요해, 말씀대로 살아야지, 말씀대로 살아야지, 끊임없이 말하지만, 말씀을 보기는 커녕, 그 말씀대로 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러한 사람들이 말씀 공동체 안에 많아질수록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우리는 말씀 앞에 무릎 꿇기로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이 "오늘부터 어린이 되겠습니다" 의 고백이었습니다.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그 믿음 말씀대로 사는 어린이, 부모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반응하는 저 어린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인 말씀에 귀 기울리고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의 구절을 다시 읽으십시다. 오늘의 본문은 잠언 16장 10절입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고대언어가 이렇게 우리 말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제 이 문장의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이제 생각해봅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것에 어떠한 뜻이 담겨있을까? 같이 생각해봅시다.


  저는 한동안 이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마치 이 말씀이 내가 무슨 일을 계획하든지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꼐서 그 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이야기를 연구하고, 지난 월요일날 기도하다가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지금까지 들었던 삼손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삼손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자신만을 사랑했던, 자기만 잘 되길 바랬던 이기주의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블레셋 여자와 결혼했고, 자신을 위해서 블레셋을 죽였으며, 자신을 위해서 신전 기둥을 무너뜨렸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생을 만났고, 자신을 위해서 드릴라와 연애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사자를 죽였으며, 자신을 위해서 나실인의 규정을 모두 어겼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자신만을 위한 것들을 계획했습니다. 그 결과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꼐서는 그를 통해 블레셋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종국에 그는, 쓰임받고 버림받았습니다.


  다시 잠언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씀의 참 의미는 이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하던지 말던지,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는 것입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던지, 결혼하지 않던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 이뤄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곧 폐하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만이 분명히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 고대문서의 문자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니가 무슨 생각을 하던지,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으니, 니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바꾸십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은 일점 일획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니가 마음으로 계획했다 할찌라도, 모든 걸음의 끝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바꾸라. 이렇게 해석해야, 이 잠언 16장의 전체 그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1절을 봅시다.


잠언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그래서 1절에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입니다. 마음을 바꾸십시오. 하나님꼐서 마음의 경영을 당신에게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언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심령, 곧 '마음'을 보십니다. 당신이 별다른 잘못 안했다고 한다면 당신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니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니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경영하는 것은 곧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1절에 마음의 경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의 하는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바꾸라. 그리하면, 니가 마음으로 품고 있던 그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이고, 너는 그 이뤄짐에 참여할 것이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모든 사람은 쓰임받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선인도 악인도 쓰임받습니다. 악인조차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임 당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바꾸냐, 그렇지 않느냐가 당신이 선인인지, 악인인지, 쓰임받고 구원받을 사람인지, 쓰임받고 버림받을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잠언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마음이 교만한 자들이여, 착각하지 마십시오. 혹시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고 있다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삼손과 손 잡으셨듯, 피차 교만한 자들이 당장은 성공하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 자는 멸망당할 것입니다. 니가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은 자의 끝은 멸망입니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