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3:9~1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전이 무너진다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천년이 넘도록 삶의 중심으로 공들여 왔던 그 탑이 무너진다 했습니다. 어떤 이는 왜 우리가 이스라엘 종교를 믿어야 하느냐며, 구약성경을 읽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 대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주무르는 것은 토기장이 맘이듯,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한 사람이 이스라엘 되어, 그들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과 숨결을 담아낸데 있어서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한 민족을 대표로 선택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타락의 반전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뒤집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 민족만 살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을 대표로 전체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공들여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세계 대표구나. 세계 대표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구나. 그래야 세계가 우리를 통해 하나님 계심을 알게 되는구나' 이 생각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에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계를 섬기기는 커녕, 세계를 적 삼았습니다. 당시 세계는 로마가 패권을 쥐고 있던 시대인데, 그들은 이 로마로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하고자 했습니다. 방법은 다른 것 아닙니다. 강해지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더 단단하게 굳건히 하는 일입니다. 제국 로마에 맞서 더 강력하게 무력으로 응수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의 집이라는 성전을 이용했습니다. 이 일에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이용했습니다. 지도자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어떻게 하면 로마에 대항할 수 있을까 전략회의를 하고,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저들을 심판하자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런 장면은 사실 익숙한 장면입니다. 1600년대, 카톨릭으로부터 개신교가 갈라져 나올 때에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은 카톨릭과 개신교로 편을 나누어 무려 30년간 전쟁을 벌였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종교적 이유였지, 속으로는 돈과 권력 때문에 싸우는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때 양 쪽에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라 주장했습니다. 또한 2차 세계 대전 때 대다수의 독일 목사들은 무어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히틀러를 도우신다 했습니다. 몇 해전 부시는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무어라 했습니까? 탈레반 정권을 악의 축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선의 축입니까? 징기스칸은 몽골 제국을 점령하고 유럽으로 진출하면서, 이것은 신의 뜻이다 했습니다. 일본은 어떠합니까? 일본이 조선을 점령할 때, 무엇이라 핑계 했습니까? 천황의 뜻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다 '우리들만의 하나님'이라 소리 높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우리들만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하나님은 말 그대로 하나되게 하시는 분인데, 우리들만의 하나님은 세상을 내편과 니편으로 둘로 가르자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하나님일 수 있습니까? 가짜 하나님을 빌미로 다른 사람들을 짜먹자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이 단결할 수 있도록, 하나님 비슷한 것을 가져다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질 않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 다 타락의 징후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옳다면 실천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것은 인격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병든 인격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갑니다. 화려한 것, 이익이 될 만한 것, 당장 내 손에 주어지는 것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써먹은 것입니까? 성전을 써먹은 것입니다. 이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단결하게 해놓고, 결국 하자는 것은 니 편 내 편 나누어서 싸우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끝은 파멸입니다. 편 나누고 경쟁하고 싸우는 것의 끝은 모두 망하는 길 뿐입니다. 그러니 이 일에 공들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어떠합니까? 편 나누고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이 길 밖에 없다고 세뇌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지금 두 편으로 이미 나뉘어진, 허리가 두동강 난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정상인 상태가 아닙니다. 정치꾼들은 날이면 날마다 싸움을 붙입니다. 북한을 적으로 삼고 자기네 편을 모아 단결하자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강해지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방비로 하루에 900억씩 써재낍니다. 저는 민주당원도 아니고, 좌파도 아닙니다. 그저 성경을 보니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일 이스라엘도 했습니다. 나라 밖이 이럴진대, 나라 안은 오죽 하겠습니까? 성인들은 취업에, 아이들은 입시에, 경쟁은 우리의 일상이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목적은 살아남기입니다. 얼마전 유행처럼 휩쓸고간 '웰빙' 열풍은 잘 살아남기에 다른 이름 아닙니다. 웰빙에는 자기 부인도 없고, 이웃 사랑도 없습니다. 그저 나 하나, 우리 가족 잘 사는 것에 온 국민이 웰빙 웰빙 했습니다. 이 생존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가리켜서는 낙오자라 부릅니다. 그들은 웰빙이 정말 필요한 사람임에도 웰빙을 꿈꿀 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우리는 어찌할 수 없어 이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서는 몸도 마음도 뒤틀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만의 하나님. 그리고 공동체의 중심에 세운 눈에 보이는 우상. 망하고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지 않기에 스스로 자멸하는 것입니다. 지금 A.D. 1세기, 예루살렘 성전이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왜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까? 이러한 일에서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생존 경쟁으로 휩쓸려 가는데 그 자리에서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겠다고 결심하고 물을 첨벙첨벙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몫입니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스스로 조심할 일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그런데 생존이 절대적 가치가 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핍박을 당할 것입니다. 먼저는 사람들이 왜 우리와 같은 가치를 품지 않느냐며, 공회에 넘겨줄 것입니다. 이것은 둘로 쪼개진 세상 속에서 하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종교에서의 종(宗)은 '마루' 종자를 씁니다. '마루'라는 말는 순우리말로 크다는 뜻입니다. 즉, 종교는 큰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둘로 분열된 세계 속에서 하나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큰 가르침입니다. 편 가르기만을 일삼는 세상에서, 양 편을 화해시키고 하나되게 하는 일이 큰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큰 가르침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늘 둘로 나누는 것만 좋아하는 세상이,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양쪽을 포용하려는 사람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 생각하였고, 로마 역시 예수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 국가의 편도 아니었고, 로마 제국의 편도 아니었으니, 곧 사람의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죄목은, 우리편에 안붙은 죄입니다. 다른 것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죽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난은 어느 한 편만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짊어진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나, 죄는 뒤집어 씌워졌습니다. 따라서 왜 우리 편 안하냐며 손가락질 당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기독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기독인은 전체를 위해서 고난을 짊어집니다. 어느 한 쪽 부류의 이익과 승리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회에, 회당에, 관장들과 임금들에게 불려갑니다. 죄목이 무엇이겠습니까? "얘가 우리 편 안하려고 해요" 아니겠습니까? 이 이유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고, 매질을 당하고, 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편을 나누어 갈등을 조장하고 싸우는 자들에게 진실을 말할 절호의 찬스입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이 사람이 온 몸으로 증명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편을 나누어 싸우는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새로운 통치권'입니다. 세상을 둘로 나누어 싸우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진정한 세상의 왕, 편 나누지 않으시는 분, 전체를 위해서 고난받으신 그 분이 왕 중의 왕이요, 세상의 진정한 주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를 말하는 것이 복음이요, 하나만 되면 된다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그 하나의 분명한 중심은 눈에 보이는 화려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죽었다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예수 바로 그 분이심을 선언하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이 새로운 왕, 전체의 왕을 선언하고, 그 왕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곧 새로운 출애굽이며, 그 새로운 출애굽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은 둘의 세상을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둘의 세상에 균열을 냅니다. 바로 이 소식이 먼저 모든 나라에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성전이 무너질 것입니다.


  저번 주에 말씀드렸듯이, 지금 우리가 읽는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에 관한 경고입니다. 세계 종말에 관한 내용 아닙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점점 완악해지면 완악해질수록,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고초를 겪을 것이나, 이 일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 드러난다는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핵심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 무너질 때의 이야기라고만 해서, 오늘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 시절 살던 사람이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둘의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 대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편 나누고 경쟁하며 싸우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왜 우리편 안드냐고 재판에 회부할 때, 그 때 끌려온 자들이 말들은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말들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지금 생각나는 사람은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인 살인자는 바로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로마에 혁명을 준비한다며 온갖 죄악을 일삼는 동족 이스라엘의 편들지 않았던 이 집사는 사람들의 돌에 맞아서 죽임 당했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듣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행 7:59, 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돌을 들어 자신을 처 죽이려는 사람들에게도 스데반이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둘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내 편과 니 편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자신을 죽이려는 저 사람들 마저도 스데반에게 있어서는 죄를 용서하고픈 나와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철저한 하나의 추구. 원수를 사랑하라 말했던 자의 울림이 이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울려퍼지고 있음을 글자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와 비슷한 울림을 우리는 해골 언덕 아래에서 들었습니다.


눅 23:33,3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재판장에 끌려간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분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둘로 나누어 서로를 죽고 망하게 하는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나 하나를 위해 나중까지 견디는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중까지 견디는 길을 걷는 사람은 정말로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길이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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