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갈보리에서

-과연 이 사람이!

0. 


  기억나십니까? 우리는 두 번째 편지에서, 무언가 옳은 말을 할 때는, 그 옳은 말이 자기 자신의 자격이 아니므로 겸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도, 자기 자식에게는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알던지 모르던지, 옳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그 절대적으로 옳은 그 무언가에 기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옳은 것을 말할 때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8:12, 새번역)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코웃음치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오."

 

그러나 이 사람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증인이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 또한 나를 증거하신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증인!?' 사람은 무언가 알려면 권위를 필요로 합니다. 책에서 봤다던가, 이 분야의 권위자가 이렇게 말했다던가,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다던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마저도 자신을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진리의 근거가 되는 사람, 신이 증거해주는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이 말합니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그임을 알게 되고

또 내가 내 뜻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먼저 '내가 곧 그'임을 알게 될 것'! 이 때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가서야 비로소,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과연 이 사람이!'

 

0. 서론

1. 에덴에서

2. 갈데아 우르에서

3. 이집트에서

4. 바벨론에서

5. 과연, 이 사람이

6. 악으로부터

7. 새 하늘과 새 땅

 

 

1. '그'는 누구인가?-이스라엘 언약 이야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짧은 지면이지만, 간단하게 전체 역사를 제가 아는 수준에서 써내려가려고 합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곧 구약성서니까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 성서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여기까지 오면서 그 내용들을 조금씩 살펴보고 왔습니다.

 

-창조와 타락(에덴에서)

  이스라엘 역사는 창조에서 시작됩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를 창조하신 장엄함으로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주를 배신하고 그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습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은, 뿌리 뽑힌 나무처럼 점점 말라갔습니다. 인간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인간의 거처인 '세계'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생명이 꺼져가는 인간으로 가득한 세계는 곧, 시한부의 드라큘라들이 가득한 세계가 되었으니까요. 세계는,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서 서로의 피를 빨지만, 결국은 모두가 죽게 되는 비극의 무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없음'으로부터 '있음'으로 창조된 세계는 다시 서로의 '없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가득해진 것입니다. 창조에 역행하는 반창조(Anti-creation)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그리고 이 끔찍한 일의 주범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쫓겨났습니다.

 

-부르심과 언약(갈데아 우르에서)

  이 반창조의 움직임은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으나, 곧 지구 전체를 덮었습니다. 창조주를 배신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신으로 삼고, 그것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거짓된 이야기와 상징들을 만들어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허망한 것에 갇혀 지배당하는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조주께서 우상의 틈바구니에서 한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반전의 시작입니다. 끔찍해진 인간과 세계를 치유하기 위한 하나님 반전의 시작!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1) 너를 통해 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2) 그들이 이 세계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3)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기억해둡시다. 우리가 지금 하는 작업은, 마치 여러 장의 셀로판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겹쳐서 보는 작업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여러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확인하고, 그것을 겹쳐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겹쳐진 그림 안에서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가 누구인지 밝히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그림들 중 두 가지 중요한 그림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는 [부르심]입니다. 창조주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입니다. 둘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불러내신 그 사람과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통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확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그 음성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집트에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그 한 사람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이 됩니다. , 이스라엘 민족은 악을 해결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 언약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은 곧 위기에 빠집니다. 거짓된 이야기와 상징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국가, 이집트의 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3. 이집트에서>에서 이스라엘을 감금하고 있는 이집트의 상황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눈만 들면 도처에 널려있는 거짓신들, 그리고 그 거짓신들 위에 있는 파라오, 그 파라오의 지배 아래서 벌어지는 괴로운 나날들.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은 오히려 반창조의 억압에 눌려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괴로움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곤경을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그 분은 이스라엘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집트 지배의 구조들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지배의 정점에 있었던 파라오는 추락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마침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출애굽] 사건입니다. , 출애굽은 1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찾아오셔서, 2그들을 지배하는 세상 왕을 파멸시키시고, 3그들을 포로생활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인도하셨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출애굽] 사건은 [부르심][언약]에 이어 이스라엘 정신의 중요한 그림이 됩니다.

 

-시궁창 같은 현실(바벨론에서)

  그러나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지만, 아직 ''이라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으로 재천명 되었습니다(이 율법 안에 십계명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이제 본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뜻에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악에 대한 저항이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출애굽시키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잠시 다윗왕의 치하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만, 곧 자신들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는 거대한 반창조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거짓 이야기와 상징에 익숙해진 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보다, 지배와 부유함이라는 선악과를 따먹기 시작합니다. 악의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오히려 악의 문제를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나라가 둘로 찢기고, 그 중에 반쪽은 박살나고, 나머지 반쪽은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바알을 따라, 지배와 부유함을 갈망하던 그들은, 더 큰 지배와 더 큰 부유함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4. 바벨론에서> 이야기 하던 내용이 이 시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국의 포로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안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로 잡혀 가게 한 그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고, 바벨론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신과 의지를 무너뜨리려는 제국을 닮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한 가운데서 그들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악의 문제의 해결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 질 것을 언약을 받은 언약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요구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한 번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성을 부정하는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내십니다. 바벨론에 이어, 이스라엘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선포한 것입니다. 다시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은 감격에 겨웠습니다. 무너진 성벽과 성전을 다시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과 세계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포로상태였고, 여전히 악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제국은 흥망성쇠를 거듭하여,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마케도니아가 급부상하고, 이어 로마가 세계의 패권을 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포로상태였고, 여전히 악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포로 기간 중에, 제국들은 이스라엘 성전을 능욕하고, 하나님의 민족이라는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민족, 하나님과의 언약인 율법을 가지고 있는 민족, 출애굽을 경험한 민족이 계속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은,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하나님과 언약한 사람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세상왕을 파멸시키시고, 그들의 포로생활을 종결지으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룰 ''가 우리가 처음에 확인했던 ''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자신들을 인도해줄 진짜 왕입니다. 마치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고, 솔로몬과 같이 지혜가 넘치며, 다윗과 같이 이방민족들을 몰아내는 한 사람 말입니다. 그는 예언된 것과 같이, 바벨론 같은 제국의 세력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은 그 진짜 왕에 의해서 영원히 종결될 것입니다. 제국의 압박이 심해질수록 점점 더 ''에 대한 민족적 열기는 더해갔습니다. , 그들이 기다렸던 것은 ''에 의해서 이뤄지는 새로운 출애굽이었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을 부르셨듯,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그렇게 다시 부르시고 언약을 새롭게 하실 그 날이었습니다.

 


2. ''는 무엇을 말하고 행했는가? -'하나님 나라'

 


  그리고 ''가 나타났습니다. 아니, 자신이 ''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과 삶이 오늘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읽고 고민해보는 것이, 그가 정말 그인지 확인하는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간 먼 여정을 걸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편지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빠르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디테일한 역사를 다 언급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세상을 읽는 그들의 안경이었습니다. , 그들은, 우리에게 ''에 대해 기록한 그들은 [부르심], [언약], [출애굽], [바벨론]의 렌즈가 달린 안경을 쓰고 세상을 봅니다. ''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곧 그라 주장하는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안경을 쓰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과 행동의 진의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 뒤에 놓인 진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이 새로운 출애굽을 이끄는 진정한 왕의 길을 걸으며, 처음 했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4:17, 개정)

 

  이 말씀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죽을 날이 가까이 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를 뜻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유대인들을 위해 쓴 복음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신성시하여 부르기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가져와 사용하곤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이 말하는 '나라'는 완성된 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스림'입니다. '주권'입니다. , 유대인들에게 '천국'을 말한다면, 그들은 죽어서 가는 어느 곳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떠올립니다. , 마태복음 417절을 이렇게 고쳐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꿔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

 


1) 가까이 온 하나님의 다스림


  그렇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이스라엘이 기다렸던 진짜 왕이 처음 선언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써 살펴본 안경을 다시 쓰고, 이 말씀이 [부르심][언약][새로운 출애굽]의 맥락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안경을 쓰고 본, '하나님의 다스림'은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그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왕이 오셔서 다스릴 그 날 말입니다. , 세상 왕은 파멸되고,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은 종결되고, 마침내 하나님이 다스림 속에서 살게 될 그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발언은, [부르심]을 받은 [언약]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는 진정한 [출애굽]이 가까이 왔다는 말이었습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 다스림은 세상 왕이 파멸되고, 진짜 왕이 다스리는 다스림일 것이요, 포로생활이 종결되고, 자유 안에서 누리는 다스림일 것입니다. 마치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이 에덴으로 돌아가듯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출애굽하듯이, 제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에게 포로귀환이 선언되듯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언약들이 성취되는 때입니다. 이 그림들의 완성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마음을 바꿔야 한다(찌그러진 이스라엘의 안경)


  그런데 이상합니다. "회개하라?" 회개는 '마음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새로운 출애굽이 시작되는데, 이스라엘은 마음을 바꿀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마음을 바꾸라는 것일까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타락의 반전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며 부르심의 목적이 따라 산다면, 이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뜻을 져버린 아담의 역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 사실이 만방에 드러나고,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지배 아래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부심으로 점점 오염되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 멸망 때 포로로 잡혀갔던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에게 화냥년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하는 제국은 심판의 대상이지, 긍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안경의 렌즈들이 하나하나 왜곡되고 뒤틀리고 있었습니다.


  뒤틀린 렌즈는 부르심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은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사람을 평가하고 지배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지도자들의 율법 해석에 오염되어, 그 해석에 어긋나는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 수 없도록 짓눌리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제국의 거짓된 이야기와 상징과 다를바 없어진 것입니다. 그 안에서 병자들과, 세리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은 사람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들 위에 종교 지도자들이 군림하고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벨론] 또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왕이 오셔서 심판할 자신들의 대적은 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제국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 이은, 그 유명한 로마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 심판하시리라 예언된 [바벨론]이 로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로마와의 전쟁도 불사하려 했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하는 제국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레미야의 울림은 그들에게서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3. 교정된 안경


  그러나 마침내 오신 왕께서 보여주시는 [부르심][언약][출애굽][바벨론]의 그림은 이스라엘의 그것과 달랐습니다. 그 분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 이야기의 진의가 드러났습니다. 다음 말씀을 가지고, 하나하나 그 분의 교정된 렌즈의 의미들을 살펴봅시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4:18, 19 새번역)

 

1) 예수에게로 모두를 [부르심]


  '기름을 붓는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왕의 임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임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임명된 이 왕의 소식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왕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이용할 뿐, 가난한 자들을 진정으로 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이 왕은, 임명되었다는 그 소식만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만큼, ''는 사회의 소외계층들을 신원하시는 왕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을 앓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병이 걸릴 경우, 그 사람은 마을에서 쫓겨나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병이 걸린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그들은 참 유대인도 아닙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왕은 그러한 자들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순 치료가 아닙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의 회복입니다.


  어두운 권세에게 짓눌려 귀신 들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불에 던지고, 물에 던지고, 괴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삶 역시 파괴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 역시 그에게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 왕은 그러한 일을 하는 왕이었습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왕의 사역이었습니다. 이것은 귀신을 쫓는 일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죽음마저도 그의 해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을 저당 잡는 가장 끔찍한 사슬인 죽음이, 그 왕의 선언 앞에서 맥없이 풀려나갔습니다. 포로 되었던 사람들마저 해방을 얻을 것이라는 그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은혜의 해'라 말하는, '희년'이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5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모든 부채를 탕감해주는 이스라엘의 법이었습니다. 그가 희년을 선언합니다. 금전적 부채뿐만 아니라, 악에게 생명을 저당 잡힌 부채까지, 모든 부채가 그 안에서 무효화되었습니다. 이 왕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의 체제와는 다른 공평과 정의의 세계를 그 분에게서 만납니다. 악의 세력에게 포로 된 자들에게는 그 분 안에서 해방이 선언됩니다. 진리가 없어 눈먼 자들에게 그 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되고, 지배에 억눌렸던 자들은 그 분 안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은혜의 해, 인간이 감당하고 있는 모든 빚진 것들에 대한 탕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 분 안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사역은, 율법을 잘 지키고, 의인이라 여겨지는 정통 유대인들만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귀신들린 사람, 사마리아 사람, 게다가 이방인까지. 모든 사람이 이 왕에게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 부르심의 대상의 조건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들을 얽매고 있는 모든 억압을 풀어주었습니다. 곧 모든 사람에 대한 새로운 출애굽이었습니다.


  자신들만 부르심을 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자신들이 기다렸던 왕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부르심을 받은 언약의 자손이라는 강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왕은 아브라함의 혈연적 자손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그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제의 장소라고 믿던 성전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건물 성전은 무너질 것이며, 자신의 육체가 성전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사람들을 착취하던 사람들의 눈꼬리가 올라갔습니다.


  부르심의 기준은 유대인이냐 아니냐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를 뜻을 받아들여, 진정한 인간됨을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였습니다.

 

2) 예수 안에서 완성된 사랑의 [새언약]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위해서 온 진정한 왕은,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율법의 본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던 이스라엘에게, 예수께서는 율법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율법으로 사람들을 묶어놓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며, 하나님의 율법의 참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완성이 끝까지 사랑하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또한 자신이 정통이라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언약의 증표인 율법은 그들의 자부심이요, 옳고 그른 사람을,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해주는 표지였는데, 이 왕은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으로 세워놓은 지배의 구조를 깨뜨리고 있었습니다.

 

3) 파멸당해야 하는 [바벨론]은 로마가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출애굽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렌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속박하고 있는 세상왕의 정체는 로마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아 율법을 붙잡고 사는 이 민족은 로마의 전쟁마저도 불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출애굽은 제국으로부터의 출애굽이었기 때문입니다.(이것의 결과는 A.D. 70년의 유대전쟁입니다)


  그러나 진짜 왕은 로마의 심판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로마를 대적하다간 멸망당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이 역시 이스라엘이 열 받는 이유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는 로마를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적했던 것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반창조의 어두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선이 국가의 주권을 강탈한 그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을 때, 이 왕의 시선은 에덴에서 벌어진 악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유조선이 터져버린 바다에서, 왕은 기름을 걷어내는 것이 아닌 그 기름의 근원지인 유조선 자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악 자체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 왕이 했던 이야기는 하나도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기민족 중심의 사고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빙자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고, 로마 제국에 대한 유혈폭동에 열광했고, 율법에 의한 민중의 지배를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두의 화해를 위해서 보냈더니, 이스라엘은 오히려 싸움판에 끼어들어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이 왜곡된 안경을 쓰고, 눈먼 장님처럼 세상의 일을 분별하지 못할 때, 참된 왕의 말과 행동은, 세상을 보는 하나님의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그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왜곡된 이야기가 제자리를 찾아갔습니다. 혈연 유대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참 왕인 [예수에게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고, 나와 너를 대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언약의 진정한 의미]였습니다. 또한 로마가 바벨론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어둠의 권세가 진짜 바벨론]이었고, 예수는 그 [어둠의 권세로부터의 진정한 출애굽을 성취하는 진짜 왕]이었습니다.


  어둠의 권세를 몰아내고,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언약 백성의 부르심은 혈연 이스라엘에게서 끊임없이 실패를 거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 ''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참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전을 온전히 성취하는, 진정한 출애굽을 이루는, 타락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이 악으로 물든 세계가 감출 수 없는 세상의 빛이 찬란하게 진리의 광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왕은 모두를 부르시고, 사랑의 언약을 완성하시며, 사람이 아니라 악을 대적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진리요, 정의의 실천이었습니다. 그 분 안에서, 구약성서의 의미들이 제자리를 찾았고, 제국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가 이루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4. 진리를 감당할 수 없는 세상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오신 그 왕은, 참된 왕이셨습니다. 이전의 세상의 왕과는 다르게, 그 분은 섬기는 왕이요, 우리의 아픔을 아는 왕이요, 공평과 정의의 왕이요, 모든 사람은, 그 분의 다스림 안에서 창조의 뜻에 따라, 참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분 안에서 말입니다!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라는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실제적으로 구현되고 있었습니다. 이 왕의 다스림 안에서 악의 세력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부르심], [언약], [출애굽], [바벨론]으로 설명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에 의해서 재해석되면서, 구약성서의 말씀들이 현실이 되고 있었습니다! 역사가 기다렸던 한 사람이 나타나, 정말 자신이 '' 인 것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임을 드러내는 역사의 빛줄기가 밝아질수록, 그 빛을 삼키려는 어둠 역시 자신의 몸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1) 왕을 집어삼키려는 악의 움직임

 

  (1) 내면적인 악

  사람들은 왕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는 내면의 악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선으로부터 끊어진 타락의 후손들은 진리 자체인 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증거를 보이라고 독촉은 하나, 이 사람을 믿을 생각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병든자를 고쳐주고, 죽은 자를 일으켜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왕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라는 것입니다. , ''는 백성이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과 삶에서 세상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정말 ''라면, 인간은 이 사람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다른 이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왕의 백성이 아닙니다. 왕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들 앞에 예수는, 장님 앞의 섬광이니까요. 눈 앞에 오신 하나님을, 자신들을 위한 출애굽 사건을 볼 수 없습니다.

 

  (2) 우상을 따르는 집단의 발생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믿느냐? 예수를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믿고 있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 율법을 추구하는 사람들, 로마의 그늘 아래서 현실의 안녕 바라는 사람들, 반대로 로마를 뒤집어엎을 강력한 폭력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러나 마침내 역사에 나타난 이 왕을 추구하지 않는 이상, 어떤 것을 추구하던지 간에 그것들은 우상이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뒤로한 채, 그 어떤 것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진리가 아닌 다른 것들을 함께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힘을 만듭니다. 그 힘은 진리와 상관없기에 악합니다. 내면의 악들이 모여, 거대한 죽음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졌고, 그것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악의 세력 또한 그 날카로움을 더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수는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는 돌팔매를 당하시고, 절벽 끝으로 몰리셨으며,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하셔야 했습니다. 그들은 왕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들이 추구하는 무언가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 했습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예수에게서 쫓겨난 악의 세력들은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돼지들이 몰살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거라사 땅 근방의 모든 백성'들은 두려워하며(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예수에게 그 마을을 떠나달라고 말했습니다.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하느라, 그들은 그들의 왕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것을 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하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에 민감한 그 제자는 예수께 경배하는 여자의 모습조차도 돈으로 환산했고, 끝내는 로마 황제가 새겨진 은전 30개에, 왕으로 오신 그 분을 팔아 넘겼습니다.

 

(3) 국가적 차원의 악

  어두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악은 점점 자라나 진리를 거칠게 위협합니다. 이제 악은 국가를 집어삼키고,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국가적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국가를 자처하는 이스라엘을 통해 말입니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맡은 자들이, 이 율법을 빌미로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는 율법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면서 사람들을 율법에 옭아매고, 자신들도 자신들의 생각에 갇혀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율법에 의한 지배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 따라 살도록 주신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지배를 위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마치 파라오의 신화처럼 누군가의 지배를 위해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율법이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으로는 율법으로 정죄된 사람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해 신음을 토했습니다.


 국가 밖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다른 나라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이스라엘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민족이고, 나머지 이방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왜곡된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의 상징들 또한 그릇 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민족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그들의 자랑이 되었고,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민족이, 악의 문제의 장본인들이 되었습니다. 악의 문제의 해결을 위해 주어진 율법이, 이스라엘 손에서 죽음을 낳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지은 성전은 매매의 행위로 얼룩졌습니다. 다른 민족의 본이 되어야 할 민족이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며, 제국의 사람들이 심판받을 그 날을 열망했습니다.


  비록 율법이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절대선의 뜻에서 벗어난 그들은 글자들을 섬기고, 애국심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이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이 인간의 손 안에서 썩은 냄새를 내게 된 것입니다. 우상을 닮는 결과는? 비인간화입니다. 사람을 율법으로 차별하고 지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몸 군데군데가 썩어가는 한센병 환자와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이스라엘은 암초에 부딪친 타이타닉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의 경고 방송을 무시한 채, 계속 헛된 민족적 자부심에 빠져 살면, 그 끝은 멸망과 파멸의 암초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고 말하나, 이스라엘은 자신을 치유할 수도, 전쟁에서 이길 수도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치유하고, 승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 파멸의 길을 재촉합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거대한 국가적 악이 되어버렸고, 그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거짓된 가치들을 깨부수는 내부고발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치들을 생산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국가 공동체를 이용하여, 악한 일의 절정으로 이스라엘을 끌어갑니다. 죄가 없는 예수를 죽음의 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가라앉는 이스라엘에게 방주처럼 찾아왔으나, 사람들은 이 방주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죽을 몸을 부여잡고 점점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오히려 방주를 박살내려고 합니다.

 

4) 초국가적 형태의 악

  그러나 한 사람을 죽이려는 거대한 움직임은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안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악은, 그 몸집을 불려 제국의 형태로 예수를 공격합니다. 로마입니다. 로마는 엄청난 크기의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점령지에게 관대한 종교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하나의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조건 하에, 다른 민족들의 믿음을 인정해주었습니다. 로마가 점령하는 곳마다 황제의 신상이 세워졌고,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으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이미지들은 황제의 지배를 선전하는 광고들이었고, 로마 신화는 그를 신으로 추앙하는 드라마였습니다. 주변에 널린 광고와 드라마 속에서, 로마 황제는 세상의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로마는 그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입니다. 반란자들에 대한 철저한 처단위에, 로마는 평화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나무의 열매가 아무런 죄도 없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평화의 나무가 아닙니다. 평화를 가장한 죽음의 나무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영토에, 로마 황제도 아니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 사람을 무수한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제국에 나타난 진짜 왕의 존재는 제국이 지배가 정당성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람의 존재 자체가 로마의 지배에 대한 균열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대표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던 도중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가 어떠한 폭력적인 전쟁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대표인 빌라도는 이 사람을 살려주지 않습니다. 로마 대표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지 않았을 경우 벌어질, 이스라엘의 폭동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날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폭동은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제국의 평화는 한 사람의 죄 없는 생명을 죽음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논리에 따라, 이 사람은 죄가 없지만 죽어야 합니다. 제국의 존립과 안정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악과 로마의 제국적인 악이 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맞물렸고, 악의 톱니바퀴는 진리를 소멸하기 위해 거친 회전을 시작했습니다.

 

2) 그 악의 정체

  그러나 진짜 적은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내면적 악에 물들러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조차도 아니었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그들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섬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하늘의 군대를 불러 모두 멸절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악의 차원들 뒤에는 진정한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에덴에서 만났던 뱀, 그리고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사탄이라는 존재입니다. 우연과 우연이 맞물리고, 국가와 제국이 결탁하고, 그 안의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악은 점점 몸집을 불려,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어두움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생명소멸의 움직임, 반창조의 움직임이 예수를 덮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내면의 악을 가진 사람들, 진리가 아닌 우상을 추구하는 사회의 구성원들, 악한 일에 국가의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제국의 평화를 믿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 강력한 '반창조'의 힘이 단 한 사람에 대한 총공습을 감행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자를 악한 세상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위해서 오신 죄 없는 왕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왕 역시, 인간이 아닌 그 악 자체에 대한 최후의 반격을 치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진하여, 왕은 높이 들리셨습니다.

 



5.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입니다(답답하게도 교회가 십자가를 숭배한다고 말하는 이단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상징은 이야기 안에서 해석됩니다. 십자가를 보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십자가는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십자가는 어떠한 의미입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이것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기독. 십자가의 예수를 바르게 읽어내는 이야기.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은 연결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만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까?

 

  이렇게 요약하겠습니다. 십자가는 진리에 대한 악의 총공습입니다. 동시에 악에 대한 절대선의 심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악의 총공습에 대해서는 앞서 상술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십자가를 통해서 절대선이 악을 어떻게 심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십자가는 악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낸다.

 

  십자가의 예수는 골고다 언덕에서 모든 생명을 줄 것처럼 가장하지만 정작 생명을 줄 수 없는 것들의 정체를 드러냈습니다십자가는 내면의 악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느라 진리를 말하는 왕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 앞의 이익과 자극을 따라가는 것이 생명을 가져다 줄 것 같지만, 정작 생명의 소멸을 가져왔습니다. 명예든, 돈이든, 권력이든, 성이든, 그것을 추구해야 행복할 것 같지만, 그것들은 순간의 기쁨을 가져다줄지언정, 공허함만을 더할 뿐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거기에 없습니다.

 

  또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우상들을 추구하는 것 역시 인간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내면의 악을 '함께' 추구하는 것을 사람들의 공통적인 대상을 우상이라 부르고, 그것은 거짓된 이야기와 상징을 파생시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추구한다고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두가 죽이길 원했다고, 예수를 죽이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었듯 말입니다. 이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많은 가치와 이야기들이, 당장은 옳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왕의 뜻과 상관이 없다면, 그것들의 정체는 죽음입니다. 허무입니다. 사회적 악이 진리를 죽이는 모습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확인합니다.

국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인간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생명을 주어야 할 율법이 무고한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고발했습니다.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주어야 할 율법이, 율법을 완성한 예수를 죽였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은 나무에 매달아 장사를 지낸다는 율법의 저주가 예수에게 응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켰던 나라, 이스라엘의 허위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생명이 아니라 껍데기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이 십자가로 밝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추구하는 것도, 율법을 추구하는 것도,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던 국가 이스라엘이, 진리를 죽이는 모습을 십자가에서 확인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국을 추구하는 것도 인간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제국은 우리에게 평화와 안녕을 줄 것처럼 선전하지만, 제국이 가져다주는 것은 진리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제국의 반란으로 여겨진다는 십자가의 아이러니고, 진실을 묵살시키면서 평화를 말하는 것이 제국의 아이러니입니다. 제국의 평화를 위해 한 사람의 죄 없는 생명이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렸습니다. 그러나 죄없는 사람을 죽여서 얻는 평화를 평화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제국을 추구하는 것은, 강력한 지배아래 종속되는 것이지, 그것은 참 자유도 평화도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던지 간에 그것은 그저 우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지배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예수는 로마의 허위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이 선전하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날 로마제국은 어디로 갔습니까?

 

  자신의 내면적 가치,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사회적 가치, 무비판적으로 추구하는 국가적 가치, 그리고 작은 것들을 희생하는 전체를 위한 가치. 이러한 가치들은 우리가 흔히 믿고 따라가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보여줍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일은 모두 죽는 것이며 허망함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최선을 다할 수 있지만, 그 최선이 진리를 소멸하는 일이 될수도 있는 개연성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생명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닌 다른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가져오는 것의 결국은 진리를 죽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소망을 줄 것이라 말하던 그 어떤 것들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참 소망을 주는지 십자가의 빛 아래서 다시 고민해보자는 것입니다. 오히려 눈 앞의 만족과 이익들이 모여 결국 생명을 소멸하는 거대한 힘이 된 것은 아닌지 십자가의 빛 아래서 반문해보자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동안들의 편지들은, 모두 이러한 악의 현상들이 우리와 상관있음을 보여주려던 시도였습니다. 물론 본이 아니게 오해도 많이 받고, 의심도 많이 샀지만 말입니다.

 

2) 십자가는 악을 처리하는 신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예수는, 생명을 줄 수 없는 허망한 가치들을 폭로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악을 처리하는 신의 방법을 보여줍니다. 예수 이전에도 십자가 형을 받은 유대 랍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기 전에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홍콩 느와르와 중국 무협 영화가 보여주는 일반적인 모습 아닙니까? 받은대로 되돌려주고, 당한 만큼 갚아주는 복수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수가 멋있게 포장되어도,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일 뿐입니다. 이것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또다른 악을 낳을 뿐입니다.

 

  예수는 달랐습니다. 악은 진리이신 그 분을 향해 총공습을 펼쳤으나, 예수는 그 악을 모두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조금의 악도 되갚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 없이 죽임을 당하셨으나, 예수는 복수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로마를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악을 감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셨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진 모든 부당함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 안에서 악은 소멸되어 힘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충격적인 반전입니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들이 뒤집어지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방법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은 선이고, 로마는 파멸되어야 할 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로마가 아니라, 타락이후 인류를 지배한 반창조가 악이며, 로마를 포함한 이방 사람들 역시 파멸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했던 율법 역시, 죄 없는 한 사람을 나무 위에 올려놓으므로, 선이 아니었음이 십자가에서 폭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사람과 사람을 나눠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지나가지 않고, 모든 인간을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아니라, 선과 악이 당신의 내면을 관통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내면에서부터 속해있는 사회와 국가와 제국에 이르기까지 악에 참여하고 있고, 그러한 인간을 구하는 일은,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는 행동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악은 모든 인간을 볼모로 잡고 있으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악의 포로였습니다. 예수는 이것을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타락 이후 하나님의 세계에 기생하고 있는 거대한 반창조의 권세들을 말입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저당잡고 있는 그 악의 권세의 사형식이었습니다. 악은 모든 힘을 예수에게 쏟아 부었으나, 예수는 악을 선으로 갚는 능력이 그 모든 것들을 소멸시켰습니다. 악은 선 안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십자가. 이것이 악을 처리하는 절대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더불어 세상을 갱신하기를 원하는 당신이 살아가야 할 방법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거미줄치고 있고, 세상의 구석구석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악. 그 악의 참여에서 떠나, 악을 소멸하며 사는 길이, 그 빛나는 길이, 한 사람의 처절한 죽음으로부터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금까지 선의 가면을 쓰고 자행되었던 지금까지의 방법들을 뒤집었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더 큰 폭력을 추구했던 사람들, 정당함을 이유로 타인의 파멸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폭력을 낳고 거짓은 거짓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했던 것도, 이런 식으로, 내면의 악이 점점 몸집을 불려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인간 내면에서 발생한 악은 사람의 관계를 타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빠르게 물들여갑니다. 악은 선에 기생해야 하기 때문에, 악한 일은 인간에게 기생하지 않고는 그 범위를 확장시킬 수 없습니다. 악은 인간을 통해 또다른 악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속에서 이러한 경험들을 자주 합니다. 거짓은 거짓을 불러옵니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옵니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오고, 살인은 살인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악을 처리하는 신의 방법 안에서 이 악순환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예수를 공격했던 폭력과 거짓은, 그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고, 예수 안에서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악을 깨닫게 하면서도, 악을 처리하는 정말 말 그대로 신의 한수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주인이 종을 경멸할 때, 손등으로 뺨을 때립니다. 그러나 부정하다고 여겨진 왼손은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등으로 때립니다. 그럼 오른뺨을 맞겠죠. 그런데 그렇게 경멸을 받은 종이 왼뺨을 돌려대는 순간 사태는 미지의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주인은 손을 트위스트 하지 않는 이상 종을 때릴 수가 없게 됩니다. 순간 주인은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왜 왼뺨을 돌려 대는거지? 이 사람은 왜 더 맞으려고 하며, 나는 이 사람을 왜 때리는 거지?"


  "5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10리를 더 가주라"는 말씀도 동일한 맥락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로마 군인이 요청할 경우, 로마 군인의 짐을 지고 5리를 동행해야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짐을 지고 5리를 동행해주고도 5리를 더 가고자한다면, 로마군인은 돌려댄 왼뺨을 보는 주인과 같은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자진해서 더 고생을 자처하는거지? 그럼 나는 이 사람을 왜 부리고 있는거지?" 로마 군인들은, 반란군의 수장을 처형할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자신들이 옮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골고다의 예수에게조차 그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반란군의 수장이 아니었음에도-말없이 그들의 몫인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걸으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지 않고도 평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길입니다. 아무도 배제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두를 용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입니다. 십자가는 화평케하는 하나님이 지혜입니다. 타인을 위해 부당함을 끌어안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마저도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당해주면서도 진리를 깨닫게 하나님의 깊은 지혜입니다. 그 신비로운 사건 속에서,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모든 악을 감당하셨을 때, 악의 총공습의 현장이었던 끔찍한 사형틀이, 그 분 안에서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대로 인자가 십자가에서 높이 들렸을 때, 그 분이 타락을 뒤집어 악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진짜 왕이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이 글의 서두에서 읽었던, 그 분의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그임을 알게 되고

또 내가 내 뜻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구약 성서가 말하는 ''가 예수입니다. 사람들을 모든 악에서부터 구원하시는 왕이 그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다스림은, 예수께서 부르신 모든 사람에 대한, 그 안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언약의 완성이요, 십자가라는 새로운 출애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파멸한 왕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악의 정체에 대한 폭로이자, 그 악에 대한 절대선의 심판의 현장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왕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침내, 악의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넘어서, 창조와 타락이라는 모든 인류를 담는 큰 그림 안에서 바르게 이해됩니다. , 왕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그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지역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저지른 악에 대한 완전한 반전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아담으로 시작된 송장냄새 진동하는 악의 결과들 속에서 피어난 회복의 꽃입니다. 절대선에 순종하지 않은 아담과 완전한 대비입니다. 그는 아담의 자손이지만, 그럼에도 아담을 뛰어넘으십니다. 시간 안에 계셨지만, 시간을 넘어 계십니다. 그 안에서, 해결될 줄 몰랐던 악의 문제가 해결되는 새로운 길을 인류는 보게 되었습니다. 곧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복음입니다.


  악의 문제에 예외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의 헛된 것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구조적 문제 속에서 진리에 침묵하고 있고,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누군가를 지배하며, 이 악의 문제의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우리는 죽음이라는 악의 최후 무기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예수 안에서 뒤집힙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예수 안에서 세상의 허위를 밝혀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변혁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그의 안에 있습니다. 모든 지배의 구조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 길이 그 안에서 우리에게 열려있습니다. 사망조차도 막을 수 없는 예수의 길이, 모든 아담들에게 열린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들에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왕의 이야기를 끝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 왕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도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만약 그가 2000년 전에 죽은 것으로, '위대한 이야기'가 종결되었다면, 저는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를, 이야기 앞에 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복음 이야기에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아니, 조금도 주저할 수 없게 하는,

마지막 퍼즐을 우리는 남겨두고 있습니다. ''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에 우리는, '부활'사건'그것의 의미'를 살펴볼 것입니다.

 

 

 

2012. 7. 11

악을 선으로 갚는 힘이

그 분으로부터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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