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집트에서

-우상에 사로잡힌 국가

0.

  

   안녕하세요여러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원 사는 서른살 먹은, 동네 백수에게 편지를 계속 받고 있습니다.(이것으로 네 번째 편지입니다) 만약 할 일이 없는 사람을 백수라고 부른다면, 사실 저를 백수라 부르면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할 일이 태산 같거든요. 이 편지는 그 태산 같은 일들의 목록 중에서도 상위에 있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여러분들에게 제가 믿고 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가 저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놨듯이, 여러분에게도 삶의 진실을 바라보게 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독교에 속해있는 사람도 잘 모르고요, 기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모르는,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무어라 말할지 한참을 생각해야 하는 그 질문 말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 길을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히 돌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는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니까요.(저는 길치라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조차도 많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만) 그렇게 돌아간 길목에서 우리는 질문을 위한 질문을 만났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답하기 위해, 필요했던 또 다른 질문은, 바로 악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떨까요? ‘악의 문제에 대답하는 것기독교라는 집으로 안내하는 빵조각과도 같습니다. 이 빵조각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답하는 바른 길입니다. 다만, 길 중간 중간에 놓인 빵조각들을 망각과 무관심의 까마귀들이 주워 먹게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빵꾸똥꾸!?

 

  우리는 첫 번째 빵조각을 에덴에서 주웠습니다.

에덴 이야기에서, 우리는 절대선이 창조한 선한 세계와 선한 인간에게, 악이 발생한 사건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 이야기 기억 나시죠? 그 이야기 안에서, 뱀을 통해 표현된 악은, 선에 기생하면서도 선을 이기려고 하는(허나 결코 이길 수 없는), 그리고 절대선에 의해서 규정된 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악이 에덴에서 아담의 내면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인류 역시, 악에 점령된 내면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도 뱀을 닮게 된 것입니다. 절대선을 이기려하고(부정하려하고), 자신이 선과 악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절대선을 거부함으로, 절대선이 창조한 세계에 인간 역시 기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요? 절대선으로부터 단절되어, 인격도 삶도 점점 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죽음의 시작이었습니다.

 

  두 번째 빵조각은 갈데아 우르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절대선을 등진 인간이 끌리는 것은, 1) 눈에 보이는 것, 2) 몸이 원하는 것, 3)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상이 만들어졌죠. 그리고 이 우상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고대 사회에 짙게 드리워집니다. 우리는 바알, 아세라, 몰록 같은 우상들을 살펴봤습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신기한 옛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되지 못하게 하는 악의 결과들이었습니다.(아이를 태워서 행하는 제사를 그저 옛날에 있었던 특이한 문화라고 아무 감정없이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벌어진 비극이고, 우리도 인간인 이상, 우리 역시 이 비극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도 지구에는 2천만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사람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수원역에만 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비극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절대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따르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정될 때, 그 다른 무언가는 곧 우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은 사회 전체를 오염시킵니다.  우상은 사회적인 악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사회 안에서 자신이 따르는 그 우상을 닮아갑니다. 그 닮음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결과만을 낳습니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악의 역사가 인류에게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간의 빵조각들

 

  첫 번째 빵조각과 두 번째 빵조각 사이에는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발견하셨습니까? 그것은,

악의 확장입니다. 악은 더욱 대단해졌습니다. 신의 세계에 기생한 악은 인간의 사회가 커감에 따라, 그 세계를 먹고 자신의 몸을 불렸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11장까지를 읽어보면, 아담에게서 시작된 악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밀고, 인류 최초의 장남은 자기 동생을 돌로 쳐 죽입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악한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깁니다.  에덴에서 인간 내면을 물들인 악이, 점점 사람과 사람을 타고 사회 전체를 물들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충격적인 속도로 말입니다.


  갈데아 지방의 우르라는 동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악이 개인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서 활개칩니다. 악에 물든 내면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추구합니다. 우상을 닮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네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어느 가족이 살고 있었죠.


  사회를 향해 넘실대는 악의 파도는, 갈데아 우르에 살고 있던 '어느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악의 문제에 예외가 아닌 그 가족에서, 예외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 예외는 그 우상의 늪에서 신이 이끌어낸 한 사람,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담 이후 파멸을 향해 거칠게 흐르는 악의 강물 속에서, 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으로 그는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 번째 빵조각을 주우러 갈 차례입니다.


0. 서론

1. 에덴에서

2. 갈데아 우르에서

3. 이집트에서

4. 바벨론에서

5. 이 사람을 보라!

6. 악으로부터

7. 새 하늘과 새 땅

 



1. 인터뷰



  세 번째 빵조각을 주우러 발걸음을 재촉하다보니, 우리는 피라미드까지 당도했습니다. 악이 무언인지를 밝히는 세 번째 빵조각은 바로 여기, 이집트에 있습니다.


 

 

마침 저기 누가 지나가네요. 잠시 인터뷰를 시도해보겠습니다.


"저기 안녕하세요? 인터뷰 좀 하겠습니다. 옷차림이 독특하신데, 지금 코스프레 중이신가요?"

 

"코스프레? 그게 뭐요? 먹는거요? 벽돌 나르느라 바쁘니까, 말 시키지 마시오."

 

"벽돌이라니요? 왜 이 무더운 여름 벽돌을 나르세요? 운동 중이세요?"

 

"이봐요! 누구 놀리시오? 나는 파라오를 위한 건물들을 짓는 히브리 노예란 말이오!"

 

"당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히브리 사람이시라고요? 그런데 노예요? 지금이 몇 년도죠? 2012년 아닙니까? 21세기가 아닙니까?"

 

"2012년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지금은 람세스 2세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파라오를 위해 '라암셋'을 건축해야 합니다. 바쁘니까 제발 저리 좀 가요!"

 

'! 람세스 2? 기원전 약 1500년전입니다. 우리는 지금 3500년전으로 거슬러 온 것입니다. 이럴수가!(손발을 잘 펴주시길)

우상이라는 사회적 악으로부터 건짐받은 한 사람, 아브라함. 그런데 그의 자손들은 웬일인지 이집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노예로 말이죠. 왜 이들은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좀 더 인터뷰를 진행해봐야겠습니다.'

 

"저기 하나만 더 여쭤볼께요. 왜 노예 생활을 하시는거죠?"

 

"아니, 그걸 몰라서 물어요? 파라오는 태양신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그 분 덕분에 우리가 살 수 있으니 당연히 그 분을 경배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오!"

 

"? 파라오는 그냥 사람 아닙니까? 화장실도 갈텐데..."

 

"그런 말이랑 하지도 마시오. 얼마 전 파라오의 딸이 키우던 왕자조차도 파라오의 명령을 수행하는 신하를 죽였다가, 겁을 먹고 도망한 일을 모르시오? 누구든 파라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곧 죽음이오. 파라오의 권위는 절대적이요."

 

"파라오가 도대체 뭘 해주길래 그래요?"

 

"이런 무식한 양반. 나일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잖소. 이게 다 파라오 때문이오. 나일강의 신인 '크놈''하피스'가 파라오를 섬기기 때문에, 적절한 때에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거요. 파라오가 아니면, 우리는 풍년을 맞을 수 없단 말이오. 개구리가 영물인건 알고 있소? 그 영원히 사는 개구리도 파라오에게 복종하오.

 

이집트인들이 영원히 산다고 믿었던 개구리

 

흙의 신 '', 파리의 신 '우아차트', 황소의 신 '아피스', 의술의 신 '임호텝', 하늘의 여신 '누트', 다 파라오를 섬기고 있소.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파라오를 섬기고 있단 말이오. 그러니 우리도 파라오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소? 왜냐하면 그는 생명의 창조자 오리시스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오. 그가 사랑의 여신 아이시스를 통해 얻은 아들은, 곧 호루스의 역할을 하게 될거요에잇. 시간만 버렸구만. 따라오지 마시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남겨둔 채, 그 아브라함의 자손인 히브리 노예는 벽돌을 들고 황급히 사라졌습니다.

 



2. 이집트의 이상한 이야기



  에덴에서 인간 내면에 시작된 악이, 우상이라는 사회적 악이 되었음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회를 물들인 것으로 악의 전진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이제 악은 국가 전체를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악이 국가를 점령하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신들의 신인 태양신 라(Ra)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오리시스가 있었죠. 그런데 오리시스가 자신의 동생 세트와의 전투를 벌이다, 세트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아내 이시스가 기적의 힘으로(이시스는 마법의 신으로도 여겨집니다) 죽었던 오리시스를 부활시키고, 오리시스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됩니다. 이시스는 아들 호루스를 낳고, 호루스는 이집트의 왕이 되고요. 따라서 이집트는 태양신의 후손이 됩니다. 이 오리시스, 이시스, 호루스 이야기는 이집트 왕조의 기틀이 됩니다. 그리고 신의 계보에 있는 이들에게 영원한 삶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그래서 미라로 육체를 보존합니다)

 

  저 그림 위에서 새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호루스입니다. 호루스의 머리 위로 태양신 라를 상징하는 태양과 뱀이 보입니다. 그 뒤에 창백한 것이 부활해서 죽음의 신이 된 오리시스구요. 맨 왼쪽에 있는 여자가 사랑의 신 이시스입니다.


  흥미롭죠. 허나, 저 역시 이것이 그저 흥미로운 전래동화면 좋겠는데요.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저번 주에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바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이야기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정체는 그저 돌과 나무로 만든 조각품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미술품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우상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집트를 집어삼킨 호루스 신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 안에서 그림들이 그려지고, 신상들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그러한 신상들만을 가리켜 '우상'이라 부르지만, 사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신상 자체가 아닙니다. 그 신상이(혹은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악이 이집트를 집어삼킨 방법. 그것은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이집트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자연만물들이 다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그 신들은 각각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그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들은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경의 기능입니다. 이야기가 세상을 보는 안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어떤 히브리 노예와 짧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히브리 노예의 입장이 되어, 다음 질문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 히브리 노예가 저 위의 고대 이집트 이야기들을 '믿고'있다고 가정하고서,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 상상해봅시다.

 

그는 개구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땅에 있는 흙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귀찮게 날아오는 파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유유히 나일강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땀을 훔치며 올려다 본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히브리 노예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저 고대 이집트 이야기 안에 들어있습니다. 개구리도 신이고, 흙도 신입니다. 파리도 신이고, 나일강도 신입니다. 그리고 하늘도 신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연신들이 모두 호루스의 현신인 파라오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죠? 이집트는 풍요롭거든요. 모든 자연신들이(자연 조건들이) 파라오가 다스리는 나라의 풍요를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마지막에 했던 말을 기억하시죠?

 

  "이런 무식한 양반. 나일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잖소. 이게 다 파라오 때문이오. 나일강의 신인 '크놈''하피스'가 파라오를 섬기기 때문에, 적절한 때에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거요. 파라오가 아니면, 우리는 풍년을 맞을 수 없단 말이오. 개구리가 영물인건 알고 있소? 그 영원히 사는 개구리도 파라오에게 복종하오."

 

  이집트는 실제로 풍요롭습니다. 왜냐하면 나일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기 때문에, 그 주변 농토가 비옥하거든요. 농사가 잘 되거든요. 이집트에 살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이집트가 잘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 이집트가 이렇게 풍요로운 것을 보니까, 이집트에서 말하는 이야기들이 정말 사실인가봐!'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으니, 정말 주변 사물들이 그렇게 보입니다. 개구리도 흙도 하늘도 나일강도 다 신들인데, 이 자연신들이 파라오가 다스리는 나라의 풍요를 위해 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를 믿어버리면 세상이 그 이야기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 노예가 무슨 생각을 했던 간에, 그들은 그 이야기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파라오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는 개구리는 파라오의 영생을 상징하는 개구리거든요.

그들이 보는 흙과 파리는 파라오에게 복종하는 흙의 신이고 파리의 신이거든요.

그들이 보는 나일강은 파라오의 왕국을 번영하게 만드는 나일강이거든요.

그들이 보는 하늘은 태양의 처소 하늘이거든요.


  결국, 아무리 고민해봤자, 그 생각의 끝은 파라오의 통치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는 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미지들이 파라오를 섬기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도 파라오의 지배를 인정합니다. 파라오의 권세에 도전할 생각이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파라오가 끔찍한 수준의 강제노역을 시켜도, 갓 태어난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도륙해도 말입니다히브리 노예들은 이집트의 군사들에게 갇혀 있기 이전에, 그들의 이야기에 갇혀있습니다.


3. 인간을 망치는 이야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야기를 믿던지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망쳐놓는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어떤 이야기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한다면 그 이야기 믿는 것을 재고해봐야 합니다. 아니,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이야기를 벗겨 내야 합니다.

 

  고대 이집트 이야기를 누군가가 '믿고' 있다면, 그에게 있어 파라오는 그냥 인간 왕이 아닙니다. 태양신 라의 직계 후손입니다. 이 왕들은 오리시스, 이시스 이야기를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습니다.  이 이집트 고대 이야기의 기능은, 인간 파라오를 신으로 숭배하게 만드는 장치들입니다. 인간 파라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화적인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이나 신상들은 왕권을 신적으로 강화시킵니다. 그 이야기 안에서, 파라오는 신이 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지금은 폐허가 된 라암셋 유적의 전경

 

  히브리 노예들이 건설한 라암셋('람세스의 집'이라는 뜻입니다)이라고 추정되는 유적의 모습입니다. 람세스 2세 석상이 보입니다. 이 유적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요? 채찍을 맞으며 시뻘건 손으로 벽돌을 굽는 사람들. 무릎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기 덩치만한 돌을 나르던 사람들. 허나, 그렇게 열심을 낸 노동의 결과는, 인간 왕을 위한 도시와 무덤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히브리 백성들과 이집트인들이 파라오의 지배 앞에, 인간됨을 잃었습니다.


  거짓된 이야기, 그 이야기를 통한 인간의 지배, 결과는 인간의 노예화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 왕의 도시와 무덤을 만들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요? , 3500년 전 어느 날, 이집트에서 벽돌 굽는 일을 맡은 히브리 노예 청년이 다음과 같이 결심했다고 칩시다. "난 인생을 이제부터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겠어!" 그리고는 다음 날부터 벽돌을 500개씩 구워냅니다. 평소에는 300개씩 굽던 친구가 이를 악물고 500개씩 구워냅니다. 최선을 다해서 말입니다. 이런다고 그 히브리 청년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이 청년이 이 지배의 상태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거짓된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 청년은 무엇을 하던지 노예입니다. 최선을 다해도 노예고,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노예입니다. 사상의 노예요, 이미지의 노예요, 안타깝게도 그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우상 숭배자는 악에 참여자임과 동시에 그 악의 피해자인 것입니다.


  무엇이 아브라함 자손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거짓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신뢰하게 만드는 이미지들(우상이나 그림들)'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 때문에 누군가의 지배가 정당화됩니다. 그 소수의 사람 아래서 다수의 사람들은 굴종합니다. 인간이 그 이야기 안에서 인간답게 살지 못합니다. 성서는 그러한 히브리 노예의 삶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소리 질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노예입니다. 우상을 숭배할 때( 거짓된 이야기를 받아들일 때), 이스라엘은 노예가 될 것을 스스로 자처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왔어도, 나갈 때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노예 생활에서 스스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거짓된 이야기와 그림들의 허위를 드러낼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무 쥐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없듯, 어떤 인간도 파라오의 허위를 드러낼 수 없었고, 파라오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그림이 거짓임을 드러낼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몇 주 후면, 우리는 이 일을 실제로 이뤄내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거짓된 이야기 안에 있는 그들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보면 볼수록, 그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파라오의 지배만 강화될 것입니다. 고역은 심해질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악은 이집트라는 국가 공동체 전체에서 분명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고된 노동과 살육이 공공연히 인정됩니다. 신이 창조한 인간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누구 하나 저항할 줄 모릅니다. 거짓된 이야기가 모두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이집트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저번 주에 '바알와 아세라'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도 '거짓된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의 결과도 이집트만큼이나 끔찍합니다. 풍요를 위해서, 신전에서의 매음행위를 정당화했고, 몰렉의 이야기를 믿는 자들은 자기 아이를 불태워 죽였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어떤 특이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거짓된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곧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인간은 자기가 섬기는 것을 닮게 된다고(115:4~8)' 말합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자신이 섬기는 우상을 닮아갑니다. 인간은 어떠한 이야기 안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이야기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이들은 거짓을 닮습니다(8:44). 우상숭배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비인간화의 늪입니다. 자기 자식을 몰렉에게 불태워 바치면서도, 신전에서 사제들과 성관계를 맺으면서도, 스스로는 절대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거짓된 이야기와 그림들의 허위를 드러낼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나, 인간은 그 선택에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선과악의 판단자가 아니면서도 선과 악의 기준이 되려고 했던 인간. 그 결과에 인간 자신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된 이야기와 인간의 지배 그리고 비인간화'는 모든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 동일하게 벌어집니다. 그들이 지능이 떨어지는 원시부족이라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지배가 정당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수한 사람들의 인격이 무너져 갔습니다. 죽어갔습니다. 창조의 아름다움은 인간과 점점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4. 오늘날의 이야기


  오늘날 우리는 어떨까요? '거짓된 이야기'. 그 이야기가 만들어낸 무수한 '이미지(image)'.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언가의 '지배''비인간화' 의 결과.

 

  얼마 전에 마트에 갔습니다. 짜파게티를 먹고 싶었거든요. 일요일은 아니었지만, 그 날따라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매번 가는 마트라 새로울 것도 없었습니다. 서둘러 마트로 들어가려는데 자주 보던 거지만, 그 날 따라 두 장의 광고 포스터가 저의 눈을 사로 잡았습니다.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수려한 외모의 두 분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뻘건 양파 자루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이 남자 는 잘 생겼군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저는 회상씬으로 넘어갔더랬습니다.

 

  제가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만날 때 만날 때면, 자주 묻던 질문이 있습니다. "너 왜 살어?"(부정적인 늬앙스가 아닌, 진짜 질문으로서) "너 공부 왜 하니?" 이런 질문들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질 때 마다 저에게 돌아온 것은 "뭐 그런걸 묻냐"는 심드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자신이 왜 사는지 정말 모르고 있었고, 그런 친구들에게 왜 공부하는지를 묻는 것은 더욱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의 대답은, '그저 남들이 하니까', '안하면 안되니까', 이정도 수준이었고, 그나마 생각을 해보겠다는 친구들조차도 '노후보장을 위해서'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살아있는 깨끗함"이나 "살아있는 이 순간"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날마다 고민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6월의 어느 날 마트 앞에 붙어있던 광고가 저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깨끗함"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이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저 단어들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깨끗함! 살아있는 이 순간! 우리의 인생은 정말 저래야죠! 살아있는 깨끗함으로 살고, 살아있는 이 순간으로 살 수 있다면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죠?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음...'맥주'가요... 정확히는 '카스 맥주'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맥주가 여러분에게서 살아있는 깨끗함을 줍니까? 제가 저거 많이 먹어봤는데요. 여러분,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맥주가 살아있는 깨끗함을 주고, 살아있는 이 순간을 느끼게 한다는 소리는 정말 맥빠지는 맥주광고입니다.

 

여러분 이거 다~


  제가 믿기로, '살아있는 깨끗함'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증언하기를, 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살아있는 더러움'이기 때문입니다.(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따라서 모든 인간의 삶은 '살아있는 이 순간'이라기 보다는 '죽어있는 이 순간'입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깨끗해서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더러움이 '어떠한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깨끗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방법이 맥주일리 결코 없잖습니까? 그러나 이 맥주가 이 '살아있는 깨끗함'이라는 술어에 기생해서 자신을 팝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삽니다. 여기에 거짓된 이미지와 진실이 아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허망한 소리에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합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나라는 '상품'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 상품이라는 우상 뒤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소비하면, 자신과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어른들의 동화' 말입니다. 미국은 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공공연하게 "우리는 가게 문을 열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소비 문화의 국가가 결국 승리하는 국가이고, 테러는 미국의 소비에 위협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소비할 수 있는 인간만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트레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의 동화는 두 가지 주제로 시작된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행복해진다. 그리고 더 많이 일하거나 생산하는 사람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이 말은 소비의 동화 이야기 안에서는, 광고 몸값이 억소리나는 가수가, 수단에서 폭격을 당해 목숨을 잃은 소녀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004년 수단에서 끔찍한 인종학살이 벌어졌습니다. 30만명이 죽었고, 수백만명이 난민이 되어 지옥같은 생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해 가장 오랜 시간 보도된 소식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었는데, 뉴스들은 카메라를 수단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다르푸르 대학살이 ABC방송국에서 겨우 18분동안 보도되었고, 이보다 55배 많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에 대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다름아닌 광고 때문입니다. 소비를 위한 광고들이 수단의 인종학살 소식보다, 마이클 잭슨의 소식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팔리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소비의 거짓 이야기가 국가 전체에 팽배해있습니다. 미국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다를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럼 이것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 누구에게 물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소비의 동화를 믿는 이상, 이것을 누구도 잘못이라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어른들의 동화는 또한 모든 아이들의 꿈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최신 장난감을 갖지 못하는 아이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명품 핸드백이 없어서 마음이 착잡한 성인 여성처럼 말입니다. 소비를 추구하는 국가 안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소비에 탐닉합니다. ‘소비에 탐닉한다는 능동태는 곧 그들이 무언가 물건을 사야한다는 압박을 받는다는 수동태로 고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도 이 압박감을 느낍니다! 어른들은 무차별적인 마케팅 폭격을 아이들에게 쏟아붓습니다. 왜냐하면 어른들도 무언가를 사야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혈안이 되어 물건들을 구매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무언가를 사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의 추구가 '인간됨'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비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소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길거리로 나오고 있으니까요. 혹은, 소비에 대한 무능력을 비관하고 목숨을 스스로 끊고 있으니까요. 스스로 소비라는 거짓된 이야기에 자신을 가둔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눈은 언제나 TV나 모니터, 스마트폰의 작은 액정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보여지는 왜곡된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거짓된 소비의 이야기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날마다 매체들이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소위 '스타'라고 말하는, 왜 이들을 ''이라 부르죠?)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그들이 먹는 걸 보다가, 엄마가 차려준 식탁에 앉으니 외식하자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반대로 광고는, 당신은 피부가 너무 어둡다. 당신은 너무 뚱뚱하다. 당신은 너무 말랐다. 당신은 기미 주근깨가 많다. 당신의 가슴은 작다. 당신은 잇몸은 튼튼하지 않다. 당신은 냄새가 난다. 당신은 건강하지 않다. 당신은 죽을 수도 있다. 비정상적인 자기혐오를 만들어냅니다. 이쁘지 않으면 창피합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합니다!(혹은, 자신은 그렇지 않으나, 다른 사람 모두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도 함께 소비에 뛰어듭니다) 그러니 다시 인간은 자아도취적인 소비에 매진합니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은 이래나 저래나 소비가 답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소비 능력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입 당하고 있습니다. 소비추구라는 거짓된 이야기가 상품을 통해 표현되고, 비인간화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오늘은, 67일 아침입니다. 방금 아침뉴스에서 “4인 가족 기준 300만원 수입이 없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다랍니다. 이게 뉴스입니까?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주는 거짓 정보가 뉴스입니까? 도대체 무엇으로 인간다운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까? 그럼 한 달에 600만원 버는 가정은 2배 인간다운 것입니까? 저를 포함한 저소득 계층들은 인간답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동화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그랬다간 지구의 석유가 6개월만에 바닥납니다) 경제성장률이 치솟는 국가들의 영광 뒤에는, 착취당하는 어린이들이 살고 있는 제 3세계 국가들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뉴발란스 신발을 신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러한 착취의 산물을 몸에 착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바노바로 축구를 하고 있다면, 당신은 제3세계 미성년자 소녀의 가녀린 손가락으로 이뤄진 바느질에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도요타 자동차를 몰고 있다면, 당신은 무기 산업에 일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이 일 뿐이겠습니까? 소비를 위한 소비로 묶인 이 나라 안에서, 우리는 조용히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거나, 착취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비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고, 소비는 그 자체로 정당화됩니다. (테러 중에도 미국의 대답은, “우리는 가게문을 열어놓았다였습니다.) 소비가 정상이고, 소비가 해결책이며, 소비가 인간답게 한다는 거짓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이들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디어는 소비에 상관있는 일 말고는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고, 들려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소비에 묻혀 '인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점점 마비되고 있습니다.


  무언가 물건을 구매하는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국가들을 집어삼킨 망령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쇼핑몰은 소비의 대성당이다. 영원(Eternity)는 캘빈 클라인의 향수병에 담겨 있고, 무한(Infinity)는 도요타의 자동차 안에 들어있다. 사람의 마음은 더 이상 초월적이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보좌가 아니고, 더 이상 삼위일체를 본받아 다른 이들을 알아가고 사랑하지 않는다. 부의 약속에 닻을 내리고 심지어 그 사슬에 묶일 때까지 우리의 마음은 불안하다"

 

 

'영원''무한'은 향수나 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품은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파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끊임없이 인간보다 상품을 추구한다면, 거짓된 이야기를 믿고 있는 것일 겁니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지 못하는 거짓된 이야기 말입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사도, 당신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소비능력이 사람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 정보 회사들은 진짜 좋은 사람을 결코 추천해주지 못합니다.

진실 외에 참다운 사랑의 기초는 없습니다따라서 사랑하기를 원하는 누구에게나 진실이 필요합니다거짓된 이야기에서 벗어나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진짜 이야기 말입니다.

 

  참된 인간됨을 위해, 우리는 거짓 이야기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짜 이야기를 얻어야 합니다.

 

 

5. 아브라함 자손, 이집트를 나오다


  아담에 이어, 아브라함을 이어, 이제 모세가 등장했습니다. 절대선은 그를 통하여,

거짓된 이야기와 이미지들에 생각이 갇히고,

인권을 유린하는 폭력과 지배에 몸이 갇혀,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아브라함 자손들을

악에 물든 국가 이집트로부터 불러내셨습니다.

마치 우상숭배의 사회, 갈데아 우르로부터 아브람을 불러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그 분은 이집트가 믿고 있던 거짓 이야기들과 이미지들의 허위를 폭로하셨습니다.


풍요를 약속했던 나일강은 핏빛으로 변하고,

영물이라 여기던 개구리는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파라오를 섬긴다고 생각했던 하늘의 신은 난데없이 우박을 쏟아냈고,

비옥한 땅을 약속하는 흙의 신은 이로 변하여 사람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Ra)의 계승자라던,

부활의 신 오리시스의 아들이라던,

장차 호루스가 될, 파라오의 맏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파라오가 다스리는 모든 백성들의 맏아들이 하루아침에 시체가 되었습니다.

파라오의 지배가 신의 다스림이라던 그들의 믿음은,

이집트의 모든 부모들의 곡소리에 묻혀버렸습니다.

거짓된 이야기, 우상, 파라오 지배의 정당성이

하루 아침에 모두 어미들의 마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가짜는 죽고 진짜가 나타난 것입니다.

거짓은 사라지고 진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나온 그 날이 유대인들의 첫 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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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내용은, 출애굽기 1장부터 13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번 본문은 분량이 많아서 인쇄하기가 벅차네요. holybible.or.kr에 가시면 새번역 버전 출애굽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거짓된 이야기와 이미지들에 대한 여러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허망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혹은 아무런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눈과 몸이 따라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상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야기 해주시면 모두를 위한 좋은 연구 자료가 될 것입니다.(카톡이 24시간 대기중입니다)

 

*또 다른 편지의 수신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진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는 바벨론에서 만납시다. 한 주간 여러분의 '안녕'을 기도하겠습니다.

 

 

 

2012. 6. 6.

그 분 안에서의 살아있는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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