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갈데아 우르에서-우상, 사회적 차원의 악

 

0. 지난 이야기




0. 서론
1. 에덴에서
2. 갈데아 우르에서
3. 이집트에서
4. 바벨론에서
5. 이 사람을 보라!
6. 악으로부터
7. 새 하늘과 새 땅

 

  우리는 <기독교와 악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그림은 911의 섬뜩한 악몽이었습니다. 비단 911뿐이 아닙니다. '도대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의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기독교와 악의 문제> 라는 간지나는 제목을 달았는데, 저는 아직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하지도 못했습니다. 한 것이라 봐야 겨우, 악을 규명해보자 낑낑댔던 것이, 지난 두 개의 편지 안에서 했던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지난 시간 적었던 것들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악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을 성서의 에덴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혹여나, 제가 에덴 이야기를 했다고, 지나친 종교색을 띄는 것 아니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에덴 이야기를 했다고, 기독교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이슬람도, 카톨릭도, 심지어 몰몬교도, 또한 수많은 학자들도 성서를 연구합니다. 성서는 인류의 보물이지 기독교만의 보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덴 이야기를 했다고, 기독교 얘기를 했다고 볼 수는 없죠. '기독'은 그리스도의 한자어 음역인데, 저는 아직 '그리스도''' 자도 못 써냈습니다(지금 처음 썼습니다). 어쨌든, 에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악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습니다.

 

1. 악은 선에 기생한다.

2. 악은 선을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다.

3. 악과 선을 나누는 기준은 인간이 아닌, 절대선 자신이다.

 

  그런데 인간이 절대선을 배신했습니다. 절대선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 저 위의 세 가지 명제의 반대를 믿었던 것입니다.

 

3. 선과 악을 절대선이 아니라 인간이 결정한다.

2. 따라서 인간이 결정한 선은 악에게 패배할 수 있다.(인간은 불완전함이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1. 따라서 악은 선과 동등하거나 우월할 수 있다.

 

  절대선의 말씀에 불복하는 것은, 저 위의 세 가지의 역()을 믿는 것이며, 그것은 정리하면, '절대선의 패배에 대한 신뢰'라 하겠습니다. 누가 절대선을 패배시킵니까? 자신이 시킵니다. 자신은 누구입니까? 불완전하게 요동하는 악입니다.

 

  교통신호를 어기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교통신호를 어기는 것은,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보다 지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이것을 누가 결정할까요? 완전하지 않은 자신이 결정합니다. ... 절대선을 교통 신호로 비유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어 보입니다. 중력에 비유하면 어떨까요? 누군가가 중력을 거부하려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합니다. 중력을 지키는 것보다, 지키지 않는 편이 낫다는 강력한 신뢰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나 금새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선과 악의 분명한 경계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바보짓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절대선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절대선의 패배에 대한 긍정이고, 자신은 선악의 기준이 되거나, 혹은 그것의 예외가 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단순히 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죄인 것은 아닙니다. 절대선의 다스림을 벗어나려는 성향 자체가 죄요, 악의 방향인 것입니다. 그 악한 성향은 신의 패배를 위한 인간의 반역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승산 없는 반역이었습니다. 마치 중력을 거스르려는 인간처럼, 바보짓이었습니다.

 

  인간이 이러한 바보짓을 하도록 유혹한 것이 뱀입니다.(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하는 말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뱀은 인간에게 3번을 말하고 있고, 정작 자신은 1번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번에 넘어간 인간도 점점 1번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18세기에 접어들면, 이 바보짓이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바보짓을 긍정하는 사상의 영향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1. 유혹의 기술

 

 

  그렇다면, 중력을 거스르는 자처럼, "절대선을 거절하는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까요? 악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절대선을 거절하게 만든 악은, 인간을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요? 저번 주에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Q. 뱀이 인간을 유혹할 때, 사용했던 것들, 그리고 인간이 뱀의 유혹에 반응했던 것들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이것을 오늘날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악이 인간에 기생하려고할 때, 인간을 이용하기 위해 던지는 미끼들에 대한 물음입니다. 우선은 고대문서에 적혀있는 뱀의 말을 확인해봅시다. 단 두 마디 뿐이지만, 이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해 사본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절대선의 말씀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의심에 이은 부정. 신은 자신의 의지에 역행하는 것이 곧 죽음이라 말했으나, 뱀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신의 말씀을 어겼을 때 죽지 않고, 눈이 밝아지며, 신처럼 되고, 선악을 알게 된다고 인간을 '유혹'합니다.

이러한 유혹에 인간의 반응은 참으로 참담합니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뱀의 말을 들으니, 절대선이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신 그 열매가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먹으면 선악을 분별하는 슬기로움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절대선과 같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먹습니다.

 

  절대선의 말씀에 불응하는 뱀의 유혹과 인간의 반응에는 다음과 같은 합의가 있습니다.

 

1) 나무 열매를 먹어라 - 먹음직도 하였다.

2) 눈이 밝아질 것이다 - 보암직도 하였다

3)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 - 사람을 슬기롭게 하는 나무처럼 보인다.

 

  정리해보면, 뱀의 유혹은 절대선의 말씀을 거부하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 인간의 몸의 욕구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2)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이용합니다. 마지막으로 3) 인간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매개로 하여, 절대선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나갑니다이제 우리는 그것들의 고고학적 증거로서, 고대 우상들을 만날 차례입니다.

 

 

 

2. 고대의 우상 숭배

 

 

  절대선을 거부한 인간은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것, 몸이 원하는 것, 자신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따라서 우상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요. 눈에 보이는 결과들을 보여줘야 합니다. 둘째는 인간(의 몸)이 원하는 것들을 제공해야 하고요, 셋째는, 그것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상들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들을 가지고 오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몇 가지 고대 우상들을 살펴봅시다. 여러 고대 우상들이 있으나, 여기서 제가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우상들입니다. 대부분의 우상들의 특징은 남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관계가 있으니 가족 관계도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우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가나안 사람들은 ''이라는 신을 믿었습니다. 엘은 가나안 신들 가운데 최고신이었습니다. 엘은 모든 신들의 아버지였고, 북방에서 신들이 모여 총회를 열 때 그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이기도 했습니다그리고 그 ''의 부인으로 '아세라'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신, 아내의 신, 행복을 가져다주는 번영과 풍요의 신임과 동시에 신전에서 집단으로 성관계를 맺는 성적 방종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아세라와 바알

 

  그리고 이 엘과 아세라의 아들로서 '바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우상이기도 한데요. 바알은 (Lord)’ 혹은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또한 비와 풍요의 신이기도 합니다. 가뭄을 대표하는 지옥의 신 모트(Mot)와 투쟁하는 신이거든요. 그리고 자신의 누나인 '아낫' 여신과 결혼합니다.

 

  이 프레임이 고대인들이 현실을 이해하는 생각의 구조였습니다. 그들은 바알이 지옥의 신 못(Mot)과 전쟁하러 나갔다가 패하여 그에게 지옥으로 끌려가 버리면 '건기(乾期)'가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아낫이 가만히 있지 않고 남편인 바알을 구하기 위해 지옥에 직접 내려갑니다. 그러고는 지옥의 신 과 싸워 남편 바알을 구해서 함께 올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부부가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될 때, 땅의 곡물이 자라도록 비가 다시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이 때부터 우기雨期가 됩니다) 그래서 바알은 비의 신, 풍요와 다산의 신, 농사의 신이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바알과 아낫의 성적 활동을 자극하기 위하여 신전에서 신도들과 제사장 혹은 신전 창기와 소위 성스러운 매음을 행했습니다. 이 신전 매음에서 남자는 바알, 여자는 아낫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인간 남녀가 바알과 아낫의 성적 행동을 모방하면 이 신들을 결합시켜 출산력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저 신기한 옛날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절대선을 벗어난 인간이, 자신의 눈과 몸이 원하는 것을 좇아 무언가를 만들고, 그 무언가에 이야기를 붙여 선과 악을 결정한 것이, 집단 혼음이라는 비인간적인 행태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어떤 우상이든, 우상들은 뱀의 유혹의 속성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이것은 신이 창조한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부터 끝없이 멀어지게 합니다. 저 위의 이야기는 신화이지만, 신화는 곧 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곧 인간의 삶이었습니다.

 

  우상의 끔찍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대 우상중에는 몰렉이라는 신이 있습니다. 몰렉은 ''이란 뜻인데요.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사람의 몸에 황소머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몰렉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보통 아이들을 불태워 바치는 인신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부모들이 가장 귀한 자식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 신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데서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금속으로 만든 이 형상 안에 불을 지펴서 붉게 달아오르면 팔 위에 올려놓은 아이는 굴러 아래의 불붙는 구덩이에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희생제물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피리를 불고 북을 쳤습니다.

 

몰렉의 제사

 

  왜 일까요? 그들은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몰렉은 가나안 일대에 만연해 있던 우상이었습니다.(12:31, 18:9) 그리고 솔로몬 왕도 몰렉을 섬기며 몰렉을 위한 제단까지 쌓는 죄를 범했습니다(왕상11:5,7). 이것은 몰렉의 인신제사가 일반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당대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 무엇 때문에?

 

 

  절대선을 등진 인간은 늪에 빠졌습니다. 기준을 버린 인간은, 스스로가 기준 되었고, 스스로가 기준이 되었으나, 그들이 결정하는 것은 누군가를 죽여서 얻는 행복이었습니다. 인간됨을 벗어난 방법들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이 무식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고대인들의 사고구조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 고대인들은 지능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무언가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것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과 악의 이야기에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무언가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말 믿을만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잔인하시다고 비난하려고 할 때, 이 이야기를 쓰곤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만드신 인신 제사의 무대 위에서, 정작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몰렉과 다르시구나!"

 

  완전히 다르시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우상이 아니시니까요! 그 분은 절대선. 선과 악의 유일한 판단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원하신 것은 인간의 인간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믿을 만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절대선. 그 절대선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몸을 만족 시켜주는 선과 악의 거짓 기준'과 같을 수 없습니다.

 

3. 그리고 오늘

 

 

  오늘은 어떠합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몸을 만족 시켜주는 선과 악의 거짓 기준'이 횡행한 시대입니다. 눈이 보고 싶은 욕망, 몸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욕망, 선과 악의 판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오늘날도 새로운 바알과 몰렉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우상을 따라, 절대선과 여전히 멀리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우상들이 있을까요?

 

  리차드 포스터라는 사람이 이러한 책을 썼습니다. 책 제목이 다소 충격적입니다.

 

<, 섹스, 권력>, 리차드 포스터

 

  흔히 우리는 '우상숭배' 라는 말을 '제사상에 절하기' 의 동의어로 정도로 사용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 섹스, 권력 앞에 절하진 않지만, 그것들을 따라갑니다. '우상숭배'는 허리를 굽혀 절하지 않더라도, 절대선 아닌 다른 무언가를 따라갈 때, 언제나 쓸 수 있는 말들입니다. , 우리의 특정 행위가 아닌 우리의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대인은 돈을 따라갑니다. 섹스를 따라 갑니다. 권력을 따라갑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들은 절대선이 아닙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보고자 하는 욕망, 육체의 욕망, 그리고 선과악의 기준이 되고자하는 욕망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돈, 권력, 섹스. 이 세 가지는 인류와 함께 항상 함께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럼 돈이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돈 자체는 '교환할 수 있는 가치'의 다른 말에 불과합니다. 성 자체가 죄악스러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방법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힘이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무언가를 움직이기 위해 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수원역 한가운데에 돼지를 벗겨놓고 봉에 매단다음 빙빙 돌립니다. 그럼 사람들이 미친듯이 몰려올까요? 거기에 돈을 던지고, 정신없이 그것을 쳐다보고 있을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그러나 만약 벗은 여자가 봉 위에서 빙빙 돌고 있다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스트립쇼에 열광합니다. 그것을 보기 위해 돈을 뿌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우리의 성욕은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고 무너져 있다는 것입니다. 소아성애자들이 늘어나고,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치유가 아닌 정당화의 길을 선택합니다.

 

  성욕뿐이 아닙니다. 고도 비만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입에 초콜렛을 밀어 넣습니다. 힘의 추구를 위해서 상대를 죽이는 것은 역사 속에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키케로도 죽었고, 카이사르도 죽었습니다. 신숙주도 죽었고,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의 추구를 위해 숙청되었습니다.

 

  이렇듯, 절대선의 기준을 버린 인간의 욕망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종을 시작합니다. 아니, 방종정도가 아니라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들을 다스려야 함에도, 그것들에 매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돈에, 누군가는 섹스에, 누군가는 권력에 매어 그것들을 쫓아 살아갑니다. 숭배합니다. 결국 그러한 추구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깨우치면서도, 그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절대선의 기준없이, 폭주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살에 맞닿는 실질적인 우상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라, 절대선의 말씀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요즘은 정치면보다 연예면 뉴스가 많이 쏟아져나오는 이상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과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보다 연예인들의 가짜 결혼에 더욱 행복해 합니다. 그 연예인들은 치마 길이를 줄이고, 몸을 만듭니다. 성적인 매력이 돈을 벌어다 주니까요. 그 벌어다 준 돈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권력이 됩니다. 다시 치마 길이를 줄입니다.

 

  어디까지 줄어들까요. 짧은 치마.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몸동작들. 그럼에도 그들을 자신들의 우상이라 추종하는 청소년들. 그들은 말 그대로 IdolIdol을 추종하는 신도들입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야 할까요?

 

절대선이신 그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0:3, 개정)

 

  앞으로 이어지는 편지들을 통해서, 이 세대가 쫓는 '우상'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상들의 허위를 드러내는 것이 이 편지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4. 갈데아 우르에서

 

  인간을 이용하여 이 '악의 숙주'가 몸을 불려나가는 과정은 참으로 참혹합니다. 악은 처음에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확인했듯- 인간의 내면을 점령했습니다. 절대선의 말씀에 불응하는 최초의 시작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점점 자라나 인류 최초의 부부를 점령했고, 점령당한 그 부부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부의 자식에게도 그 악의 마수는 손을 뻗습니다. 형이 돌을 돌로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절대선에서 멀어진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결코 최선도 선도 아니었습니다. 절대선 없이 인간은 최선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선'은 언제나 절대선 안에서만 가능하니까요. 절대선과 상관없는 열심은 그저 자기 파괴일 뿐입니다. 인류 최초의 장남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인류 최초의 둘째 아들이 무참히도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의 전진은 멈추지 않습니다. 악은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들이 인류 최초의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절대선의 말씀에 불응하기 전까지는 없었던 일들이거든요. 최초의 떠넘기기, 최초의 미움, 최초의 살인. 최초의 죽음. 이 모든 것들이 악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은 '최선'이 아닌 '최초'를 선택했습니다. '가장 선한 것'이 아닌 '가장 먼저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점령한 악이, 인간을 넘어서 관계를 오염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절대선의 말씀에 불응하는 내면으로부터 시작된 이 악의 씨앗은, 마침내 우상들을 만들어냈고, 절대선이 아닌 그 우상들을 추종하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오염시켰습니다. 그 결과로 우상이라는 현상들이 등장합니다. 누군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무언가를 팔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삽니다. 사고 파는 관계속에 욕망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한 쪽은 더 부추기고, 한 쪽은 돈을 더 제공합니다.

 

  따라서, 우상은 '사회적인 악'입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악에 의해 이용당하는 사람들은, 그저 절대선을 무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절대선과 인간의 관계는 쌩까면 그만인 관계가 아닙니다.

 

  절대선과 우리의 관계는 피아니스트와 피아노와 같습니다. 연주되기 위해 만들어진 피아노가 피아니스트와 쌩까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줄은 점점 늘어지고 건반은 먼지로 빡빡해질 것입니다. 결국 동사무소 표딱지 붙여서 버려야될 짐이 될 것입니다. 절대선만이 우리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최선(가장 선한)'의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선의 연주에 의해서만이 진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연주되지 않는 피아노는 아무런 의미가 없듯, 절대선을 벗어난 사람에게선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마치 연주자를 잃은 피아노처럼요. 그러나 무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 지구는 '의미없음'으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선을 악으로 오염시킨 '악의 숙주'는 점점 자신의 몸을 불려나갔습니다. , 세계는 연주자를 거부하는 고장난 피아노들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화음도 음악도 들리지 않은 채, 돈과 섹스와 권력만을 추구하는, 나무 썩는 냄새로 진동하는 세상말입니다.

 

연주자가 떠난 피아노

 

 

  그런데 이러한 세상 속에서 절대선은 충격적인 반전을 시작하십니다. '갈데아 우르' 라는 곳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한 남자의 아들을 불러내십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브라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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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이생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6, 새번역)

 

2012. 5. 25

 
여호수아 24:2,3 새번역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우상들을 섬겼다.
그러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에서 이끌어 내어...
 
11:27~32, 새번역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하란은 롯을 낳았다. 그러나 하란은 그가 태어난 땅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아브람과 나홀이 아내를 맞아들였다.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이다. 하란은 밀가와 이스가의 아버지이다. 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하여서, 자식이 없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창세기 12:1~4 새번역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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