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화씨 911> 이라는 영화의 내용과 상관있습니다.


1. 에덴에서

-악과 인간의 내면


0. 들어가기 전에


<악의 문제와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순서를 따라 이야기하자 했습니다.

 

0. 서론

1. 에덴에서

2. 갈데아 우르에서

3. 이집트에서

4. 바벨론에서

5. 이 사람을 보라!

6. 악으로부터

7. 새 하늘과 새 땅

 

오늘부터,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1. ''은 인간의 문제다

 

 

   여러분, 이곳은 거대한 살상의 현장입니다. 날마다 생명들의 피가 튀기고, 서로 물고 뜯는 일들이 반복됩니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도망가고, 누군가는 그 뒤를 턱 끝까지 바짝 쫓습니다. '약육강식' 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요? 여기는 세렝게티 초원입니다.



바바예투예투~

 

  이 세렝게티 초원에 두 마리의 짐승이 있습니다. 하나는 밀림의 제왕 사자고요, 하나는 빛나는 눈망울의 사슴입니다. 이쯤에서 여러분께 질문! 여러분, 사자가 ''할까요? 사슴이 ''할까요?

저는 숨도 쉬지 않고 사슴 편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사자는 너무 무서워요. 사자의 앞발에 치이고, 그 날카로운 송곳니에 숨통이 끊긴 무수한 사슴들을 생각해볼 때, 사슴에게 저의 동정표를 모조리 몰아주고 싶습니다. '사슴은 차켔습니다'.


  그러나 사자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자를 세렝게티 초원에서 몰아내자는 '반사자운동'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습니다(저는 제정신이니까요). 그리고 만약 토끼풀과 사슴 중 누가 악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번에 저는 당연히 토끼풀의 편을 들어줄 것입니다. 토끼풀의 입장에서 사슴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들을 먹어치우는 악랄한 포식자니까요.(사슴이 토끼풀을 먹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만) 무수한 토끼풀들이 무참히도 사슴의 오물거림에, 손쓸 새도 없이 당했습니다.

 

  “사자와 사슴 중 누가 더 악하냐?”는 질문은 애시당초 좀 잘못된 질문인 듯싶습니다. 사슴은 그렇게 살고, 사자는 그렇게 사는거죠 뭐. 걔네가 그렇게 살지 않아도, 정말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사슴이 사자를 용서해준다던지, 사자가 그러지 않기로 결심한다던지 한다면 말이죠.

 

우리가 당황하지 않는 장면

 

  그러나 이게 '2001911일 바다 건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사정이 좀 다릅니다. 아니 많이 다릅니다. 뉴욕은 세렝게티 초원이 아닙니다. 건물 밖으로 몸을 내던진 사람들은 동물들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힘이 센 인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약육강식은 동물에게만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일이 우리의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그 일의 원인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공격한 자들도 죽었고, 공격받은 자들도 죽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끔찍한 악의 현장이었습니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을, 우리는 인간 사이에서 목격했습니다.

 

  그 현장에서 도대체 누가 승자일까요? 인간이 죽음 앞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의 승리를 말할 수 있을까요? 끔찍한 악의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계속 '악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앞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악에 대한 이야기는 곧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잔인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짐승에 대한 모욕입니다. 짐승은 인간의 잔인함을 결코 따라오지 못합니다. 어떤 짐승도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몇날 며칠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준비하지 않습니다. 살인 그 자체가 목적인 짐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지구 위에 복수라는 이름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은 오직 인간 뿐입니다. 사슴을 죽이는 사자는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악합니다. 왜냐하면 '약육강식'은 보편 타당한 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약육강식이, 동물의 세계에서처럼 인간의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원리라면, 우리는 911을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죽은 많은 '약한' 사람들, 순식간에 벌어진 대참사에 영문도 모른 채 죽음으로 빨려 들어갔던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감히 누가 '강한 자가 이기는거야'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약육강식의 그림으로는 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악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에는 어떠한 캥김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지 않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에 대한 직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만이 악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 존재하는 ''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2. ''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

 

  우리는 악의 문제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군부대에서,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악에 대한 정의는 다릅니다. 누군가는 '남을 해치는 것'이 악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좀 더 범위를 넓혀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 '악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오랫동안 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각자 내놓은 답변은 달랐습니다. 여러분은 악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뜬금없이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타이탄> 이란 영화인데요. 이 영화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악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안보셨어도 글을 읽는 것에는 지장은 없습니다.

 

  악에 대해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지배하던 생각은, 선과 악이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고대 신화들을 보면, 선한 신과 악한 신이 '동등한' 입장에서 등장합니다. 그리스 신화도 힌두교 신화도 그렇습니다. <타이탄>에서는 제우스와 하데스가 등장합니다.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짱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제우스도 하데스 때문에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그 와중에 인간은, 선을 따르거나, 악을 따릅니다. 악에 의해 선이 파멸될 수도 있기에, 인간의 선택은 중요해집니다. 인간이 선한 신을 따르면, 선이 이길 것이고, 악한 신을 따르면 악이 이길 것입니다. 악이 득세하니까, 사람들이 선한 신들에게 기도를 안해주고, 기도를 안해주니까, 선한 신들의 존재가치가 점점 상실됩니다. 페르세우스가 안도와줬으면 제우스라 하더라도 작살날뻔했습니다. 인간의 기도를 받지 못하는 신들은 존재가치를 잃고 점점 희미해지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집니다. 신의 운명이 인간 선택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인 것입니다!

 

"니네가 기도안해주면 나 어지러워"

 

  최근에 2탄이 나왔는데요. 1편의 선과 악의 개념을 그대로 가져갑니다. 2탄의 광고문구가 저를 더욱 더 충격으로 몰아넣었는데요, 이제 제우스는 빈혈 증세를 느끼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구원받는 뒷방 할아버지 신세로 전락합니다.

 

인간에게 구원받는 가련한 신의 이야기

 

  그러나 이 영화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줍니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고대로부터 내려온 선과 악의 개념은, 선과 악이 동등한 위치.

2. 그리고 이것은, 선이 악에 의해 파멸당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고,

3. 그 선과 악의 기준은 인간이 결정하게 된다는 것.

 

  그럼,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은 무엇일까요? 선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이 없는 것은 선이 됩니다. 근데 그 선은 누가 정해요? 인간인 내가 정해요. 그리고 내가 정한 그 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악입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그 악에 패배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어요. 그러니까 그 악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다 죽여야 합니다. 악이 없는 것이 선이니까요.

 

  이거 지금 누구 이야기일까요? 징기스칸 이야기입니다. 십자군 전쟁 이야기입니다. 히틀러 이야기입니다. 선과 악이 동등한 위치에 있고, 선이 악에게 패배 가능성이 열려있으며, 그 선과 악의 기준을 인간이 정하는 사고방식. 선의 이름으로 악을 징벌해야한다고 말한 대부분의 독재군주의 사고방식이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은 나와 너 사이를 지나갑니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선의 이름으로 너를 죽일 수 있습니다.

 

  서구 유럽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머리 속에 떠올려보세요. '서구 유럽은 선, 이슬람 세계는 악. 그리고 이슬람에 의해 서구 세계는 파괴될 수 있고,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이라크에 파병해야 한다.' 이것이 2001년 생각의 프레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선일까요? 유대인 대학살이 선이었습니까? 캄보디아 킬링필드가 선이었습니까? 악의 축 운운하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선이었습니까? 911테러 현장에는 선이 없어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고대에서부터 내려와, 요새는 헐리우드가 배포하고 있는, '일반적'이라고 부르는 악의 개념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양 쪽에서 희생자만이 늘어날 뿐입니다. 911희생자가 3000여명. 그러나 이 일의 복수로 파병된 미군 중 부상자를 제외한 전사자만도 3000명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911은 사탄이 벌인 짓이고

(2등신의)사탄이 벌인 짓을 빈라덴이 했으며

따라서 빈라덴을 없애는 것이 악을 소탕하는 길이다?



 

3. 에덴 이야기가 보여주는 악

 

  일반적인 악의 개념이 아닌, 성서는 무엇이라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야 기어코 에덴에 도착했네요.

 

  성서의 시작인 창세기 1, 2장에서는 신적인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창조에서 신은,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에게 이 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맡겼습니다. 인간은 지구를 신의 뜻에 따라 다스릴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3장에 이르면, 성서에 흐르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집니다. 성서가 인간의 악에 대해서 최초로 언급하는 장면이 창세기 3장입니다.(편지의 가장 뒷장에 창세기 3장 전문을 첨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조금 전에 봤었던, 악에 대한 세 가지 오해들을 다 깨뜨립니다.

 

  그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선의 없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이 없다면, 악도 있을 수 없습니다.(창세기 3장에 등장한 뱀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듯 말입니다.) 악은 선에 기생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뱀의 진짜 이름도 '유혹자'입니다) 악은 선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을 유혹해서 악을 만듭니다. , 악은 선에 기생하며 자라나면서도 그 선을 파괴하려는 성향이 곧 악입니다.

 

  따라서 선과 악은 대등한 위치가 아닙니다. 흔히들 악의 반대가 선인 것처럼, 사탄의 적수는 하나님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어불성설, 미스매치입니다. 사탄의 적수는 미카엘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그럼에도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계시록 12장에서, 사탄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미가엘 군대와의 전투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적수라 말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님은 판결자이시고, 뱀은 범죄자입니다. 뱀은 재판장 앞에서 피고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선과 악은 대등한 입장에 서 있지 않아요. 마치 선이 철이라면, 악은 철에 생긴 녹과 같습니다. 녹은 반드시 철을 필요로 하지만, 철은 녹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암은 몸을 필요로 하지만, 몸은 암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선과 악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두 번째 오해를 불식시킵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악에 의해 파멸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제우스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선이 악에 의해 파멸당할 가능성'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하나님을 이길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논의를 더 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선은 절대선이요, 그 절대선은 이미 악에게 파멸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성서에서 악이 선을 이길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아니, 언급조차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만든 지점토에 곰팡이가 생겼다고, 그 곰팡이가 여러분을 이길 수 없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선은 절대선입니다. 악과 동등한 입장이 아닌, 패배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절대선입니다. 악은 그 절대선이 만든 선한 세계에 붙어서 기생하는 기생충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구절은 그 악에 대한 절대선의 파멸 선고 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3:15)

 

  마지막으로 그 선과 악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 역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 이야기가 보여주듯, 인간은 선악의 판결자가 아닙니다. 뱀과 마찬가지로 피고인석에 앉아 있습니다. 인간은 뱀과 나란히 앉아 절대선의 판결을 들었습니다. 절대선 앞에서 이미 악하다고 판결을 받은 인간이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치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희대의 구라쟁이

 

  인간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나누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준은 인간을 관통합니다. 완전히 선한 인간도 없고, 완전히 악한 인간도 없는 것은,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 한 개인의 마음 한 가운데를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역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만약 제가 저의 아들에게, "아들아,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는 이럴 자격이 있을까요? 만약 누군가가 "그럼 너는 거짓말을 절대로 안하셨어요?" 라고 물으면 저는 침묵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정직하게 살지 못했음에도, 제 자식에게는 정직을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개차반으로 살아온 '저와 관계없이 옳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옳은 것을 말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자격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옳은 것의 자격에 '기대어'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언가 옳은 것을 말할 때는 겸손해야겠죠. 자신의 자격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선하지 못한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도 무의미하겠죠. 완벽하게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이제, 성서가 말하는 ''에 대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선과 악이 동등하지 않습니다. 악은 선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은 악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2. 악은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암덩이가 몸을 덮으면, 암덩이도 죽습니다. 그러나 신은 몸이 자체가 아닌, 몸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악의 펀치는 절대선에게 닿지 않습니다.

3. 선과 악의 기준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절대선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한 기준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완전한 것을 기준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아침 조회 때 운동장 끝에서 끝으로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친구를 기준으로 세우는 선생님은 안계시니까요.

 

  그렇다면, 인간이 아니라면,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절대선 자신입니다. 뱀과 인간을 옳고 그름으로 판결하는 그 존재가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4. 절대선



  저의 자격이 아니라, 절대선의 자격에 기대에 말할 수밖에 없는 다음의 내용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절대선은, 악을 무엇이라고 규정할까요? 질문을 제대로 던지면 답변도 제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절대선이 가르쳐 주는 악은, 곧 절대선 자신의 뜻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마치 스스로 과녁을 빗나가려는 화살처럼 말입니다.

 

  누구나 기준이 있고, 자신의 과녁(목적)이 있고, 자신의 옳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의 기준이며, 누구의 목적이며, 누구의 옳음이냐는 것입니다. 절대선의 의지. 신이 옳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선입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악입니다. 만약 절대선의 뜻이 아니라면, 그것은 선과 대등하지 않으며, 선을 이길 가능성이 조금도 없고, 절대선이 아닌 다른 것의 주장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악이요, 패배요, 거짓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 말을 듣고 걱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신이 변덕이 심하고, 자기 멋대로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면 어쪄죠? 우리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그런 걱정일랑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제가 믿는 신을 '절대선'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말 그대로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 절대적인 신은, 예외가 없으신, 주변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시는(오히려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을 만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외없이 지켜지는 모든 우주의 법칙이(만유인력을 포함한) 그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절대적인 신이 선하지 않으면 어떡하죠? 선하지 않은 존재가 절대적인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절대왕정'이라 불리는 루이 14세의 경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절대적이지 않으면서, 절대적이라 주장하는 선하지 않은 한 사람이 하고자 했던 것은 고작 화려한 생활과 사람 죽이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아무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았습니다.

 

레깅스의 아버지

 

 

  그러나 우리는 기뻐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믿는 그 분은 진정 절대적이심과 동시에 "선하시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1018절에 써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 분의 선하심을 알 수 있는 힌트들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절대선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상대적인 선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선'은 곧 '상대적인 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선은 선이 아니라 악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사람은 누구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 모두는 상대적임에도(절대선의 의지에 불복할 때가 많음에도), 절대선의 파편들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당신도, 옳은 일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진리의 파편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전태일의 분신에 공명하는 마음. 쌍용차 사태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눈빛. 지하철 아래 깔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전철 앞에서 힘을 줄 때, 적어도 우린 무엇이 옳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알지 않습니까?

 

  왜 우리 마음 안에는 정의를 추구하는 마음들이 있는 것입니까? 불의를 보고도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왜 우리 마음에는 무언가 걸리는 것이 불편한 느낌이 남아 있는 것입니까? 이 절대선의 흔적들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분명하게 있습니다. 무언가 옳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저 엉망진창 힘과 돈에 의해서 굴러만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그 옳은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느끼고 있습니다. 공평과 정의와 진실과 사랑을 말입니다.


  허나, 우리가 가진 이 보잘 것 없는 정의감은 파도에 흩날리는 물보라의 입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가진 이 옳음이, '어떠한 사건에 의해' 썩고 변질돼버린 상한 재료라면, 우리는 이 냄새나는 재료들의 원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작은 물방울이 있었던 원래의 바다 말입니다. 심해바닥에서부터 수면에 이르는, 대륙의 한 쪽 해안에 지구 반대편 해안에 이르는, 끝도 없는 정의를 말입니다.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절대선의 선함을 측량해보겠다는 시도를 애시당초 그만두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로, '완전한 정의'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측량할 수는 없으나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 절대선의 다른 이름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에덴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비극을 발견합니다. 절대선의 의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는 것'이였으며, 인간이 이 절대선의 의지에 역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실수나, 오해로 부르지 않습니다. 악입니다. 절대선에 대한 반역입니다.


  흔히들, "삶은 여행", 혹은, "순례" 라 부르지만, 인간의 삶은 팔자 좋은 여행이나, 순례가 아닙니다. 반역자들의 삶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창세기 3장 이후, 모든 인간의 삶은 절대선에 대한 반역입니다. 다시 말해, 악입니다. 절대선에 의해 지음 받았음에도 그 선을 파괴하려는 성향이 인간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성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주변만 잠깐 돌아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교실에 10분만 앉아있어도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악이 우리 내면에서부터 모든 구조를 점령하여, 절대적으로 옳은 무언가에 반기를 들고 있는 분위기는 너무도 익숙한 분위기입니다.


  이 승리 없는 반역의 비참함을 인류 최초의 부부가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우리 역시 날마다 절대선의 의지에 불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를 추구하나, 정의는 우리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우리마저도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인류로부터 시작된 이 '악의 역사'를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매일 밤 9시마다 들려오는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소식은 그것을 또 확인하게 합니다.

 



5. 인격의 오염

 


   그리고 인간에게 한 번 시작된 이 녹과 암덩이는 점점 인간과 세계를 덮어갑니다. 마치 맑은 물에 잉크를 풀어 놓은듯, 인간과 세계는 빛대신 어둠이 덮어갔고, 악의 역사는 인간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먼저는 각각의 인간이 절대선에게 나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악을 가지고 절대선과 교제한다는 것은, 마치 산소 탱크없이 진공상태의 우주 한 복판에 떨어지는 일입니다. 예외를 모르는 우주의 환경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기준이 분명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기준은, 자신의 뜻에 역행한 사람에게 선처를 베풀지 않습니다. 악을 선택한 인간은 절대선과 함께 살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선이신, 그 분은 허허 웃으며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하늘 할아버지'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이라는 말은 그 분이 우리가 악에 참여하는 것을 눈감아 준다는 뜻이 결코 아님에도 말입니다. 그 분은 '하늘 할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은 위엄이 있으신, 분명한 기준이십니다. 절대선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준이 되시는 절대선임을 망각하는 것은, 곧 자신 생각이 선악의 기준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악이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뱀의 유혹으로 생긴 절대선에 대한 오해가 인간의 비참함의 시작이었듯 말입니다.

 

  하나님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반역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왕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절대선이신 그 분께서 악을 눈감아 주신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 분은 악을 미워하십니다. 저는 그 분 앞에서 악인이 그 분 앞에서 즐겁게 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십계명으로 유명한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죽임당할 뻔 했습니다. 마치 남편이 바람 핀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절대선의 뜻을 져버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절대선으로부터 떨어진 인간은, 그 선한 본성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인격이 오염됩니다. 절대선으로부터 소외되었으니, 인간의 인격이 선에서 멀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창세기 3장 이야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인간들에게, 책임전가의 고소 문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데, 쟤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계를 나와 너의 경계로 정하는 것이, 최초의 인류에게서부터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뱀을 닮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지음 받았음에도 하나님께 반역하는 뱀을 닮아 버렸습니다.(뱀의 또 다른 이름은 THE ACCUSER '고소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감추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점점 절대선과 멀어집니다.


  저는 지금 인격, 본성, 내면이라는 말을 섞어서 쓰고 있습니다. 마음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용어가 어찌되었든, 우리의 마음에 무언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선하지 않으면서도-악하면서도- 우리를 강력하게 끌고 가고 있는 무엇입니다. 앞으로 이것을 가리켜 '내면의 악'이라 부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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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악>

남은 내용은, 창세기 3장 전문입니다. 몇 가지 생각할 질문도 달아놓았습니다. 성서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발견하시는 시간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진리가 여러분과 함께.

2012. 5. 15.


창세기 3(새번역)


뱀은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그러나 하나님은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하나님은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너희의 눈이 밝아지고하나님처럼 되어서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먹음직도 하고보암직도 하였다그뿐만 아니라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그도 그것을 먹었다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몸을 가렸다그 남자와 그 아내는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제가 들었습니다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다.

"네가 벗은 몸이라고누가 일러주더냐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네가 먹었느냐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이제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너는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너는 흙에서 나왔으니흙으로 돌아갈 것이다그 때까지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너는 흙이니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흙을 갈게 하셨다그를 쫓아내신 다음에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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