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벨론에서

-제국과 악

0.


  오늘은 6 20일입니다. 몇 주간 글이 써지지 않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갈 길은 먼데 책은 손에 잡히지 않고, 글을 쓰려고 앉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한글 창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지금이 저녁 11 38분인데, 오늘 내일 중으로는 결판을 내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왜 쓰냐고요? 지금 생각중입니다.



0. 서론

1. 에덴에서

2. 갈데아 우르에서

3. 이집트에서

4. 바벨론에서

5. 이 사람을 보라!

6. 악으로부터

7. 새 하늘과 새 땅



  어찌 되었든 바벨론에서!




1. 이것이 진정한 평화인가?


  

  우선은 사진 한 장을 보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냅니다.(실업자이기 때문에) 집에서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아침에 청소기 돌리기, 빨래 널고 개어 놓기, 그리고 글 읽고 글 쓰는 일 뿐입니다. 저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바퀴벌레의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비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역시,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전쟁이 비참하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겠죠. 우리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저기 누워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말해야만 합니다. 전쟁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구글에서 전쟁 관련 사진들을 찾다보니까, 정말 끔찍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타인의 인격은 커녕, 사람을 고깃 덩어리처럼 취급하는 사진들을 보며 구역질이 나왔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죽이고, 욕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뉴스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보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승리가 아니죠. 모두의 패배입니다. 전쟁에 이긴 쪽, 진 쪽 모두 말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은 또 다른 나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총구를 겨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격에 대고 총구를 겨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서로를 죽이려고 총을 겨눌 때, 그것은 양 쪽 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진들 중에서 정말 수위가 낮은 사진으로 골라서 위에 올려놨습니다. 저 사람들은 왜 누워있는 것일까요? 뭔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요? 왜 저 군인은 죽은 사람에게 발길질을 하는 것일까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아서일까요? 옆에 지나가는 군인 두 명에게는 이 일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보입니다. 누군가의 인격을 짓밟고, 짓밟히고, 살해하고, 살해당하는 일이 말입니다.


  인간은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고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히로세 다카시는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곳을 표시해둔 세계 지도를 각 연도 별로 실어놓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지도를 보면 정작 지구에서 전쟁이 사라진 적이 단 순간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전쟁은 잦아지고 많아지고 그 양상이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죽이고 죽임 당한다는 것입니다.



빼곡하게 적힌 것이 1991년 대륙 한 쪽에서만 일어난 전쟁 목록들입니다.


  

   왜 인간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까요? 이런 저런 책을 뒤져보던 중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전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돈 없이는 절대 전쟁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쟁을 하는 이유를 "평화 때문"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인간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사람을 죽이는 무기들을 만들고, 실제로 그 무기들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 이유가 평화에 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여서 얻는 평화를 얻기 위해, 옆 나라를 쑥대밭을 만들어서 얻는 평화를 얻기 위해, 오늘도 무기를 만들고 사고 팝니다. 싸움 잘하는 애 한 명 때문에 반 아이들이 쉬쉬 하면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반을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겠습니다.


  오늘날의 평화는 견제를 통해 얻는 균형입니다. 그래서 인접 국가가 만약 핵을 보유하고 있다면, 자국에서도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이웃 나라가 핵이 2개면, 우리도 2개여야 합니다. 그러다 한 쪽이 3개가 되면 다른 한 쪽도 균형을 맞춰 3개를 준비합니다. 괜찮습니다. 균형을 맞추면 평화니까. 서로 사이좋게 균형을 맞추다가 지구는 점점 거대한 무기고가 되어 갑니다. 한 방만 터져도 치명적인 핵탄두가 지구에 무려 5만개가 있습니다. 다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균형을 위해서입니다.


  강력한 국방력을 갖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일까요? 한 해 어마어마한 돈이 국방비로 지출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힘이 세지 않으면 평화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을 위해서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되는데 지구 반대편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죽습니다. 오히려, 돈이 많은 국가들에서는 무기를 만들고, 또 그 무기들을 제3세계 국가에게 팝니다. 내전을 겪는 나라들도 힘을 통해 평화를 얻으려다 보니, 힘을 가지고 저항하는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죽고 죽이는 게임이 위험하고 가난한 지역을 만듭니다.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전쟁, 기아, 굶주림, 빈곤을 다 끌어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다케나카 치하루는 세계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 분리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서구 세계는 안전하고 풍요로운 지대입니다. 우리나라도 안전하고 풍요로운 지대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는요? 가난하고 위험한 지대입니다. 이슬람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전하고 가난한 지역'이라던가, '위험하고 풍요로운 지역'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과 안전은 같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에서는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 폭력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안전하고 풍요로운 지대는 더 안전해지고 풍요로워 집니다. 위험하고 가난한 지대는 더 위험해지고 가난해집니다. 그 두 지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집니다. 전쟁, 기아, 굶주림, ,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이 관계 아래서 긴밀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맞물려 있으나, 철저하게 한 쪽의 이익을 위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무기를 팔아 얻은 돈의 100분의 1도 안되는 돈으로 구제를 해주면서도 평화를 운운합니다. 뭔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이 판도를 뒤집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이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될까요?



  

  그런데 어느 날 위험하고 가난한 지대에서 안전하고 풍요로운 지대의 중심을 공격해 왔습니다. 분리되었다고 생각했던 양쪽이 폭력이라는 가장 거친 방법으로 마주쳤습니다제국이 약속한 평화는 제국의 중심에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그렇게 악을 추적하던 우리의 여정은 다시 첫 번째 그림으로 돌아왔습니다.





2. 제국과 평화





  

  고대에 '바벨론'이라는 국가가 있었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점령하고, 마침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쥐게 된 국가입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 역시, 우리가 지난 번에 살펴본 이집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도 수메르 신화를 가져와서 만든, 바벨론 이야기(에누마 엘뤼시 신화나 길가메시 서사시가 바벨론의 신화입니다.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시면 대강의 내용을 알 수있습니다)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이야기 안에서 지배를 공고히 하는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생산했습니다. 그 안에서 국가의 지배가 신격화 되었고 그 신격화된 국가의 지배 아래 이웃 국가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렇게 바벨론은 국가를 다스리는 초()국가,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바벨론 왕은 마르둑의 계승자로서의 자격을 갖습니다. 거짓 이야기는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 시켰습니다. 바벨론은 그 신화 안에 등장하는 신들을 숭배하면서, 그 신적인 존재가 다스리는 국가의 승승장구를 약속했습니다. 바벨론의 득세는 곧 그들이 추구하는 신의 득세요. 바벨론이 거대한 제국이 되어버린 현실은, 그 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국의 강력한 힘 아래서 평화를 말했습니다. 제국이 통제하는 세상 안에서의 안락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말하는 평화는 주변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서 얻는 평화였고, 힘을 통해 상대를 압제하는 평화였기 때문에, 국경 근처에서는 언제나 전쟁이, 국가 내부에서는 전쟁준비를 쉴 수 없는 평화였습니다. 전쟁을 동력으로 끊임없이 성장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국경에서는 누군가가 치열하게 싸우고, 정복하고, 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 판국에 아브라함 자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브라함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우리나라처럼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 중에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시리아라는 바벨론 이전의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남 유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유다는 '바벨론 안에서의 평화냐' '바벨론과의 전쟁이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은 용감하게도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선에게로 돌아섰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에 함께 맞서는 이집트와의 동맹을 든든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의 별명은 '부러진 갈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붙든 남유다는, 그렇게 부러졌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성전은 돌덩이가 되었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와 바벨론이라는 양 제국의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분쇄되어 버린 것입니다


  제국을 만난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그렇게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재사회화 되기 시작합니다. 바벨론 안에서, 제국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국의 이미지들을 보며, 제국의 평화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맛이 어찌나 단지, 후에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는 신의 명령에도, 그저 바벨론에 눌러 살고 싶은 포로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강한 힘이 가져다주는 안락을, 이스라엘조차 평화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추구했던 '제국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의 마지막이 다니엘서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벨사살은 난공불락의 성을 믿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안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군사력과 재력으로 얻은 제국 바벨론의 평화를 끝까지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바벨론은 새롭게 일어난 제국, 페르시아에게 박살이 났습니다. 마치 바벨론 이전에 앗시리아가 멸망했던 것과 같이, 바벨론 역시 동일한 제국의 종말을 맞았습니다. 제국이 보장하는 평화가 그렇게 허무하게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를 살펴볼 때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어떠합니까? 브라이언 왈쉬와 실비아 키이즈 마트는 제국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중앙집중화된 권력에 바탕을 두고, 사회경제적 군사적 통제 체제에 의해 그 안전이 보장되는 체제이다"  제국의 특징은, 가운데 권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돈과 힘으로 안전을 보장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의로 볼 때, 오늘 날 이 시대의 제국은 어느 나라일까요?



  

  반미감정을 만드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전세계의 국제 정치가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의 관계 아래서 전쟁과 평화가 논의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힘과 자금으로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평화인지는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지금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휴전상태입니다. 아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에게서 전쟁은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보호아래 말입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세계의 정의를 위한 경찰이라 자부합니다만, 그들은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제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을 통해 세계평화가 지켜진다는 환상이 헐리우드 영화들을 통해 계속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아마겟돈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거 다 예전에 고대 제국들이 이미 했던 것들입니다. 고대 제국들도 자신들의 돈과 힘 아래서 평화를 논했습니다. 제국의 힘을 믿게 하는 우상들을 계속 만들어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제국을 의지하거나, 아니면 제국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국은 인류를 결정적인 순간에 실망시켰습니다. ''이 없는 제국은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누군가를 힘으로 제압해서 얻으려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얻는 평화는 더 큰 힘이 나타날 때, 가면을 벗고 무능력의 맨얼굴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평화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외교와 무역을 통해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평화를 얻으려 한다면, 평화의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서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무언가 대단히 착각한 것입니다. 답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작용은 반작용을 불러옵니다. 영원한 작용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의 거대한 반작용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은 불안한 평화의 상태, 아니 평화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 그리고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지금이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추구해야 할 때입니다. 제국은 할 수 없는, 인류가 반드시 경험해야 할, 진정한 평화 말입니다. 죽어가는 누군가가 있어야 얻을 수 있는 평화 아니라, 그 너머의 진정한 평화를.




3. 악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악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해왔습니다. 이것들을 키워드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에덴에서 : [내면의 악], [절대선]

  인간 내면에서 찾았던 악은 곧 절대선으로부터의 소외였습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요즘 시대에는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절대'라는 말, ''이라는 말에 대해서, 각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니까요. 상대주의적인 관점이 건강한 관점이라 여겨지는 시대니까요. 그러나 절대적이면서도 선한 무언가를 부정한다면, 인간은 상대적으로 선하거나 상대적으로 악한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선과 악은 그냥 악입니다. 때때로는 선하고 때때로는 악한 사람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데아 우르에서 : [사회적 악], [우상], [이야기], [], [섹스], [권력]

  2편에서 다뤘던 것은, 내면의 악이 어떻게 사회적 악이 되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절대선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리고 그것의 추구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육체가 원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 자신이 선과 악의 판단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욕구는 무제한의 욕망이 되었고, 인간들의 욕망이 모여 이야기와 우상의 형태로 사회에 만연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 [국가적 악], [우상], [이야기], [지배], [광고], [소비문화]

  우리는 이집트에서 국가적 악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상이 만연된 사회에서 국가가 태동했고, 그 국가 역시 우상들과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권력 앞에 인간됨을 잃었습니다. 날마다 고역으로 울부짖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국가적 형태의 악의 피해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의 국가에 만연해있는 소비문화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소비문화의 이야기 역시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 이미지들은 다시 그 이야기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무언가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결과는 사람보다 귀해진 상품입니다.


-바벨론에서 : [제국적인 악], [우상], [이야기], [제국], [폭력], [전쟁], [평화]

  국가적 악은 커져서 초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서, 국가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서, 국가가 국가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 안에서 돌아가는 매커니즘은 똑같습니다. 거짓된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제국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약속합니다. 제국의 강력함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 속이고, 사람들은 제국의 강력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제국의 국경에서는 계속 폭력의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끝내는 제국 역시 폭력의 피해자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요? 내면적인 악? 사회적인 악? 국가적인 악? 제국적인 악?


  2차 세계 대전. 히틀러가 전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유대인들이 600만명이나 학살당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홀로코스트라고 부릅니다. 이 때,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유대인 학살을 처리한 독일 장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이 사람 이름이 아이히만입니다.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전범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회부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한나 아렌트라는 여자 철학자가 법정에서의 일들을 기록해서 책으로 낸 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전세계에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쟁점은 어디에 있었냐하면,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유대인을 학살의 중책을 맡은 아이히만이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가장이었고, 평범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이 가진 이상대로, 위에서 명령한 것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극악무도하거나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이히만에게 있어서는, 한 때 자신이 '의무'라고 여겼던 것이 이제는 '범죄'로 불리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단지 말이 바뀐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인류에 대해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던 아이히만은 '끔찍하게도 또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평범하다는 것이 선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아침에 부인과 뽀뽀하고, 아이들을 번쩍 안아준 다음 출근 하겠죠. 그러나 그 사람이 일하는 곳이 전 세계 종자를 저당 잡는 몬산토일 수도 있고, 무기 산업을 하는 도요타일 수도 있고, 3세계 아이들을 착취하는 뉴발란스일스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하고 보통사람들이지만, 악에 언제나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우리는 악에 참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도둑질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여한 이 사회가 살인과 도둑질의 결과를 낳고 있다면, 우리는 거대한 죽음의 움직임에 참여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 자체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하에서 노를 젓고 있는 배가, 누군가에게 대포를 날리고 있다면, 노 젓기를 멈추고 갑판 위로 올라가봐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총체적인 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악에서부터, 제국이 누군가를 짓밟는 살인의 현장까지 악은 총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모든 악의 형태는 인간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적인 악이든, 사회적인 악이든, 국가적인 악이든, 제국적인 악이든, 이것들은 인간을 거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악은 인간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인간이 결정과 선택 없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가치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던 개인들과, 현실을 가리는 거짓된 이야기와 이미지들을 만들고,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살았던 사람들과, 소비문화가 가져다주는 이미지들에 빠져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과, 미국이 정의라는 헛된 이야기를 믿고 힘의 추구를 긍정했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먼 나라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아무런 감흥없이 바라보고 있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니 우리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모든 다양한 악의 차원들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살인자의 몽타쥬입니다.


모든 차원의 선과 악은 ''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바꾸기에 개인은 너무나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에 비해 사회와 국가와 제국의 구조는 너무나 단단해 보입니다. 무언가가 잘못 되어있고,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나, 아무도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평범한 개인들이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선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4. 상징과 이야기


    예전에 노브레인이 일본 공연가서 욱일승천기를 찢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저 빨간 점이 들어간 천조각을 찢었을 뿐인데, 일본 사람들은 이 사건에 격노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다 건너 한국 사람들은 내심 통쾌해했습니다. 인터넷 뉴스 기사들이 이 사건으로 도배가 되었었죠. 작년 일이네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천조각을 찢은 상징적 행위 뒤에는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 밑에서 36년간 고생했던 이야기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한민족은 저 자신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가지고 저 사진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이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일장기를 찢은 행위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성취를 위해 살았던 자기 아버지, , 오빠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가지고 어떠한 행위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해석에 따라 반응합니다.


  우리의 삶은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예들은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엄지 손가락을 올리는 행위 마저도 상징적이니까요. 더불어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로 상징들을 이해합니다. 그 뒤에 어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엄지 손가락을 올리는 행위는 칭찬으로도 해석되기도 하고, 욕으로도 이해되기도 합니다.상징과 이야기이것은 너무나 광범위한 이야기입니다광고역사문화학문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인간 역시 하나의 상징이고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그 사람이 어떠한 이야기를 살아왔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상표들은 하나의 상징입니다광고들은 그 상표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그 이야기가 상표에 대한 느낌을 결정합니다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십자가는 하나의 상징입니다그러나 그 십자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릅니다누군가는 십자가를 혐오하고누군가는 십자가를 보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음모론도 마찬가지죠음모론이 인기 있는 것은음모의 이야기가 현실의 상징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왜 리얼 버라이어티가 인기있을까요그것들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상징(인물)들에 대한 느낌과 해석의 틀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연애인들의 가짜 결혼 이야기가그 연애인을 그 이야기에 따라서 해석하게 하듯이 말입니다조권이 우결을 언제부터 안나왔는데요새도 조권 기사 댓글에 보면 가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사람은 이야기의 프레임으로 상징들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각각 상징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있고, 너무나 많은 해석의 틀이 있습니다. 어떤 한 가지 사건에 대한 각양각색의 해석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러나 해석들이 많다고 해서 그 해석들을 다 쓰레기통에 넣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해석 자체를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세상의 무수한 이야기 중에 분명히 옳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고, 비인간화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가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상징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고, 현실을 올바름으로 돌려놓는 진짜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이야기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장은 답을 찾지 못해도, 내가 지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분명하게 지시해주는 이야기 말입니다.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알면, 거짓되고 허위로 가득한 이야기와 상징들을 분별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악에 대한 내용들은 모두 이야기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누군가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했고, 인간에게 헛된 것을 따르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는 이미지들을 만들고, 이미지들은 다시 이야기들을 강화시켰습니다. 누군가는 거짓된 이야기들을 만들고, 사람들을 그 안에 가두었습니다. 이야기에 갇히면 그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주기 전까지 말입니다. 빛이 있기 전에는 어둠을 알 수 없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빛입니다. 새로운 해석의 틀입니다. 세상을 보는 다른 눈입니다. 삶에 대한 다른 태도입니다. 개인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제국에 대해서, 그리고 악에 대해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 누군가를 이용하기 위한 속임과 허위가 없는 진짜 이야기.


  당신은 어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랩퍼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현대는 광고와 구라의 시대라고. 이 광고와 구라의 시대에 살고 있는 당신은 진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이야기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정직한 도구로 기능하고 있습니까만약 우리가 하나의, 진실의 이야기를 공유한다면, 우리는 현실의 상징에 대한 같은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 안에서 함께 움직일 수 있습니다. 허위를 드러내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진짜 이야기가 허망한 이야기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안겨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추구하던 이야기가 마침내 현실로 드러난다면? 이것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5. Q&A


Q. 진짜 이야기. 진짜 이야기 하는데, 그럼 다른 이야기는 가짜라는 것입니까?


A. 생각해보세요. 사랑의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옳다는 사실은 알지만, 왜 사랑해야 하냐고 물으면 답변하기 곤란해 합니다. 자신의 생애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짧은 생애 속에서 찾을 수 없는 답인지도 모릅니다. 사랑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정의, 진실, 공평, 평화, 아름다움. 우리가 옳다고 끄덕이는 모든 것들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절대선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그 참된 이유를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는 인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선한 역사 안에 있음을 확증하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절대선과  상관없는 이야기들은 인간을 사랑하게도, 진실하게도, 공평하게도 할 수 없습니다


Q. 그럼 그 진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있습니까? 세상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중에 당신의 이야기만 진짜입니까?


A. 그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복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저의 자격이 아니라 절대선의 자격에 근거해서 진실합니다. 세상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나,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라면, 모두 이 복음이야기에 빚져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선이 승리할 것이라는 역사적 이야기가 복음인데, 사실 우리는 야구를 볼 때는 9회말 역전 만루홈런을, 탐정물을 볼 땐 막판에 진실이 드러나기를, 드라마를 볼 땐 해피엔딩을 기대하거든요. 이 모든 것들은 복음이라는 역사적 이야기에 빚져있는 것입니다.


Q. 그 복음이 악의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복음이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A.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인간이 겪는 모든 차원의 악에 대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대선의 선한 역사는 악의 해결을 포함합니다. 절대선은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차원의 악에 대한 해결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기쁜 소식이죠. 


Q. 나는 이미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에게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악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입니까?


A. 두 가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복음이 복음이 아닐수 있습니다. ,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요약되는, 예수 믿어서 사후 세계에 가는 것을 복음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만약 사후 세계에 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현실의 문제에 최선을 다할 이유가 없을테니까요.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당신이 복음을 진정으로 알고 있지만, 그 복음의 이야기를 가지고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을 경우입니다. 복음은 내세용이기 이전에 현실용입니다. 복음은 현실을 이해하고 정의를 추구하게 하는 창입니다. 더불어 그것의 연장선에서 내세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떠한 명제를 마음 속에 품고 내세를 기다리는 보험이 아니라, 그 복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 복음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악의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해답이 될 것입니다. 악보를 달달 외우고, 건축 도면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피아니스트가 되고 건축가가 되는 것이 아닐테니까요. 피아노를 쳐봐야 피아니스트고, 건축가가 집을 지어봐야 건축가입니다.


Q. 그런데 왜 그 복음이 '이야기'여야 합니까? 명제의 형태로는 부족한 것입니까?


A. 신약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구약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 말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구약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구약 이야기가 복음을 바르게 해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채워주는 말 그대로 기쁜소식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시대가 '서사의 부재'를 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의 문제이지, 정말 이야기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수들은 가사에 자기 이야기를 담는 사람들이 가수입니다. 저는 김광석씨를 좋아하는데, 그 가사를 읽어보면 자기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런데 요즘 가수들은 가사에 자기 이야기를 담지 않습니다. 가사에는 자극만 있을 뿐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럼 이 시대가 정말 이야기가 없는 시대냐, 아닙니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만, 가사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이 가수들의 이야기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현상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자기 마음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안에 깔린 이야기를 살려야 합니다. 명제로 주어지는 복음은 다양한 이야기(맥락)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생겨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정작 복음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명제가 아닌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야 하는 것은, 정확한 복음의 의미를 살리는 일입니다.


Q. 그럼 복음은 어떠한 '이야기'입니까?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과 정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이 글의 서두에서 저는 이 글을 쓰는 목적을 밝히겠다 했습니다. 이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정의’. 악으로 범람하는 세계 속, 물 위를 걷는 방법을 함께 찾자는 것입니다허나 갈 길이 멉니다. 이 글은 수정이 필요한 v 1.0입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교재화 작업을 구상중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질문과 의견들이 보태지면 함께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다음 주에  <이 사람을 보라> 로 찾아오겠습니다.


2012 6 20

윤재덕 드림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