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겪고 있는 '자율적 소통 불가능성'

 

누구도 '나와 너'의 만남을 제한하지 않지만,

현시대를 사는 우리는 스스로 그 만남을 거절하고 있다.

언제나 연락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준비 되었지만,

오히려 '그 언제나 연락할 수 있음'이 서로 연락할 수 없게 만들고,

끊어지지 않는 그 연결이,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내버려두게 한다.

 

예전 영화 <싱글즈>에서 보았던, 김주혁과 장진영이 공항에서 헤어지던

그 단절의 애뜻함을 오늘날 우리는 구현할 수 없다.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고, 그 애뜻한 그리움에 사무칠 수 있었던 것은,

'단절'이라는 배경/환경/현실 때문이었다.

소통 불가능한 환경이, 소통을 그립게 만들고,

환경이 주어지는 것 자체는,

그리워 하는 사람이 타인에게 말을 건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 다모임이 생기자마자 내가 그 친구에게 연락을 받았던 것처럼)

 

그러나 소통망으로 뒤덮인 현시대 속에서

우리는 단절 가능성을 박탈당했고,

그 안에서 단절은 환경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 마음이 되었다.

도시 안에서 단절의 환경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워하면서도 어떠한 계기도 만날 수 없다.

이제 도시인에게 있어 단절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만 현실화된 것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와중에 자율적으로.

 

자율적으로 타인과의 소통을 그만둔 인간은 어디로 향하는가.

현시대는 스텍타클의 시대이다. 눈의 만족을 좇으며 직접 경험은 지연되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장 유대로 내려가 드러내라(요한복음 7:3)' 라는

예수에 대한 예수 형제들의 윽박지름은 스펙타클 안에서의 윽박지름과 같고,

(드러낼 것이 있으면, 모든 것을 이미지화 해야 한다)

예수와의 직접 경험 속에서도 표적의 이미지를 원하는 음란함은 

현시대의 기본 조건이 되었다(마태복음 12:39, 16:4).

 

  자율적 소통 불가능성 속에서, 스펙타클에게 넘겨준 언어 

  다시 너와 나의 언어로 가져올 수 있을까?

  (웜바디스, 귀멸의 칼날은 예시 혹은 단초가   있나). 

  

  JUSTHIS의 welcome to my home에서

'너는 내가 필요하냐'와  '너는 내가 절실하냐'를 구분할 때,

이 둘의 사이에는 '선'이 그어져있고, 부사로 하면 "정말" 하나 뿐이지 않은가. 

우리가 스펙타클로 전이된 언어를 다시 가져와서, 

성육신적 존재와의 관련성을 통해서,

너와 내가 선을 넘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서로에게 절실할 수 있을까?

 

**

  500년 전 종교 개혁이

1) 성경의 바른 해석 2) 혁명 3) 새로운 조직 구성

의 도식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신화에 지나지 않다면(로드니 스타크),

(사실 이전부터 구체제는 허물어지고 있었고, 종교개혁은 그에 편승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면)

혁명의 구상의 무대는 글자의 해석이 아니라,

글자 자체에 대한 사용 방법/접근 방식의 전환 아니었을까? 

금지된 글자에 대한 접근 가능성과

글자의 유포를 가능하게 한 기술 발전이 아니었을까?

해석은 떠나서/자유롭게 맡겨두고서.

 

다시 말해 글자와 실천 사이에서 혁명을 사유한다는 것은,

글자 자체의 해석 혁명이 아니라, 글자 자체의 사용방식/접근 방식에 대한 혁명이 아닐까?

사용방식의 전환 위에서만, 새로운 해석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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