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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37, 개인번역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각각은 나를 향하여 도래하게 될 것이다(ήξω),
그리고 나를 향해 가는 사람을 나는 결코 밖으로 던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하늘로부터 나의 것인 욕망을 하려고 걸어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나를 보내셨던 이의 그 욕망을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를 보내셨던 이의 그 욕망인데,
이는 나에게 주셨던 모든 각각을 내가 그 자신으로부터 멸망시키지 않을 것을 위함이요,
오히려 내가 그를 그 끝날에 다시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다.

-메시아 예수께로의 도래는 미래형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예수를 향해 갈 수는(ερχομαι, 현재형) 있다. 이 구절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이들이 밤새 예수를 찾다가 그이의 집에 이르렀고, 그들이 모르게 바다를 건너 귀가하신 예수를 맞닥뜨린 장면이다. 예수를 향하여 '갈' 수는 있으나, '가고 있음'은 '도래함'의 차원과는 다르다. 제자도의 과정(길)을 거쳐, 그이와 같은 운명 속에서 사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말리지 않는다. 여기서도 "걸어 내려오다(καταβαινω)"가 등장하는데, 이 동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예수는 지금 자신을 향해 오는 사람들과 함께 그 하늘로(시온으로) 향하고자 한다. 즉, 함께 도래자가 되어 도래하고자 한다(이것이 '예수께로의 도래'이다).

-그러나 예수를 찾아 '왔던' 이들은 그와 함께 도래하지 못하고 스스로 돌아가는데, 예수는 멸망("잃어버리다"로 번역되어 있으나 동사는 απολυμμι의 미래형이다) 이 '그 자신으로부터(εξ αυτου)' 이뤄질 것이라고 말씀한다(그러나 이 멸망은 예수를 탓할 수 없다. 마태복음 18:7). 예수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 이들은 돌아가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치고, 이어 로마와 충돌하려는 유대의 군대가 될 것이다. '스스로 도래'가 아닌, 걸림돌(σκανδαλον)이 될 것이고,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

-39절의 "그 끝 날"은 마가에게 있어서 다시 일어나는 주체와 함께 하는 시간, 곧 "셋째 날에"일 것이다(마가복음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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