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많은 군중은 그 유대인들로부터 그이가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왔는데 예수 때문만이 아니라, 죽은이 들로부터 일어난 나사로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성전아르케들은 그 나사로를 죽이기 위해 회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이들이 나사로를 통해서 이끌려서 예수 안으로 신실해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 많은 군중은 그 축제 안으로 들어갔고, 예수가 예루살렘 안으로 왔다는 사실을 들었다, 나무들로부터 그 가지들을 취했고 그이와 마주치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소리쳤다.
"호산나! 좋은 말 받는 이, 주의 이름 안에서 오시는 이,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
그런데 예수는 작은 나귀를 발견하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기록되어 있는대로,
"두려워 말아라, 딸 시온아. 보라, 너의 왕이 온다, 어린 나귀를 타고."
이것들을 그이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께서 뚜렷이 드러나셨을 때 그때서야 알게되었다, 이것들이 그이에 대해 기록되었던 것이고 이것들이 그이에게 창조되었단 사실을. 그래서 그이와 함께 있던 군중은 그이가 나사로를 그 기억소로부터 불러냈다는 사실과 죽은 이들로부터 그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이 때문에 군중은 그이를 맞았다, 왜냐하면 그이가 바로 이 표적을 행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 자신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은 보십시오,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사실을. 보시오, 코스모스가 그이 뒤로 돌아갔소."
[2]
그런데 어떤 희랍 사람들이 그 축제에 경배하기 위해서 걸어 올라온 이들로부터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갈릴리의 벳사이다 출신인 필립에게 갔다, 그리고 그에게 요청하며 말했다.
"주여, 우리가 예수를 보기 원합니다."
필립이 가서 안드레에게 말했고, 안드레와 필립이 가서 예수께 말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하며 말씀하셨다.
"때가 왔다, 그 사람의 아들이 뚜렷이 드러나기 위하여. 아멘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만일 곡식의 알갱이가 땅 속으로 죽지 않으면 꼭, 그것은 홀로 머문다. 그런데 만일 죽으면 꼭, 많은 열매를 가져온다. 자기 호흡을 우정하는 이는 그 호흡을 멸망시키고, 바로 이 코스모스에서의 자기 호흡을 미워하는 이는 오는 시대 속으로 그 호흡을 지킬 것이다. 만일 나에게 누군가 섬긴다면, 그는 나에게 따라 올지라, 그리고 내가 가는 어디든지, 나를 섬기는 이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만일 누구든 나에게 섬기면, 아버지가 그를 인정해주실 것이다. 지금 나의 호흡이 괴로워한다, 그러니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 나를 이 시간들로부터 온전하게 하소서,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내가 바로 이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뚜렷이 하소서."
그래서 그 하늘로부터 소리가 왔다.
"그리고 내가 뚜렷해졌고, 그리고 다시/새롭게 내가 뚜렷해질 것이다."
그래서 군중은 서서 듣고 말하길, 천둥이 있었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말하길,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다. 예수께서 대답하며 말씀하셨다.
"나를 통해서 바로 이 소리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을 통해서 (되었다). 지금 심판이 이 코스모스에 속해있다. 지금 바로 이 코스모스의 아르콘은 밖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만일 이 땅으로부터 들려지면, 모든 것이 나 자신을 향해서 이끌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사망으로 죽으실지를 나타내시며(σημαινω)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이에게 군중이 대답했다,
"우리는 토라로부터 메시아가 오는시대 속으로 머문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당신이 그 사람의 아들이 들려져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께서 말하셨다.
"작은 크로노스 동안 그 빛이 너희들 안에 있다. 너희들이 그 빛을 가진 것처럼 걸어라, 이는 어둠이 너희들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어둠 안에서 걷는 이는 자신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들이 그 빛을 가졌듯이, 너희들은 그 빛 속으로 신실하라, 이는 빛의 아들들이 되기 위함이다."
이것들을 예수는 말하셨고, 그리고 떠나서 그들로부터 숨으셨다.
[3]
그런데 이러한 표적들을 그이가 그들 앞에서 만드셨음에도 그들은 그이 안으로 신실하지 않았다, 이는 그 예언자 이사야의 로고스가 이루어지기 위함이었다, 그가 말했다.
"주여, 누가 우리를 들음으로 신실해졌습니까? 그리고 주의 팔이 누구에게 드러났습니까(αποκαλυπτω)?"
이 때문에 그들은 신실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시/새롭게 이사야가 말했다.
"그들의 두 눈을 멀게하셨고 그들의 그 가온을 덮으셨다, 이는 그들이 두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그 가온과 돌아섬으로 알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것들을 이사야가 말했다, 왜냐하면 그이의 그 뚜렷을 그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이에 관해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그 아르콘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이에게 신실했다, 그러나 그 바리새인들을 통해 동의하지는 못했다, 이는 회당으로부터 쫓겨난 이들이 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들의 그 뚜렷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뚜렷을 위한 것보다 더. 그런데 예수는 소리치며 말씀하셨다.
"내 안으로 신실한 이는 내 속으로 신실한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보내신 분 속으로 신실한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본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바로 내가 이 코스모스 속으로 비춰진 빛이다, 이는 내 속으로 신실한 모두가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만일 누군가 그 이야기들로부터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 코스모스를 심판하기 위해 오지 않고, 오히려 이 코스모스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나를 밀어내고 내 이야기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가 스스로를 심판함을 갖는다. 내가 말했던 말씀, 그것이 그를 그 마지막 날에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나로부터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직접 나에게 계명을 주셨다, 내가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안다, 그분의 그 계명이 오는시대의 삶이라는 것을. 그래서 내가 이것들을 말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와 같이 나도 말한다. "
[1]
나사로 사건 이후 이야기입니다. 이 충격적신 사건의 주인공인 나사로를 보기 위해 많은 군중이 몰려왔습니다. 이 '군중'이란 단어는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단 한번도 이 단어를 에클레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바울은 '라오스'를 씁니다).
제가 '성전아르케'라고 투박하게 번역한 단어는 '대제사장'입니다. 우리가 봤던 8장에서 '아르케'는 중요한 논쟁 주제였지요. '근원, 시작, 세력, 통치, 힘'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는 저 아르케를 놓고 인간은 끝없이 다퉈왔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아르케들은 자신들이 아르케로 남기 위해 이제 나사로를 죽이고자 모의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를 통해서 예수께로 이끌리는 것이 왜 이들에겐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 축제"는 바로 초막절입니다. 이 날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텐트치고 살았을 때, 하나님의 텐트가 이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날에는 나무가지를 꺾어서 마당에 텐트를 만들고, 거기서 지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자, 사람들은 나무 가지들을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이 말은 시편 118:25,26에서 온 말로, "구하오니, 구하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시편은 포로기 끝에 다시 이스라엘을 찾아오실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찬양이었습니다. 초막철 때처럼, 다시 이스라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사시길 바라는 찬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화답하듯 나귀를 타셨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열광했을겁니다.
스가랴 9: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어찌 이루어졌는지 제자들은 나중에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나중이란 "예수께서 뚜렷이 드러나셨을 때"입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뚜렷은 곧 십자가입니다. 벧엘의 사다리가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의 비유풀이를 몰라서 예수님을 몰라봤다는 신천지의 주장은 거짓이지요.
'기억소'라 번역한 말은 무덤을 가리킵니다. 나사로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무덤으로부터 바로 그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이 소식이 군중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이 모습을 보던 바리새인들은 낙담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바리새'는 '분리된'이란 뜻이고, 이 이름 자체가 일반인과는 다른 계층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코스모스가 그이 뒤로 돌아갔을 때, 그 분리의 의미는 희미해졌습니다.
[2]
외국인들 중에서도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사실 유대인은 본래부터 혈통이 아니라, 토라를 지키겠다고 하면 누구나 유대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희랍 사람들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를 보기 원한다고 요청했습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이 이야기를 제자들을 통해 직접 들었던지, 그 광경을 보았던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빌립에서 안드레로, 그리고 안드레와 필립을 통해 예수로 그 말이 전달되는 자세한 과정을 기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외국인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동문서답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는 인자가 뚜렷이 드러날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신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외국인들마저도 예수를 찾을만큼 그이는 유명해졌고, 이렇게 유명해진 예수를 성전아르케들은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외국인들의 방문을 통해 예수는 더욱 위기를 느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씨앗에 비유합니다. 많은 열매를 가져오기 위해 죽는 알갱이 하나로서 자신이 죽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이의 죽음은 이 악한 코스모스에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이 악한 코스모스에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아르케가 되어보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이의 죽음이 가져다 준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호흡이 괴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호흡이 괴로운 중에 온전함을, 곧 괴로운 중에 "바로 이 시간 속으로 들어감"을 기도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뚜렷이 드러나기를 바라며 말입니다.
그때 하늘에서도 화답이 들려왔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의 기도대로, 하나님이 뚜렷하게 드러나실 것이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리를 사람들은 말로 듣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는 천둥소리로, 누군가는 천사의 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뚜렷"의 메시지를 들은 예수는 이 메시지가 바로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뚜렷이 드러나실텐데, 그것은 곧 심판입니다. 만일 이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면 이 하나님 뚜렷의 소식은 좋을 것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 심판은 "이 코스모스의 아르콘"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아르콘'이란 말은 '아크케를 가진 자'입니다. 이 아르콘이 밖으로 던져질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2장) 그리고 예수께서 이 땅으로부터 들려지면 반드시 모든 것이 예수께로 이끌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블랙홀로 모든 것이 빨려들어가듯, 예수를 통과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이 말씀을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으나, 당시 이해하지 못하던 군중들은 메시아와 오는시대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인자의 들림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크로노스가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얼마 남지 않은 크로노스동안 빛이 너희들과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얼마 남지 않은 크로노스 속에서 어둠에 압도되지 않으려면, 빛을 가진 것처럼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을 가진 것처럼 걷는 것과, 빛 속으로 신실한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빛을 가진 것처럼 걷는 이가, 마침내 빛 속으로 신실하면, 그는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는 숨으셨습니다.
[3]
예수의 표적은 단순히 기적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이의 모든 말과 행동이 모두 표적이었습니다. 무언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도 그이에게 신실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들에 대해 이사야 6장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눈과 마음을 가려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이사야 6장에보면,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가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고 쓰여있습니다. 즉 요한이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저 예수께 신실하지 않은 이들이 버림받았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가 되면, 곧 메시아 예수께서 뚜렷이 드러나시면, 다시 말해 인자가 들리면, 그때 저들 마저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아직 이때는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은 이사야가 '그이'의 뚜렷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즉 이사야는 예수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전까지는 깨닫지 못한다고 했지만, 제사자들 중에서는 많은 이들이 예수께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그들이 이룩한 분리의 담이 무너져내릴 때, 그들은 예수를 따르다가 회당공동체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이것이 "사람의 뚜렷"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자신이 심판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코스모스로 오신 목적은 온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심판은 예수가 주지 않고 본인이 자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말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스스로를 심판합니다. 그 심판이 이뤄지는 날이 "마지막날"입니다. 즉 예수의 말에 따라 자아가 분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나와 너의 분리에서 살던 인간이,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면, 그 말에 따라 살지 못했던 과거의 나와, 그 말에 따라 살고자 애쓰는 현실의 나로 분리됩니다. 이 두 자아는 투쟁을 거듭해나가면서 결국 인격은 메시아를 닮아갑니다. 이 메시아를 닮아가는 인간은 나와 너를 분리시키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그 계명은 바로 '오는시대의 삶'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