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름 붙이기

  인간은 신으로부터 '이름 붙이기'를 사명으로 위임받았고, '어떻게 이름붙일 것인가'는 인간의 모든 사유, 인간의 모든 문제, 곧 언어의 문제는 인간 문제 전체를 포괄한다. 인간은 언어적 존재요, 그 인간은 언어 없이는 어떤 것고 숙고할 수 없다. 에덴에서 이름붙이기를 시작한 아담은, 오늘날 우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름을 붙여가며 세상을 언어의 그물로 포착한다. 아니, 세상 자체가 곧 언어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시간을 창조한다.


1. 메시아니즘에서 발견되는 두 개의 시간

  유대인들의 묵시문학 전통 속에서는 두 가지 시간이 발견된다. 하나는 '세계사적 스케일의 연대기적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중단시키는 새로운 시간의 개입'이다. 전자는 숫자 4와 관련된다. 네 금속으로 제국의 역사를 개괄하든지, 세계사적 스케일의 비인간적인 통치를 네 짐승으로 표현한다든지(스가랴 1:18~21을 보라).

  창조 이후 시작된 시간을 '크로노스(χρονος)'라 부른다. 이 시간은 타락했고, 이 시간 속에서 인간과 짐승 사이의 관계는 뒤집히고 질서는 전복된다. 이 연대기적 시간을 히브리어로 '올람하제'라고 읽는다. 그리고 이 올람하제를 중단시키는 새로운 시간을 '올람하바'라고 읽는다. 이 두 가지 올람에 대한 이야기가 메시아니즘이다. 메시아는 올람하제 위에 올람하바를 가져온다.


  히브리어 '올람(עוֹלָם)'은 '영원', '세상', '시대', '긴 기간' 등 다양하게 이해되는데, 메시아니즘은 이 올람을 두 개로 분열시킨다. 그리고 이 분열은 '이(this)'와 '올(to come)'의 간극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와 '올'의 구분은, 현실을 '이'로 읽으면서도, 그 현실을 개혁하는 새로운 '올'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대인은 그 '올'의 주인공이자, 짐승 같은 제국 중심의 세계사를 뒤집는 왕으로 메시아를 고대한 것이다.


  언어를 둘로 갈라 새로운 차원을 만드는 일, 이것이 메시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2. 메시아의 시간 속에서 분할되는 단어, '악'

  A.D. 1세기 유대인들은 줄곧 메시아를 기다렸다. 이스라엘 포로기 속에서 '시간의 끝(종말)'에 가까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고(다니엘과 같은 묵시문학의 영향 속에서), 그 시간의 끝을 가져올 메시아는 포로기를 종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메시아가 메시아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당대의 인식 속에서 두 가지 통과의례가 있었는데, 하나는 악과의 대결과 다른 하나는 성전 정화였다.


  올람하제는 악의 지배를 받는 시간이다. 메시아는 올람하제의 지배자를 처벌할 것이다.

  올람하제는 악에 의해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능욕당했던 시간이었다. 메시아는 그 성전을 다시 깨끗게 할 것이다.


  '성전'은 신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로 이해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살고 있는, 눈에 보이는 거처인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에 대한 이방의 경멸은, 히브리 민족이 믿는 신에 대한 경멸로 이어졌고, 성전은 무너지고 재건되며, 능욕받고 정화되기를 반복했다. B.C.587년 이스라엘 성전은 무너졌고, 페르시아 포로 기환기 때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이 재건된 성전은 헤롯에 의해 리모델링 되었다가, 다시금 A.D.70년 이스라엘과 함께 무너졌다.

  이런 성전을 다시 정화해서 신께 봉헌하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이었고, 시리아의 지배 속에서 성전을 정화했던 마카비 형제는, 메시아적인 의미로 이해되어 오늘날까지도 하누카로 기념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악'이라는 단어도, 앞에서 올람과 같이 분열된다. 당시 유대적 세계관에서 명명하던 '악'과 예수가 생각했던 '악'은, 글자는 같지만 전혀 다른 방향의 의미들로 분할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말은, 유대인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들은 올람하제의 수장인 '악'을 '로마제국'으로 읽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단어인 '멸망'을 예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읽고 있다.
     
요한복음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를 악으로 읽고 멸망을 두려워하던 대제사장과는 달리, 예수는 로마의 지배 아래서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멸망하지 않음은 예수 자신이 그들에게 주는 '영생'에 달려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영생을 받은 이들은 그 어떤 이도 다시 포로로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예수를 계승했던 공동체는, 자신들과 접해있는 대결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For we do not wrestle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the rulers, against the authorities, against the cosmic powers over this present darkness, against the spiritual forces of evil in the heavenly places.


πρὸς τὰς ἀρχάς, πρὸς τὰς ἐξουσίας, πρὸς τοὺς κοσμοκράτορας τοῦ σκότους τούτου, πρὸς τὰ πνευματικὰ τῆς πονηρίας ἐν τοῖς ἐπουρανίοις.

  이 구절의 특징은, 혈과 육은 단수로, 뒤에 나온 단어들은 복수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씨름은 개인을 상대하지 않는다. 아르케들, 엑수시아들, 어둠에 속한 코스모크라토르들, 하늘에 있는 악에 관계된 영들. 이것들은 무엇인가? 이 모든 단어들의 공통점은 '통치 정당성'이다. 모든 통치 정당성이 어둠 안에 있음이 밝혀졌고, 허위로 드러났다. 이 통치 정당성의 허위와 맞선다. 개인과 맞서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 지도자들도, 로마 제국도 예수 앞에서는 통치 정당성을 곧 잃어버릴 임시적인 권위들이었던 것이다. 유대인 역시,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위들이 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폭력을 수반했고, 그로 인해 자신과 타인의 살과 피를 파괴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싸움은 시간에 맡긴다. 저항하나 파멸에 손대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2:19~21, 개인번역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온전한 일을 앞서 생각하세요.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세요.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들이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사안을 맡기세요. 기록되기를,

  "원수 갚음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원수가 배고프거든, 언제든지 그를 먹이십시오. 만약 그가 목마르거든, 언제든지 그를 마시게 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여러분이 그 원수의 머리 위에 핀 숯불을 쌓아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정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세요.


3. 예수의 시간

마태복음 9:22, 개인번역
그리고 그 여자는 바로 그 시간으로부터 온전케 되었다.

καὶ ἐσώθη ἡ γυνὴ ἀπὸ τῆς ὥρας ἐκείνης.


로마서 11:5, 개인번역
그러므로 그렇게 그 지금 카이로스 안에서 남은자가 있습니다, 은혜의 선택을 따라."

"οὕτως οὖν καὶ ἐν τῷ νῦν καιρῷ λεῖμμα κατ’ ἐκλογὴν χάριτος γέγονεν·"


  구원은 올람하제로부터 벗어나 올람하바로의 이행이다. 신약성경은 새로운 시간으로의 전이를 '구원'이라 부르고, 메시아의 공동체는 새로운 시간 '안에' 있음이 줄곧 강조된다. 그리고 그 메시아의 시간 안에서 '악'은 임시성만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으며, 장차 아비소스에서 올라와서, 나중에는 멸망하여 버릴 자다.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창세 때로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짐승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것은, 그 짐승이 전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7~10

왜냐하면 그 무법의 뮈스테리온이 이미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억제하는 자가 지금까지 가운데로부터 되었습니다.
그 뒤에 무법자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를 주 예수께서 그이의 입의 숨결로 들어버리실 것이고
그이의 '파루시아의 나타남'으로 그를 무력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의 파루시아는 사탄의 작동을 따라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성경이 "잠시, 임시적"라고 번역하는 단어 προςκαιρος와도 관련되는데, 이 단어는 아직 카이로스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를 말하고 있다. 설령 카이로스를 갈망할지라도,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프로스.카이로스일 뿐이다.

마태복음 13:20,21, 개인번역
그런데 돌들에게 뿌려진 사람,
그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곧장 기쁨과 함께 그 말씀을 취한다.
그런데 그 자신 안에서 뿌리를 갖지 않고 오히려 일시적인데,
고난이나 박해가 있으면 금세 그 말씀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

2') 그런데 돌들에게 뿌려진 사람,

그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곧장 기쁨과 함께 그 말씀을 취한다.

그런데 그 자신 안에서 뿌리를 갖지 않고 오히려 일시적인데,

고난이나 박해가 있으면 금세 그 말씀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 



출처: http://jaeduggi.tistory.com/1082 [아, 우주는 겁나 우아하다!]

4. 아무 것도 바뀌지 않지만, 모든 것이 바뀐다.
 
고린도전서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메시아적 시간)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카이로스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골로새서 4:5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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