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해석 (1)
-창세기 28장 연구


0.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는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이 세 사람은 신을 대변하는 이름이 된다.


출애굽기 3: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세 사람이 일반인을 뛰어넘는 대단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계약에 있다. 신은 이 세 사람과 계약을 맺었고, 자신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 계약의 내용은 이러하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신이 지시하는 땅으로 갈 것". 우리는 지난 시간 이것이 생존을 포기하라는 신의 요구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신 때문에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전적인 신뢰를 요구받았고, 또 그 요구에 yes라고 대답하고 길을 떠난 이들이 이 세 사람이다. 신이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할 때, 신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은 이들과의 계약을 이뤄야 한다. 이들과 같이 신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살아가는 이들이 다수를 이뤄야 하며, 그 다수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아야 한다. 신은 반드시 이것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신약에 와서도.


마태복음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리고 우리는 이 세 사람 중 야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꿈 꾸는 자이고, 그가 꾼 꿈에 대한 해석이 성서 텍스트 전체를 관통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수면이란 내가 외계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 하지 않고 관심을 끊어버린 상태를 말한다...꿈은 결코 수면의 프로그램 속에 들어있지 않은 셈이다...꿈이란 실제로 경련과 비슷한 반응, 즉 육체의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정신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은 깨어 있을 때의 정신활동의 잔여물, 더욱이 잠을 방해하는 잔여물이 되는 셈이다."


  현대인은 성서 텍스트의 환상이나 꿈에 대해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실'로 판단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 프로이트의 말처럼 경련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프로이트 마저도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설혹 꿈을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꿈은 역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꿈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꿈의 존재를 어떻게든 설명해야 한다." 성서 텍스트가 전하고 있는 야곱의 꿈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꿈에 대한 존재론적인 접근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의 관심은 프로이트의 책 제목처럼 그 해석에 있다. 그의 책 제목처럼 꿈에 대한 해석 말이다.


1. 야곱의 꿈


  일단 그의 꿈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창세기 28:10~19, 개인번역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거기 돌들로부터 하나를 취해 

머리 두는 곳에 두었고, 거기 누웠다.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1) 그리고 보라, 사다리가 으로 고정되어 있고, 

그 사다리의 머리가 하늘들에 닿고 있었다.


2) 그리고 보라, 신의 천사들이 올라가고 있고 

사다리 안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3) 그리고 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 곧 너의 아비인 아브라함의 신, 곧 이삭의 신.

  네가 누워있는 그 을 너와 너의 씨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씨가 그 먼지처럼 많아질 것이며, 

  북쪽으로 또 남쪽으로 많아질 것이고, 

  그리고 그 의 종족 모두가 네 안에서 

  그리고 너의 씨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4) 그리고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며

  내가 너를 이 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했던 것을 내가 행할 때까지 

  너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야곱은 잠에서 깨나서 말했다. 


  "실로 여호와께서 이 곳에 계시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그리고 그는 두려웠고, 말했다. 


  "두려운 장소여!

  이곳은 다름 아닌 신의 집이고 하늘들의 문이로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그가 그의 머리 두는 곳에 두었던 그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돌의 머리에 부었다. 그리고 그는 저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실로 루스가 이 도시의 이전 이름이다.


2. 네 가지 '보라'


  그의 꿈의 내용은 네 가지 '보라(behold)'로 구분할 수 있다. '보라'는 독자의 주목을 요청하는 중요한 장치인데, 개역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 이 '보라'를 생략하고 있다. 아마도 '보라'를 넣었을 경우, 우리말 문체가 어색지기 때문인 것 같다. 일단 우리는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보라'를 살려둔다.


  첫번째 '보라'는 꿈에서 나타난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땅에 단단히 고정된 사다리의 머리가 하늘들에 닿아 있다. 즉 사다리를 통해 하늘과 땅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유대교의 토라 해설서인 미드라쉬에도 언급되고 있으며, 신약성경도 이 사다리 이미지를 그 핵심에 위치시키고 있다(이 내용은 우리가 추후에 다루게 될 것이다). 또한 꾸란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신께 나아가는 길이란 의미를 가진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건축, 문학, 영화, 음악에도 영향을 끼쳤고, 우리에게는 "천국의 계단"이란 이름으로 익숙하다(동명 드라마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곡을 얻었다는)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도 야곱의 사다리에서 그 최초 모티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두번째 '보라'에 나타난 이미지는 그 사다리를 올라가고 내려오는 신께 속한 천사들이다. 이 이미지 속에서 천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세번째 '보라'는 이미지에서 소리로 전환된다. 신은 사다리 위에 서서(하늘에서), 다시 계약을 상기시킨다. "아브라함의 신, 곧 이삭의 신". 이때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는 혈통으로 취급되어선 곤란하다. 혈통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이스마엘도 이 자리에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이 언급된 것은 혈통이 아닌, 신과 계약을 맺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은 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이다.

  이 신의 목소리로 전달된 내용에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땅/흙/먼지에 대한 구분이다. '에레츠'는 땅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성경에서 상속, 유업과 연결된다. 흙은 '아다마'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에서 아담이 왔다. 그리고 그 아담은 먼지(아파르)로 지어졌다[각주:1]

  그리고 흔히 '자손'으로 번역되는 "씨"가 언급되었다. "네가 누워있는 그 에레츠를 너와 네 씨에게 줄 것이다." 에레츠는 상속물이므로, 야곱이 누워있는 땅이 그의 유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에레츠는 야곱 뿐만 아니라, "야곱의 씨"에게도 마찬가지로 유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간단히 예상해볼 수 있는 것은, 언급된 "야곱의 씨" 역시, 야곱의 씨이기 때문에 계약 당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과의 관계를 통해 에레츠를 상속받을 것이란 사실이다. 


  네번째 '보라'는 신과 계약 당사자인 야곱 사이의 관계가 나타난다. 계약을 맺은 양쪽은 계약이 이뤄질 때까지 함께 한다. 신은 계약이 이뤄질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라 말하지 않는다, '떠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즉 계약이 이뤄지기 위해선 신이 인간과 함께 해야만 하고, 이것은 계약 내용에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야곱의 전생애 동안 함께 한다. 그리고 '지키다'라 번역된 '샤마르'는 계약이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내가 너를 이 흙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문제는 네번째 보라의 '아다마'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이다. '아다마(흙)'는 상속물이 아니다(상속물은 에레츠뿐이다). 따라서 야곱이 이 흙으로 돌아온다는 말은 계약 내용대로의 '상속'에 대한 언급이 아닌, 단순한 장소의 이동을 의미한다. 분명 신은 야곱이 누워있는 에레츠를 유업으로 주겠다고 했고, 야곱이 누워있는 장소는 나중에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는 가나안 땅이다. 그러나 "이 흙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땅을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신은 야곱을 "이 흙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계약 이행에 필수적인 일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야곱은 땅의 상속과 무관하게 "이 흙"이 있는 벧엘로 돌아오는가? 돌아오는 과정과 결과 속에서, 계약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가?  


  창세기 35장에서 신은 야곱에게 "이 흙"이 있는 벧엘로 돌아가라 명한다. 그리고 야곱은 벧엘로 돌아가서 돌 위에 기름을 붓는 이전의 행위를 반복한다. 그런데 행위는 같지만, 야곱은 신에 대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갖는다. 그는 벧엘에서 꿈을 꾸고 돌에 기름을 부을 때만 하더라도, 생존포기/신에 대한 신뢰 라는 계약조건을 이행하지 못했다. 오늘 본문의 바로 다음 내용은 이러하다.


창세기 28:20~22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야곱은 신에게 흥정하고 있다. 조건문을 내걸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경우, 자신이 신에게 보답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생존 포기의 계약에 충실하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창세기 29~34장을 지나면, 야곱은 달라져있다. 그리고 달라진 야곱에게 신은 벧엘로 가라고 명한다. 그리고 야곱이 벧엘로 가기 전에 자기 식구들에게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라.

창세기 35:2,3, 개인번역

야곱은, 자기의 가족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말하였다(왜 '명령'이라 번역했는가?). 


  "너희는 너희의 한 가운데 있는 이국의 신들을 끝장내라. 

  너희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너희의 겉옷들을 바꾸어라.

  그리고 우리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간다. 

  내가 나의 고통의 날에 나에게 답하시는 신에게

  거기서 제단을 쌓게 하라. 

  그는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계셨다."


  이 내용은, 마침내 야곱이 계약에 충실한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생존 포기, 자신의 생존을 신이 보장하고 있다는 전적인 신뢰. 전에 없던 모습으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신은 달라진 야곱을 다시 벧엘로 보낸 것이다. 신은 자신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야곱이 같은 장소에서 다른 고백을 할 만큼 달라져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계약 당사자인 야곱이, 마찬가지로 계약 당사자인 신이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가능했다. 신은 벧엘을 떠난 야곱을, 다시금 벧엘로 돌아오게 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야곱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켰고, 비로소 야곱은 계약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야곱이 계약에 충실해야만, 즉 야곱이 계약조건을 지켜야만, 신은 그 계약조건에 따른 결과를 이룰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신의 무능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신의 자기제한'이라 부르고 싶다. 이것이 신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벧엘을 떠나기 전 야곱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 야곱이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꿈을 해석한다.


4. 당자사의 해석 : 경외로운 꿈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말했다. 


  "실로 여호와께서 이곳에 계시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그리고 그는 두려웠고, 말했다. 


  "두려운 장소여!

  이곳은 다름 아닌 신의 집이고 하늘들의 문이로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가 그의 머리 두는 곳에 두었던 그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돌의 머리에 부었다. 그리고 그는 저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실로 루스가 이 도시의 이전 이름이다.


  정신분석의 위대한 공헌은, 우리의 의식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의식은 무의식의 반댓말이 아니라, 무의식과 관계맺는 자아의 방식인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의식에 대해 더욱 알기 위해 무의식에 접근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해석한다.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지점. 의식으로 포착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가 그 깊은 우물에서 길어진다. 

  "실로 여호와께서 이곳에 계시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적어도 야곱은 자신의 꿈을 허구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야곱은 "실로" 자신이 잠들었던 곳에 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꿈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경련처럼, 야곱의 신체에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침입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외부로부터인지 내부로부터인지는 불분명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난 그 예외적인 인식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새롭게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그 예외적인 인식에 대한 인간의 최초 반응은 무엇일까? '두려움', '공포'라 기록되어 있다. 나의 일상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확인했을 때의 감정이다. 공포 없는 삶은 단조로운 삶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일상을 벗어난 무언가를 느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일상을 벗어난 무언가는 위험하기 때문에, 현대인은 다시 공포를 통제하려고 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통제된 공포를 즐긴다.

  야곱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통제하고자 했던게 아닐까? 자신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준 그 예외적인 인식을 '장소'에 국한시키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장소의 탓으로 돌리며, 그 장소를 신성화한다. 그러나 이것은 살기 위한 야곱의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장소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가는 곳곳마다 두려워서 살 수 있겠는가? 야곱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두려움이란 감정은 이 장소 안에서만 국한된 거야. 이 장소를 벗어나면 두렵지 않을거야.' 그러나 야곱은 거기서 하룻밤을 묵는다. 자신이 두렵다고 외친 그 장소를 떠나지 않고 밤을 보낸다. 그는 단지 두려웠던게 아니란 말인가? 당신은 느껴본 적이 있는가? '두렵지만 곁에 있고 싶은 감정을'. 

  이를 우리는 '경외'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루돌프 오토는 이것을 "피조물적 감성", "누멘적인 것"이라 불렀다. "자연적인 공포로부터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위 일반적인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닌...신비적인 것의 최초의 술렁임이요 낌새...공포로만 충만케 하는 압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신에 대해서 단지 선함과 자비와 사랑과 친근성 등 요컨데 인간의 세계에 친숙한 요소들만 인정하고자 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방해가 되는...전적으로 비자연적인...(후에) 실수에 대한 상벌같은 도덕적 요소로 합리화되어 버리는 것"[각주:2]

  야곱은 자신이 신성하다고 선언한 그 장소에서 잠들고 일찍 일어나 그 자리에 돌을 세우고, 그 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그리고 그 장소의 이름으로 새롭게 '호명'한다. 벧엘. 신의 집이라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난다. 이상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대강이다.

  야곱이 그토록 신성하게 생각했던 장소는, 현재 잊혀져 지금은 어디에 있던 도시인지도 불분명하다. '루스(편도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도시는 이젠 그 좌표를 잃은채 이름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이름만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이름을 가지고 사고하고, 이름 없이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데에는, 이름으로 족하다.

  다음 주 읽을 본문은 다니엘 2장이다. 페르시아 포로기 시절, 잊혀진 줄 알았던 야곱의 꿈은 다른 이의 꿈이 되어 나타난다. 다시 의미화되고 해석된다.


  1. *개역성경은 이 구분을 거의 무시하고 있는데, 아래 구절에서 유업으로서 에레츠와 흙인 아다마를 구분해서 읽어보라. 창세기 2:5, 개역 주 하나님이 땅(에레츠)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아다마)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레츠)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본문으로]
  2. <성스러움의 의미>, 루돌프 오토, p. 49~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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