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 돌을 들어라."
끝나버린 이의 형제인 마르다가 그이에게 말했다.
"주여, 이미 그가 냄새납니다. 죽은지 나흘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그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돌을 들어라." 유대의 무덤들은 돌무덤입니다. 시체를 동굴에 안치시키고 큰 돌로 막아놓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들어다가 치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돌을 치우면 안되지 않겠어요? 이 돌은 죽음의 문입니다. 사람이 이 문 뒤로 한 번 넘어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마르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는 지독하다고 하지요. 죽은지 4일이나 지난 나사로의 무덤에서는 그 죽음의 악취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를 말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보입니다. 요한은 그 마르다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끝나버린 이의 형제". 나사로는 정말 끝났습니다. 죽음의 문 뒤로 넘어갔으면 끝난 것이지요.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네가 신실하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마르다는 혼납니다. '너 왜 나에게 신실하지 않아? 신실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아까 말했잖아?'
마르다가 앞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1:25~27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하셨다.
"바로 내가 다시 일어남이고 그 삶이다. 나에게 신실한 이는 죽는다해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면서 나에게 신실하기도 한 각각 모두는 오는시대에 이르도록 정말로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에 너는 신실하겠느냐?"
그녀가 그이에게 말씀하셨다.
"네, 주여. 저는 당신이 메시아, 곧 코스모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이미 신실했어요."
1) 마르다의 오해와 만류
예수님은 분명 앞에서 "바로 내가 다시 일어남이고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나에게 신실한 이는 죽는다해도 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모든 사람은 살아나서 오는시대에 이르도록 정말로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고, 그것을 믿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자신은 이미 예수께 신실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좋아하고, 나사로가 유대인들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활이 한 사람부터 시작되는 줄로 생각 못했고, 지금 여기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예수께 신실했다고 말했지만, 정작 자기 생각대로 예수님께 신실했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의 문 앞에서 예수를 만류하는 것이었어요. 예전에 베드로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16: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우리는 이제 알 수 있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시온에 귀환하시는 왕으로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거기서 십자가 지심으로 사람들을 출애굽 시키실 것이고, 부활을 통해 새 시대를 여실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베드로는 이것을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립니다. 오늘 마르다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 16:22,23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에는 바로 저 죽음의 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저 문을 굳게 닫아놓고 싶어해요. 죽음을 한 쪽에 몰아놓고 삶을 살아갑니다. 베드로도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를 말렸던 이유는,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을 이 둘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 곧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그 일은 저 죽음의 문 뒷편으로 몰아넣은 죽음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즉 죽음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문을 치우고 무덤 안이나 밖이나 사람이 살도록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처음 신실함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 안하셨습니다. 다만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넘쳐흐름입니다. 심지어 죽음의 장소라고 돌문으로 꼭꼭 막아놓았던 곳에서도 생명이 넘쳐흐르는 게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넘쳐흐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정체가 뚜렷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5.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었다. 그런데 예수는 두 눈을 위로 드셨고 말하셨다.
그래서 돌을 치웠습니다. 돌에 막혀서 어두웠던 무덤에 햇살이 비칩니다. 사람이 살아서 있을 수 없었던 그곳을 가로 막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졌습니다.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무덤이 집이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지금 죽음을 뒤집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버지,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나의 말을 당신이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모든 순간 당신이 나의 말을 들으시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무리 때문에 저는 말합니다, 이는 이들이 당신이 나를 보내셨다는 사실에 신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하셨던 기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나사로를 제발 살려주세요'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때 나사로는 이미 살아있었고(그래서 돌문이 열렸어도, 그 밖으로 냄새가 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감사기도가 좀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심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지금 뭔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걸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입을 열어서 감사기도를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여섯번째 표적을 보고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 감사기도는 여섯번째 표적을 이해하는 단서, 그것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해주신 단서가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나사로 사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무언가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죽음의 문이 열리고 사람이 그 속에서 살아나는 장면을 목격하며, 무언가 알아채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바로 마르다가 착각했던 바로 그것.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을 왜 보내셨는가?'입니다. 유대인들의 단체 부활을 위해서였나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돌 문으로 막아놓았던 죽음의 세계를 통째로 무효화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그 일은, 이단 부스터의 과정을 통해 이뤄질 것입니다. 즉 예수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이것 때문에 이땅에 오셨음을 알게 하시고자, 모든 사람 들으라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말하고 큰 소리로 소리치셨다.
"라자로야, 이리로 나와라!"
죽었던 이가 밖으로 나왔다 두 발과 두 손이 천들로 묶인 채로, 그리고 그의 얼굴이 수건으로 싸여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그를 풀러라, 그리고 그를 돌아가게끔 보내주어라!"
그래서 유대인들 중 많은 이들, 즉 마리아에게 왔다가 그이가 만드셨던 것을 목격한 이들은 그이에게 신실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갔고 그들에게 예수께서 만드신 것들을 말했다.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죽음의 공간에서 살아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다시 일어난 사건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살아났지만 아직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예고편이 아닌 본편에서는, 그 어느 것도 묶여있는 것 없이 살아나게 됨을 우리는 압니다. 수의마저도 벗어버린채 완전히 생명으로 넘쳐날 사건을 우리는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나사로를 묶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주라고 말씀하신 것이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여기 모인 어느 누구도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출애굽으로 무덤에서 걸어나온 사람 맞지만, 우리는 사탄이 통치하는 그 죽음의 세계로부터 탈출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은 죽은 사람에게나 걸맞는 것들로 여기 저기 묶여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흔적들을 풀어주는 것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듯 싶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울어주었던 사람들의 몫입니다. 죽음의 흔적을 털어내고 생명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주변 사람들 몫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섯번째 표적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끝내고보니, 이 여섯번째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수수께끼같은 말들이 떠오릅니다.
요한복음 11:4
"이 연약함은 죽음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뚜렷을 위해 있다, 이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뚜렷히 되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11: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길을 떠난다, 그를 깨우기 위해서."
요한복음 11:14,15
"나사로가 죽었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 때문에 기쁘다, 너희들이 신실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에게로 가자!"
6.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무덤에서부터 걸어나왔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놀라워하고 기뻐했을 그 때, 이것이 기쁘기는 커녕 걱정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공회로 모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 사람이 많은 표적들을 만들고 있는데, 우리들이 무엇을 만들겠습니까? 만일 그이를 이대로 보내버리면, 많은 이들이 그이에게 신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올 것이고 우리의 그곳과 이 민족을 들어버릴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인데, 이 사람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를까봐 걱정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따른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로마와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활하는 것이 분명해졌는데, 서로 죽이려고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로마와 싸우려하지 않으면로마에 지게 될 것이고, 로마에 지게 되면 민족 전체가 죽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사람들이 싸우지 않을까봐 걱정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인 가야바, 바로 그 해의 대제사장이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 것도 모르오, 당신들에게 이익인 것을 전혀 산정하지 않았소, 그것은 한 사람이 이 씨알을 위해 죽는 것이고 전체 민족은 멸망하지 않는 것이오."
그런데 이것은 그 자신으로부터 말한게 아니라, 바로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에언한 것이다, 예수가 민족들을 위해 곧 죽으려 할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그 민족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아이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이었음을.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합니다.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서 죽는 게 낫겠다고. 이 말은 예수를 죽여야겠다는 잔인한 말이지요. 예수를
죽여서 유대인들이 로마와 계속 싸우게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참 이상한 말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압도하며 넘쳐 흘렀는데, 그게 걱정이라니 말입니다. 오히려 그 사건 때문에 우리가 죽게 되었노라고 걱정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가야바의 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 그는 자신들이 살고자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참말이
됩니다. 정말로 예수가 모두를 위해서 죽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 '모두'에는 지금 예수를 죽이려는 이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날로부터 그들은 논의했다, 그이를 살해하기 위하여.
모두를 위해 한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죽고자 합니다. 이제 그 한 사람이 죽는 그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죽을 것이고,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의 표적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 남은 하나의 표적은 나머지 모든 표적들이 가리키고 있는 표적들의 대결말입니다.
'복음서, 예수의 도전 > 요한이 말하는 일곱가지 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8:1~47 (0) | 2017.02.25 |
---|---|
[요한이 목격한 예수] 7. 일곱 가지 기억, 한 가지 신실함 (0) | 2017.01.07 |
요한복음 11:17~38 + 해설 (0) | 2016.12.24 |
요한복음 11:1~16, 요한의 여섯번째 표적 (1) (0) | 2016.12.17 |
요한복음 11:1~53(사역) (0) | 2016.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