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3:1~13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0.


 오늘부터 우리는 새로운 글 꾸러미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인데, 앞으로 세 번에 걸쳐서 내용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주문하는 것은, 이 내용에 대한 암기입니다. 


  암기의 이유는 이러합니다. 그간 쉬운 번역을 사용했던 일들을 여러분들께 사죄했습니다. 경전은 무조건 쉽게 풀어재낄 것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먼저 전해져온 문구 그대로 맞닥드리는 것이 옳은 것인데, 그간 쉬운 번역으로만 여러분들을 먹였으니, 이것은 저의 잘못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려운 고어체들로 이루어진 글자들이 어렵진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역판 성서로 돌아와보니, 다시금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익숙함입니다. 익숙함은 어디에서 옵니까? 많이 다루는 데에서 옵니다. 많이 다루는 것은 어디서 옵니까? 애정에서 옵니다. 즉, 성서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이것을 자꾸 소리 내어 읽어도 보고, 자기 전에 눈으로 읽어도 보고, 외워도 보고, 자꾸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이 눈과 귀와 입과 손에 익숙해지면 그때 가서야 풀이가 귀에 들릴 것입니다. 내가 익숙한 구절이 이렇게 풀려지는구나 알게 될 것입니다. 줄여서 말하면 암기와 이해입니다. 


  오늘은 13장 전체에서 앞부분만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1. 삶의 중심이라 착각했던 것이 무너진다.


  아직 성전 이야기입니다. 성전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었습니까? 먼저는 성전에 들어가시기 전에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기억납니다. 그 이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비둘기 제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일순간에 성전 제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오셨는데, 말씀 하신대로 무화과나무가 다 말라버린채 있었습니다. 이후, 이 충격적 사건, 성전 제사를 중단시킨 사건에 대해서 묻고자 이러 저러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먼저는,대제사장과 율법학자와 장로들이 찾아와서 예수께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느냐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대답하기 전에 너희는 세례요한을 어찌 생각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후 주인의 땅을 빼앗으려 살인을 일삼는 소작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모퉁이돌 이야기로 끝나는 이야기였는데, 이 이야기 이후,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찾아와 예수께 황제에게 세금을 물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두개인들까지 찾아와 결혼과 부활에 관하여 물었고, 이후 율법학자가 와서 가장 첫째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다윗의 자손, 다윗의 주님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들에 대해 하실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대화를 마치시고, 성전에서 나가시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룰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돌들이며, 이 건축을 좀 보세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멀리서도 보일만큼 크고, 여기 저기에서 관람을 올만큼 아름다운 건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어떤 건물이 있습니까? 나라를 대표하는 크고 웅장한 건축물. 이집트에는 피라미드가 있고, 미국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잖습니까? 우리나라에는 숭례문이 있나? 그렇다면 한 번 가정을 해봅시다. 숭례문이 그냥 대로 한가운데 있는 문 정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와 언제나 함께 하며, 우리는 그 숭례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매일 매일을 그 숭례문에서 예배드리며, 그 숭례문이 박살났던 아픔을 가지고 있어서, 다시는 무너지게 하지 않겠다고 눈물로 다짐을 했더라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보다 더 합니다. 삶의 중심, 하나님 계신 집, 민족 역사의 중심.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모아 이 성전 크고 아름답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헤롯도 그러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 리모델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럼 그 건축에 들어가는 돈은 어디서 구합니까?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사람들이 매일매일 제사드리러 돈을 싸들고 오니까요. 그 돈을 환전상에게 가져가 제물로 바꾸는 행렬이 끊이질 않으니까요. 심지어 돈 없는 서민들마저도, 작은 비둘기라도 사서 제사해야지 하면서 푼돈을 들고 오니 돈 걱정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 돈 가지고 성전을 크고 아름답게 짓는 일에 모든 민족의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대단한 건물이었겠습니까? 외적으로도 크고 아름답지만, 이것은 또한 '리가 하나님 백성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그 얼마나 울림이 대단하겠습니까? 이 건물을 보는 제자들도 입이 떡 벌어져서, 아 이 건물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고 예수께 묻을 정도였습니다. 조금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껏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은 모두 성전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제자들은 성전을 보고 감탄합니다. 이 말은 이 제자는 예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는 것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제까지는 돌려 말하고, 숨겨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못알아들을리 없게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성전? 얼마나 공을 들였던 간에, 얼마나 멋있고 웅장하던간에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공든탑이 무너지랴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공든 탑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상관없는 쓰잘데기 없은 것에 공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돈은 지배자가 만든 것입니다. 짜 먹으려고 만든 것입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을 수 없는 것과 바꾸기 시작한 그 시작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돈으로 쌓은 거대한 공든탑이 있습니다. 경제입니다. 우리는 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경제를 살리자는 말은 모두가 다 같이 잘 살자는 말과는 다릅니다. 경제를 살리자는 말에는 평등은 없습니다. 둘을 하나로 만들자는 말은 없습니다. 경기가 살아난다고해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질 것 같으면, 전세계 200여 나라중에 경제대국 10위권이다 뭐다하는 이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죠. 


  그래서 이 경제가 여러 번 파탄났습니다.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 연방 은행에 의지하다가 국제 경제가 두 번이나 박살 났습니다. 이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이것을 가리켜 '경제 대 공황'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panic입니다. panic은 두려움은 있는데, 두렵게 하는 정체를 모를 때 쓰는 진짜 두려운 말입니다. 경제가 무너졌는데 아무도 그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폭싹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닙니다. 무려 두 번이나 안무너질 것 같았던 경제라는 공든탑이 모두 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졌습니다. 그 뿐입니까? 석유에 의지하는 국제 경제는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또 다시 박살 났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쇼크라고 했습니다. 1, 2차 석유파동이 그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IMF라고 부르는 상황을 지난지 불과 얼마 안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우리네 아버지들은 새벽부터 나가셔서 야근까지 하시고 밤늦게 들어오시도록 몸이 부서져라 망가져라 일하시는데 경제는 살아날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1997년에는 우리네 아버지들이 일을 열심히 안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무너졌습니다.


  성전이 무너집니다. 성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지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든든한 토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너집니다. 삶의 든든한 토대는 언제나 하나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토대로 둔다는 것은, 제사만 열심히 지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자기의 인격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문제에, 돈의 문제에 자신을 팔아 넘기지 않는 것. 그런데 이것 하려면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사입니다. 돈은 지배자가 짜먹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목적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성전 들어가셔서 돈 바꿔주는 사람을 쫓아냈겠습니까? 성전은 왜 과부를 인간답게 살게 하지는 못할망정 20원 마저도 내게했던 것입니까? 그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힘으로, 돈으로 세웠던 성전이 무너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늘 기도하시던 감람산. 그 곳에서 예수는 성전을 마주 대하며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대한 남다른 감회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지금 유대 성전 이야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오셔서 하셨던 일은 모두 성전과 관련이 있고, 하신 말씀들도 모두 이 성전과 관련하여 하신 것들이었습니다. 그 만큼 유대 역사 속에서든 성전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의 생각을 읽어내는데 있어서 유대 성전을 알아야 함에는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진다고, 딱 부러지게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감히 두려워서 입밖에 다시 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람산에 오르기까지 침묵하던 제자들이 누가 들을까 조용히 와서 묻습니다. 왜 조용히 묻습니까? 남들 들으면 안될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전 중심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이 무너진다는 말은 그 사람들의 삶의 모든 기반이 무너진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체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곧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들이 휴지조각이 될 것이라는 말 이상입니다. 이 충격적인 말, 자신의 삶의 토대가 모두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이 말에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께 요청합니다. "알려주십시오. 어느 때에 성전이 무너지겠습니까?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2. 끝이 아니다. 성전이 무너질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성전이 무너질 때 벌어지는 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먼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메시아라 거짓말 하여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가짜들에게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 그리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대로 되더라도 아직 끝이 아니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3. 이후에 진정으로 나라와 나라간 갈등이 빚어질 것이고, 자연재해도 같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성전 무너질 즈음 벌어질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재난의 시작'이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성전 무너짐이 아니라,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구절들로 오랫동안 읽혔습니다. 거짓 메시아가 나타나고, 전쟁이 벌어지고, 자연재해가 벌어지는 것이 지구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것처럼 읽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읽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에 관한 예언들입니다. 게다가 이것들은 이미 이 쓰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졌고, 요세푸스라는 역사가에 의하면, 당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테지만, 유대전쟁, 즉, 로마와 유대간 전쟁이 벌어져 유대인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고 그 나라는 지도 위에서 사라집니다. 따라서 이것을 읽고나서, '아 지구가 망하나보다'라고 읽어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은 지구 멸망에 관한 예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세상의 종말로 잘못 읽어서, 무서워하고, 망하면 어쩌나 하는 것은 정말 잘못 읽은 것이죠. 


  오히려 예수께서는 아직은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라 하여도 경거망동하여 그들을 따라가서도 안되고, 전쟁 소문을 들어도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아직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끝에 관한 말씀으로 읽어선 되겠습니까? 이 말씀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대한 말씀입니다. 


3. 이는 산고의 시작이니라


  무엇의 시작입니까?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 '재난'이라는 말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잘못 읽혀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래 이 단어는 '산고'라는 단어를 써야 적합합니다. 즉,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낳느라 아픈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이 산고라는 단어를 특별한 용례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바로 오는 시대를 의미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즉, 아픔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는 의미는, 곧, 현시대의 아픔 속에서 새 시대가 나온다는 의미로 이해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전이 무너질 때가 곧 오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집니다. 거짓 메시아가 나타납니다. 전쟁의 소문이 돌고, 자연재해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오는 시대가 오는 징조라니요. 그러나 이러한 아픔은, 곧 새시대 출산을 위한 아픔이라는 것이 예수의 말씀입니다. 아프고 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마치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태어났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전쟁 소문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어찌 들렸을까요? 성전이 무너진다 해놓고, 이것이 오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 말씀을 어찌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믿을 것이 온다는 그 말을 제자들은 어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것은 사실 기존에 믿고 있던 것들을 갈아치우고 새 것이 오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믿고 있던 것들이 새로워지고 강력해져서 오는 것이었음을 그들은 나중에야 알게 될 것입니다. 하여간 이 산고의 시작. 이것은 옛 체제가 무너지고, 그 옛 체제의 무너진 잔해 속에서 새로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치 기능을 다하여 더이상 앞에 나갈 수 없는 고장난 배 위에서, 새로운 배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죽음과 생존이라는 옛 가치가 새로운 가치 아래 굴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 산고 끝에 나오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산고 끝에 어떠한 생명이 나올지보다 산고가 얼마나 아플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시는듯, 낳게 될 생명보다 그들이 겪게 될 아픔에 대해서 먼저 말씀해주십니다. 무지장 아플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제자들이 겪게 될 아픔은 이러합니다. 

  그들이 끌려가서 매질을 당하고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매질은 나라를 다스리고 주관하는 자들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매질이 될 것입니다. 죄 없는 자를 잡아다가 때리는 것은, 그 때리는 자가 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는 무엇이겠습니까? 감옥에 죄없는 사람을 가두면, 어느쪽이 감옥이겠습니까? 죄 없는 사람을 옭죄는 시스템에 살고 있는 이가 오히려 갇힌 것 아니겠습니까? 이리 생각하면 이 나라는 갇힌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갇힌 세상입니다. 감옥입니다. 죄 없는 사람 죽이는 나라와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감옥입니다. 이 감옥에서 살고 있는 옳은 이들은 고초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성령께서 할 말들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증언이 곧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알게 하시는 분이니, 그 분께서 나라와 나라들이 얼마나 잘못했던 것인지 증언하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이 모든 나라에 전달되기 시작하는 것도 이 때입니다. 종교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모든 나라와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세상은 아파할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게 될 것입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죽게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가치 기준이 상실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모둔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세상은 무엇이 기준인지 모른채 무의미의 태풍에 휩쓸려 세상은 모두가 모두를 아프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산고라는 것. 생명이 오고 있다는 것. 그러니 견뎌야 한다는 것.


  예수로부터 이 말씀을 들었던 그들은 견뎠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성전에 관한 이야기를 줄곧 듣고도, '와, 성전 멋지네' 하는 진정 무지랭이들입니다. 예수가 죽임당하실 적에 무섭다고 다들 도망가서 숨었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주후 70년 성전은 무너지고, 이들은 예수의 말씀처럼 사람들 앞에 서게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에 무지랭이였을 시절의 그들이 아닌, 같은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른 정신으로, 세상이 잘못되었노라 말하고, 진정한 왕이 오셨노라 선언하고, 평생을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법정에 서서 증언하였고,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죽임당했습니다. 그들은 왜 이러한 일을 견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이것이 산고의 고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 끝에 생명이 출산 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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