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계명(12:28~34)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 논쟁을 엿들었다. 예수께서 놀라운 답변을 주셨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도 질문을 하나 던졌다.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 번째 계명은, '들어라 이스라엘아, 너희 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과 영과 지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율법학자가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밖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것과 '마음과 지성과 힘을 다하여 그 분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 제사보다도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깊이 이해하고 대답함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
그 후로는 아무도 감히 예수께 질문하지 않았다.
0. 지난 이야기
지난 이야기들을 이러한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입니다.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은 위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을 상징하는 것이 연기요, 연기를 피우는 것이 곧 제사입니다. 하늘로 피우는 연기를 통해서 신적인 무엇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민족 공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기를 피우고 제사를 하며 연등회, 팔관회 같은 제천행사를 벌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왜 하나님을 하나라 부르느냐, 그 분은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있게 한 한 분. 하나님. 그 분은 어떠한 분이실까요? 연기를 피워 신께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은 그 신이 어떠한 분이라 생각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자신들이 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제사를 드렸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입니다. 무수한 민중들의 머리 위로, 율법학자, 바리새인, 헤롯당원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사람들을 중심으로 날마다 성전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이 사람들은 이해관계는 다를지라도, 성전이 필요하다는 사실, 이 하나만큼은 공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나, 이 성전은 많은 사람들을 그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착취하고 이용합니다. 돈을 통해서 말입니다. 죄인들, 병자들, 귀신들린 사람들은 오히려 이 성전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무화과나무 비유, 성전 제사 중지 사건, 소작인 비유, 모퉁이 돌 비유, 가이사에게는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모든 내용들이 다 이 성전과 관련있는 내용들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중심에 대고 소리치시는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다! 왜 이스라엘의 중심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공평하게 정의롭게 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평과 정의가 필요한 죄인들, 귀신들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 쫓겨나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 주인에게 줘야할 것을 주지 않는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 쓸모가 없다!'
어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가,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이때까지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예수께 접근했다면, 이 사람만은 어떤 악의도 없이, 예수께 그저 궁금함을 가지고, 다음의 짤막한 물음을 던졌습니다.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1. 으뜸되는 계명
우리는 계명에 대해 이미 배운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독특한 시간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현시대라는 시간표와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라는 시간표였습니다. 이 오는 시대를 가리켜 영생이라 부른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오는 시대에서의 삶의 모습이 곧 계명입니다. 다시 말해, 오는 시대는 계명이 지켜지는 시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이 시내산에서 받은 토라, 즉, 율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방대합니다. 모세오경을 포함해서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고, 또한 이 구약성경을 해석한 다른 여러 책들이 있어서 이 오는 시대의 계명을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 재구성하고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이 율법학자들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날마다 연구했을 율법학자가, 예수께 질문합니다. 가장 으뜸되는 계명. 오는 시대의 계명들의 주제, 요약, 핵심.
여러분들은 오는 시대는 어떠한 시대라 생각하십니까?
예수께서 그 오는 시대의 계명을 가리켜,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 번째 계명은, '들어라 이스라엘아, 너희 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과 영과 지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게명은 없다."
여러분은 이러한 시대가 기다려지십니까? 갈망이 됩니까? 그 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면, 사람들이 마음과 영과 지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라면, 오늘날 현시대가 겪는 모든 문제와 아픔들을 다 일소하고도 남을 시대가 될 것입니다. 아무도 억울해서 가슴을 칠 일도 없고, 정의, 공평, 사랑, 진실에 관해 소리 높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이러한 것들이 일상에 녹아드는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엄청난 짐을 우리에게 얹어주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시간표, 오는 시대에 대한 요약인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1. 네 마음과 영과 지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오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율법학자가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만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구절들이었고, 심지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하루에 2번씩 암송하는 '쉐마(들어라, 이스라엘아)'라는 기도문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레위기 19:18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이러한 것들이 성취되고 지켜지는 시대가 곧 오는 시대인 것입니다. 영생인 것입니다.
2. 모든 번제와 희생 제사보다도 훨씬 더
이 말을 듣고 율법학자가 대답합니다.
율법학자가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밖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것과 '마음과 지성과 힘을 다하여 그 분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 제사보다도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의 의도를 대번에 눈치챘습니다. 유대인들이 날마다 암송했던 그 쉐마가 옳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영과 지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옳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이 대답하는 율법학자가 추가로 했던 말입니다. 이 쉐마를 지키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 제사보다도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모든 번제와 희생 제사".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번제와 희생제사를 하는 곳은 한 곳 뿐입니다.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는 지금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고, 날마다 제사가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으로 자신들이 하나님께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부모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면 효도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밖에 나가서는 망나니처럼 사는 아들마냥, 이스라엘은 이 연기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기는 그저 연기입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서 사라집니다. 기댈만한 것, 믿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스라엘은 이 연기만 피우면 되는 줄로 믿고서, 죄인과 병자들을 내쫓을 생각, 성전 리모델링할 생각, 로마와 전쟁을 벌일 생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율법학자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모든 번제와 희생 제사로 피우는 연기보다, 쉐마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이 마음과 지성과 힘을 다하여 그 분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잃어리면 성전은 더이상 성전도 아니고, 하나님과도 상관 없이, 공평과 정의를 오히려 찢어발기는 사탄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 일이 아닙니다. 우리 얘기 입니다. 만약, 우리 각자가, 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었네 하지만, 만약 이것이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과 연결되었음에도,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지 않음은,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와 다를 바 없고,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과 다를 것 없고, 돌을 들어다 버린 무허가 건축가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 다 무엇 실수 한 것입니까? 첫째는 주인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 귀한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하나님보다, 사람보다 귀한 것 있는 사람은 다 무너져야 할 성전들입니다. 하나님 모르고, 사람 모르고, 돌진하는 기관차같은 그 사람은 주변을 괴롭게 합니다. 예수는 그 사람으로부터 피어나오는 연기를 중단시키실 것이에요.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여러분에게 씨앗을 주시고, 여러분들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씨앗을 심을 수 있는 토양이며, 여러분들은 그 씨를 가지고, 바로 그 토양 위에서만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매는 흙없는 수경재배, 뭐 이런거 안됩니다. 오직 이웃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공평과 정의의 모습으로 피어납니다.
3. 베일에 쌓인 새로운 성전
그런데 오늘 본문속 성전은 아닙니다. 성전은 외양만 그럴듯하지, 하나님도 사랑않고, 이웃에게 공평과 정의를 베풀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성전에 대해서, 이미 예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이미 예수는 소작들이 아들을 죽일 것이라 말씀하셨으며, 이미 예수는 돌이 건축자들에 의해 버림받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성전은 9부 능선을 넘은지 오래입니다. 이걸 율법학자가 이해한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가 깊이 이해하고 대답함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
그 후로는 아무도 감히 예수께 질문하지 않았다.
그가 깊이 이해했습니다. 외관상 드러나는 번드르르함이 아닌, 그 알맹이를 보니 알맹이가 썪었음을 그는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멀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니가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출애굽에서 멀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너의 포로기가 끝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리 뒤의 내용들을 말씀해드리면, 이제 예수는 새로운 성전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베일에 쌓여있으나, 우리는 그 정체를 말하고 뒤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온갖 더러운 것들의 잡탕인 건물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이며, 예수는 그 새로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실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성전은 곧 부활몸입니다. 예수꼐서 산에서 보여주셨던, 세 차례나 죽었다가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셨던, 이 부활몸이 곧 새로운 성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몸은 하나님과 무엇으로 연결됩니까? 연기를 피웁니다. 그런데 이 연기는 건물 성전의 연기와 다릅니다. 자신을 제물로 태워 드리는 연기, 곧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마음과 영과 지성과 힘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마음을 태우고, 인격을 태우고, 지성을 태우고, 힘을 태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연기가 가르키고 있던 진정한 실체였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과의 관계는 어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전을 통해서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히기는 커녕, 착취와 이용이 반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몸을 얻어 하나님과 마음과 영과 지성과 힘으로 연결된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뤄냅니다. 공평은 억울한 사람이 없는 것이요, 정의는 모든 사람을 제대로 대우하는 것이죠. 착취가 공평으로, 이용이 정의로 전환되는 그 중심에 부활몸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이 연결된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되었음을 믿는 이로부터 이 일이 벌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황제의 면상이 새겨진 돈은 어떻게 됩니까? 황제 숭배를 광고하는 이 돈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금? 줘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돈은 이것을 위해 이용당해야지, 우리가 돈에 이용당하면 되겠습니까? 이웃 사랑이 중요할찐데, 돈이 이웃사랑보다 중요해지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그림을 이렇게 수정하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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