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6:8

from 창고 2015. 1. 16. 18:23



  예전에 대천덕 신부의 <토지와 경제정의> 라는 책을 읽고나서, 이 구절을 참 많이도 읊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서, 헨리 조지의 '토지 가치세'를 해야한다고 계속 이야기할 때마다 인용했으니까. 그 때 내 눈에는 저 구절의 '정의'라는 글자가 가장 크게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같은 구절을 다른 책에서 마주했는데,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마냥 반갑다. 글자는 그 자리에 있는데, 그저 나만 한참 다른데 다니다가, 다시 돌아온듯 하다. 돌아와 보니, 비로소 다른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믿는 자여'도 아니고, '기독교인아'도 아니다. '사람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善)'을 갈망한다. 그 보이지도 않는 것을, 그 살아보지도 못한 것을. 다만 그 선이 돈인줄 알거나, 지위인줄 알거나, 자기 몸뚱이인줄 알거나, 자기 패거리의 승리인줄 알거나, 자기 자신인줄 알 뿐이다. 선을 '행복'이라 읽어도 좋고, '인간됨'이라고 읽어도 좋고, '참 나'라고 읽어도 좋다. 무엇이 되었든, 선은 '성한 것'이다. 병들지 않은 것, 속박되지 않은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추구할만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네게', 즉 '사람'에게 보이셨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람의 망막에 비추어 보여주셨다. 대체 무엇을?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
  땅의 가치들을 하늘을 의지해서 극복해 나가면서도, 겸손한 사람들.

  이 사람들을 우리의 망막에 비추신다. 환각이 아니다. 이들은 이 땅 위를 살아서 걷는 사람들이고,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며, 역사의 증인들이다. 존. F. 캐버너가 말했다. "인격 형식은, 인간이 자신의 인간됨에 충실할 때마다, 그렇게 하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계시되며 명백히 드러난다." 참으로 인간됨에 충실한 이들에게서, 정의와 사랑과 겸손을, 선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싸고 계신 한 분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이들이여럿 떠오른다. 이들이 주께서 당신의 눈에 비춰주신 선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았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나다. '너도 그 사람처럼 해라.' 그럼 나도 그러한 사람이 될 것이고, 나의 삶을 망막에 비추는 사람 속에 하나님은 똑같이 말씀하실것이다. '너도 저 사람처럼 해라.' 계시는 위에서 아래로 오는가? 아니. 계시는 위, 아래가 아니다. 이미 계시 안에 모든 것이 있다. 하늘 속에 땅이 있듯, 빈 데 안에 물질이 있듯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늘이 있다.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삶을 둘러썬 여백에 하늘이 있다. 그 빈 데 사시는 이로부터 꼭 써야 할 말이 들려온다. 

  무수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선의 조각을 만나고, 그 조각 조각들을 먹어, 내 속에서 온전함을 이룬다. 다른 이의 삶 속에서 그이의 살과 피를 발견한다. 역사 속에서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흘러내려온 그이의 살점과 피를 오늘도 만난다. 매일이 성찬이고, 그이를 먹으니, I am what I eat. 내가 그이가 된다. 그러니 누군가의 망막에, 신의 계시로 비추이는 이들이 그리스도다. 옳은 것은 책에나 있는줄 알았는데, 그 책의 글자들이 인격이 되어 일어섰다. 글이 섰으니, 그리스도다. 밤낮 글자를 망막에 비추어 보기만했지. 일어서 본 적이 없는 나를 찌르는 이들이 그리스도다. 나는 앉아서 생각한다. '일어서면 정의다. 일어서면 사랑이다. 일어서면 하나님이 함께 걷는다. 부활이다.'

  먹었으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내게 보여주신 선을 따라, 걸음마를 시작한다. 위험없는 정의, 상처없는 정의와 사랑이 어디있으랴. 자꾸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한복음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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