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2~17
[1]
그러므로 여러분은 옷 입으세요.
하나님의 택하신, 씻어나고 사랑받는 이들에 걸맞게.
그 옷은 곧 갸륵히 여김으로 애끓는 마음,
베풂, 낮아짐, 부드러움, 큰 도량입니다.
서로서로를 다시 마음에 품고서,
만일 누군가 어떤 이를 향해 흠잡은 일이 있다면,
그 때마다 용서함으로 기쁨을 누리면서 말입니다.
마치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2]
이러한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완전에 닿도록 묶는 띠,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가온 속에서 판단자가 되기를!
이 평화를 위해서 여러분이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3]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흘러넘치도록 머물게 하세요.
모든 면에서 겪어서 알게 된 것을 가르치며,
서로를 마음에 두고, 여러분의 가온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의 호흡으로 시와 찬미를 부르세요.
말로나 일로나 하는 무엇이든지,
모든 것은 주 예수의 이름 안에 있습니다.
그이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세요.
우리는 지난 시간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그 다음에는 예수의 출애굽을 의식과 기억의 측면에서 생각해봤습니다. 이 내용들을 다시 정리한 뒤, 오늘 본문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스토아 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보겠습니다. 조화, 닫힌 세계, 덕.
'조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던 것이었습니다. 즉, 전체 세계는 질서있게 돌아가고, 자신은 전체의 부분으로서 그 질서에 합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세계질서가 곧 '로고스'이며, 이 로고스는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로고스로 전체 질서를 발견하여, 그 질서에 합한 삶을 살자는 말입니다. 곧 세계질서에 조화로운 삶입니다.
나쁠 것 하나 없이 들리는 이 말이 인간의 절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조화는 닫힌 세계속에서의 조화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들은 세계가 닫혀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들은 로고스를 통해 세계를 발견하고자 했으나, 그 로고스에는 '시간'에 대한 고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보았듯이, 모든 것을 공간화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의 세계는 완벽한 공간이 되었고, 이 공간을 벗어나거나 이 조화로운 세계 안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 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닫힌 세계 속에서의 조화는 곧 숙명론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세계질서에 나를 맞추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덕'입니다. 세계질서에 맞추는 나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다음의 지점을 만나면 침묵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바로 '악의 문제'입니다. "질서를 가지고 돌아가는 이 조화로운 이 세계속에 왜 악이 있는가?" 스토아 철학은 이 질문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닫힌 세계 속에서, 악의 문제 앞에 스토아는 무력할 뿐입니다. 그리고 닫힌 세계 속에, 참된 미래 없음은 곧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이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세계질서를 긍정하여, 자신도 그 순환에 몸을 던지는 것 외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대안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조화'가 사람을 죽이는 꼴을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런 저런 목록들을 정해서 덕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닫힌 세계속에서 소망없는 몸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위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없음은 다른게 아닙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의식과 기억의 차원에서 새롭게 된 행위들이 아닐뿐더러, 이들은 숙명에 자신을 맞춰가려고 하나, 그때마다 고개를 드는 것은 자유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갈망만할 뿐, 인간의 지성작용으로는 새로운 의식과 기억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세계로부터, 자기 생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희망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제 3의 의식'이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부터 나를 건져낼 무언가입니다. 이 '제3의 의식'에 관해 듣고, 받아들이면, 이 제3의 의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제3의 의식과의 조우는, 곧 제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만들며, 제 생각에 갇혀 있던 닫힌 현재로부터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게 합니다. 곧 출애굽니다. 영생입니다. 이 제3의 의식에 대한 증거 또한 분명합니다. 한 사람이 이 제3의 의식으로 호흡하며,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서의 삶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제3의 의식을 가리켜 이렇게 부릅니다. '숨'. 그 한 사람을 이렇게 부릅니다. '예수'.
예수를 따라, 이 거룩한 숨결로 호흡하면, 그래서 새로운 기억과 의식으로 속으로부터 새로워질 수 있으면, 이제 스토아의 행위들이 유의미해집니다. 이제 덕의 행위들을 지켜나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거룩한 숨결로 호흡하는 이들이 지키는 덕스러운 행동들은, 닫힌 세계에서의 몸부림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닫힌 세계를 뚫고서 새 시대를 가져오는 행동들이 됩니다. 그들의 행동을 통해 숨결이 흐릅니다. 현시대와 오는 시대를 관통하여, 시원하게 흐릅니다. 사람은 그 숨줄을 따라 현재를 딛고 미래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 연결되는 바울의 다음 말들이 순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1]
옷 입으라 합니다. 이 표현이 참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좋은 옷일수록 몸에 착 붙어서 내 몸처럼 기능합니다. 스토아는 옷입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옷부터 입으려고 해서, 그 옷이 생명없는 수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람들은 옷입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곧 하나님이 택하신, 씻어나고 사랑받는 이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현시대를 뚫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새시대가 열렸다는, 즉 이 현시대의 이집트를 이미 이겼고, 탈출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입는 옷은 다음과 같습니다. '갸륵히 여김으로 애끓는 마음, 베풂, 낮아짐, 부드러움, 큰 도량'. 이들은 자신의 덕 추구 때문에, 이러한 옷을 입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이러한 삶의 옷을 입고자 함은, 이것이 새시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닫힌 세계 속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이미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그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바로 이러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옷은, 씻어난 이들의 몸에 딱 맞는 옷입니다. 그들의 변화된 의식과 기억에 어울리는 옷입니다.
이 구절을 읽다보면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대체로 우리가 싫어하고 꺼리는 사람은, 자꾸 나를 흠잡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 고역입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의식의 사람, 새 옷을 입은 사람은,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용서를 통해서 기쁨을 누립니다. 이러한 반전의 삶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시작이 제대로라면 걸을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역사적 사건. 이것이 우리의 의식이 붙잡고 있는 근본 기억입니다. 그러니 이 시작점에서부터 세상을 거꾸로 뒤집은 것 같은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할 지언정, 우리가 서있는 그 토대는 불변의 토대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아, 어떤 사람도 적으로 삼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건은 허구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어떤 누구도 왜곡할 수 없는 과거의 사건이자, 우리의 기억이자, 우리가 새 삶을 시작하는 토대입니다. 우리가 하다가 잘 못하고, 넘어지고, 실수해도, 우리는 다시 그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다시 살아갑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옷 입는다'는 표현은 부활과 상관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에서 바울은 이미 옷과 관련된 표현을 몇 번 했습니다.
골로새서 2:11
그 할례는 그 살로 된 몸을 벗음이요, 곧 그리스도의 할례 입니다.
골로새서 3:8,9
그러나 이제 여러분도 이 모든 것들을 벗어 던지세요!
분노와 욕망과 악의와 조롱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들 말입니다.
서로를 속이지 마세요!
옛 사람을 그 하던 짓들과 함께 벗어버리고
위로부터 새로워진 새 사람을 입어,
자신을 창조하셨던 이의 형상을 따라 깨침에 이르도록!
바울이 벗으라 말했던 것은 살로 된 몸이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영혼의 상태로 이 땅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는, 스토아와 다를 바 없는 학설을 되풀이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벗으라 말한 '살몸'은, 제 생존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은 인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물학적 몸은 자기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게끔 만들어졌습니다. 긴 세월 속에서 저장된 유전 정보는 사랑보다 생존을, 더불어보다 경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삶을 '옛사람'이라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옛삶을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이 지점이 리차드 도킨스와 충돌하는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생존'이라는 목적 안에 갇힌 인간만을 생각합니다. 생존을 넘어서 사랑하는 것 역시 더 큰 차원의 생존에 지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닫힌 세계관은 결국 절망뿐입니다.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미래는 생존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넘어서 '생명'을 추구해야 할 미래입니다.
이러한 미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자신의 살몸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큰 차원의 목적과 시대와 세계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이에 참여해야 합니다. 몸적 차원으로 말하자면, 내가 가진 몸을 극복하는 새로운 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새로운 몸이 미래의 소망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기꺼이 살몸의 만족을 포기할 수 있는 상태가, 곧 부활몸이 보장된 상태입니다. 믿는대로 될 것입니다. 제 몸을 씨앗처럼 심는 것은, 그 씨앗을 통해 열매를 얻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새 옷을 입으라'는 말은 '부활을 살라'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가 가진 신체를 가지고,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형태를 구현해낼 수 있는건, 그 몸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붙잡았을 때입니다. 감옥안에서 슬픔에 눌려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감옥문이 열리고, 범죄와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의식이 내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읽던 책에서 정말 멋진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베르그송이 '연민'에 대해서 한 말입니다.
"우리의 사유가 고통받는 타인으로부터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그 감각적 이득보다, 우리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연민의 증가하는 강도는 따라서 질적인 진전, 즉 혐오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공감 자체에서 겸손함으로의 이행에서 성립한다."
감각적 이득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타인을 혐오하고, 그러한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섭니다. 그 새로운 차원은 두려움을 공감으로, 그 공감에서 그치지 않고 겸손함으로, 완전히 다른 나를 만들어냅니다. 타인의 고통을 혐오하던 내가, 그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나로 변하는 것은 곧 부활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오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 닫힌 시간에서부터 어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탈출은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첫번째 유월절 밤에, 자기가 아끼며 기르던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라 그 아래가 뚫린 네모 모양을 만들고, 그 네모를 지나서 집밖으로 나오니까, 새로운 시절이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 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시절로 돌입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이렇게 새로이 삽니다. 나의 의식과 기억은 이렇게 씻깁니다. 살아서 새 시절을 맞습니다.
[2]
옷을 입었으니, 이제 허리띠를 둘러야겠습니다. 이 옷들이 몸에 착 달라붙도록, 내게서 떠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띠 말입니다. 이 띠를 착용하면 비로소 완전에 닿습니다. 목적을 이룹니다. 새 사람입니다. 부활입니다. 진짜 사람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위에서 말한 '갸륵히 여김으로 애끓는 마음, 베풂, 낮아짐, 부드러움, 큰 도량'이 내게 착 붙어있도록 나를 두르는 그 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완전에 닿다'라고 풀어놓은 말은 '텔레이오테토스'라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완전'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로도 약합니다. 이 말은 최상급입니다. 그래서 완전 중의 완전, 목적 중의 목적. 다 이뤘다는 말입니다. 숨결로 속이 새롭게 되고, 옷을 입어 새 삶을 사는데, 사랑은 이러한 모든 일이 최종 마무리입니다.
그럼 비로소 '샬롬'이 이뤄집니다. 살몸을 통해서 샬롬을 이룹니다. 이 약하고 삐뚤어진 살몸이 부활의 소망으로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이 살몸은 약하지만, 그 속에 새 숨결이 부어지니 살몸은 이제 살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평안이 이뤄졌기 때문이요, 그 밖에 이뤄지는 관계들은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죽을 살몸이 평안과 평화의 경계가 되어, 생명이 흘러넘칩니다. 이러한 샬롬은 창세기 시작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세계의 숙원이었습니다. 평화! 우리가 왜 갸륵히 여기는 애끓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남들에게 베풀어야 하며, 낮아져야 하며, 부드러워야 하며, 큰 도량이 있어야 합니까? 게다가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감당해야 합니까? 우리가 좋은 사람으로 평가 받기 위함도 아니요, 우리가 좀 더 인생을 편하게 사는 방식으로써 택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삶이 샬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계를 지으신 그 목적에 닿기 때문입니다. 삐뚤어짐이 온전히 펴지는 그 시간의 끄트머리에 바로 이러한 평화가 있습니다. 숨과 어린양과 하나님이 이루시는 평화가 있습니다.
이 평화가 우리의 인격의 중심에서 판단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이 최종 목적 '그리스도의 평화'에 합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개체로 따로 떨어져서 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모여 한 몸을 이루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곧 공동체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나입니다. 곧 우리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이란 말과, 앞에서 나온 '선택된'이란 말은, 다른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발음이 거의 같았습니다. '에클레토이'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이 거대한 역사를 조망해보시기 바랍니다. 한 개인의 속에 숨이 부어지고,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화가 이뤄지는 이 큰 그림 말입니다. 이 그림 안에 자신이 속했으니, 정말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정말 '우아한' 일입니다. 앞에서 봤던 책 얘기를 더 하고 싶습니다. 베르그송은 우아함이란 미래로의 자연스러운 연결에 대한 동적 공감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바꿔나가는 곡면에서, 또한 박자와 율려 속에서 진행되는 무용 속에서 우아함을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미래로 순하게 이어져,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연결점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삶이 형태가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우아함을 느끼고, 우리 역시 그러한 우아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우아함이라는 말은 라틴어 그라티아에서 왔습니다. 곧 은혜, 은총, 거저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우아함을 거져 주십니다. 곧 우아함은 새로운 미래로 연결되는 우리네 삶의 자연스러운 변화라 하겠습니다. 그이는 우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아하게 일을 이루십니다. 아, 우주는 정말 우아합니다. 정말 기뻐할 일입니다!
[3]
이러한 우아한 삶의 형태가 그리스도요, 곧 예수의 삶입니다. 그이가 보여준 삶의 형태가, 오는 시대로 부드럽게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는 변화를 위해서 폭력과 전쟁같은 급진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드럽지만 강력한, 그러면서도 시간 위에서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분명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많은 이들을 변화시키시니, 참으로 분명하면서도 부드럽고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형태를 우리는 배우고, 습득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 변화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삶에 대한 이야기,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겠습니다. 우리의 기억과 의식을 새롭게 하고, 우리에게 새옷을 입히는 그 말씀에 깊이 젖어야 겠습니다. 흘러넘치도록!
그리고 이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겪어서 알게 된 것을 가르쳐야겠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대개 삶의 형태와 거리가 멉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분절하고 나누는데 익숙하며, 때로는 몸과 몸 사이의 연결고리 마저도 깨뜨리기 십상입니다. 스토아의 전철을 밟아선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겪어서 안다'는 말은 '소피아'라는 단어입니다. '지혜'로 번역됩니다. 참 지혜는 겪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겪어 아는 것이 관계를 타고 흘러넘치길 바랍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겪는 공동체, 그리스도를 닮은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마음에 두고, 우리의 가온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의 호흡으로 시와 찬미를 부릅니다. 이 '가온'은 앞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담은 가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품은 가온안에는 하나님도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감사의 숨결로 그 분을 창조적으로 경배합니다. 시를 쓰고, 아름다움을 높입니다. 노래는 진동이니, 우리가 목소리를 써야만 노래가 아닐 것입니다. 그 분의 뜻에 맞추어 사는 삶의 모든 진동들이 다 노래입니다. 그래서 말로해도 노래요, 일로 해도 노래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어린양의 문을 지나갑니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예수입니다. 그는 양의 문이십니다. 날마다 피로 그린 문이 우리의 눈 앞에 있습니다. 그 문을 날마다 지나갑니다. 새로운 시절을 날마다 맞습니다. '그이를 통하여' 새 시대를 맞으니,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542日 (31년 7개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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