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개인'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점이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언제부터 사람이 공동체적 삶을 잃고,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었을까요? 시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가 공동체를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자본의 혈관과 미디어의 신경망으로 얽힌 공동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럼에도 각기 지체는 다른 목적을 생각하며, 서로를 돌보지 않습니다. 현대사회는 한센병과 같습니다. 영양이 끝까지 공급되지 않고, 끝이 잘려나가도 아픔을 모르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 몸으로 모인 교회도 이 개인주의의 문제를 고스란히 겪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를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날드 사이더 박사가 'Churchless Born-againism'이라는 말을 썼는데요. 우리말로 하면, '공동체 없이도 거듭날 수 있음'정도가 되겠습니다. 즉, 하나님 뜻따라 사는데 있어서, 공동체는 선택 사항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자신에게 적합한 서비스를 찾아 모인 개인들이지, 공동체로 융화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예배 때에만 잠깐 얼굴을 보고 헤어지는 사람들을, 세상을 함께 뒤집어나가는 전우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공동체는 말씀을 구현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홀로 말씀을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공동체는 서로 세워나가며 말씀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마치 꿈만 같습니다. 좋기는 한데, 오늘날 현실과는 너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 이뤄짐을 날마다 경험하고 살았던 데에는, 그들의 특별한 공동생활이 있었습니다. 자기 가진 것을 제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 나누며 빈곤을 극복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가 역사가 예고한,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방법인 '언약 공동체'라는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생활의 이름이 '코이노니아'였고, 이 말이 나중에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들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가정으로 선회해서 다른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편지들이 '교리'와 '실천'으로 나누어져있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이지, 저렇게 나누어 보는 것은 지(知)와 행(行)을 나누는 것이 익숙한 인간 지성의 오해일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지난 본문의 '한 몸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의 연장선입니다. 즉 예수 공동체의 공동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1]
우리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남편이자, 자녀이자, 아버지입니다. 저 구절을 편나누기로 보면 싸우기 딱 좋은 구절입니다. 아내들은 주장할 수 있지요. "우리가 왜 남편의 아래에 놓입니까?" 남편들도 할 말이 있습니다. "아내들이 우리를 먼저 쓰라리게 했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까?" "너, 성경에 부모 말을 경청하라 써있지 않니!", "아버지, 왜 나를 자극하세요? 자극하지 말라고 써있는데?" 맥락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자기정당성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기가 참 쉬운 구절들입니다.
그럼 이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맥락은 무엇입니까? 언약 공동체입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새로운 가족입니다. 그 가족은 용서로 시작합니다. 어제, '여러분은 옷 입으세요'로 시작한 어제 본문에 용서가 이미 나왔습니다.
만일 누군가 어떤 이를 향해 흠잡은 일이 있다면,
그 때마다 용서함으로 기쁨을 누리면서 말입니다.
마치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이 용서로부터 시작하겠다는 사람들이 예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누군가의 아내이기도, 남편이기도, 자녀이기도, 아비이기도 한 것입니다. 가정이 최소 단위가 아니라, 가정도 이 공동체의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가정이 잘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것이 최종 목적일 때, 어떤 꼴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NIMBY,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이 집단 이기주의의 동력이 바로 가정입니다. 내 가정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뭉친 집단이 사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니 어느 한 쪽의 승리를 정당화하는 관점으로 저 구절을 읽을 수 없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싫어할 오늘 본문의 첫줄은, 결코 여자들의 패배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공동체의 성립 원리를 말합니다. 그 원리는 '이타'입니다. '이타'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공동체의 중심의 죽고 사신 주님이십니다. 그 분 없는 사회의 중심에는 죽음이라는 블랙홀이 있습니다. 그 블랙홀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 '이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콩쥐팥쥐의 두꺼비와도 같습니다. 죽음의 블랙홀을 온 몸으로 막으시고, 게다가 콩쥐가 부어놓은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곧 물질의 변화입니다. 예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이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부활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 달려가는 생물학적 몸이, 새롭게 되어 생명 그 자체가 될 그 날입니다.
이렇게 보면 본문이 시원합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섬깁니다. 아버지와 자녀도 서로 섬깁니다. 중심에는 하나님 아들의 용서가, 그 주변부에는 그 아들이 부어주시는 숨결로 가득합니다. 예수 공동체입니다. 타락을 뒤집는 언약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는 재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전쟁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여자와 어린아이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찬밥신세가 되고,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여자와 아이들은 전리품으로 여겨졌습니다. 평등하게 창조된 남녀의 인권이 망가지고, 아이들을 노예 부리듯 부리게 된 것은 <성경>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서 인권차별의 흔적들을 찾아,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니냐며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텍스트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어떤 구절이든 그 안에서 뜻을 찾으면 찾을 수 있고, 똥을 찾으라면 못찾을 것 무엇입니까? 제 눈에 보고자 하는 것이 보일 뿐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차별당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났음을 봅니다. 특히 맨 뒤에 있는 구절, "아이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A.D. 1세기의 예수 공동체 안에서 피어난, 모든 사람들의 관념의 관성을 깨고 나타난 이 새로운 의식의 흐름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습니까?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이 분명합니다. 옛사람으로부터의 출애굽 말입니다. 신인류의 탄생 말입니다.
[2]
종과 주인의 관계를 말하는 두번째 단락도, 예수 공동체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분명해집니다. 저는 바울이 이 내용을 중의적 의미를 염두하고 쓰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수 공동체는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주인도 있고, 노예도 있었습니다.(그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예수 공동체 안에서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앞에서 보았던 상보적 관계가 드러납니다. 종도 주인도, 용서를 시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관계로 돌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종에 대해서는 내용이 많은데, 주인에 대해서는 내용이 적습니다. 제가 단락을 잘못 잘랐을 수도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 주인에게 해당하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시 콜로사이 지역의 예수 공동체에는 주인보다는 종이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바울이 종에게 쓴 저 내용은 종들만 읽어선 안될 내용으로 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쓴 내용 아닙니까? 그럼 모든 사람이 종이란 말입니까? 아, 예수 공동체는 참으로 그러하군요. 바울도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이라 칭했으니 말입니다.
종들은, 모든 신체를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자 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주님을 경외하는 일이 됩니다. 본문에서 '모든 일들이 하나로 꿰뚫린'이라 풀어놓은 말은 '하팔로스'로, 영어로는 simple입니다. sim은 '하나'요, ple은 여러 국면이 겹친 것입니다. 이 겹친 여러 국면을 하나로 관통하는 원리가 곧 simple입니다. 모든 일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순한 원리가 주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종입니다. 이것이 저급한 노예의지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함입니다. 이 일에 깊은 호흡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상속자임을! 사람을 사람으로서 섬기다(그 사람을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을 상속으로 받으셨음을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듣고 믿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감은 부활입니다. <신명기>를 몸에 입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부활이 먼저 약속되었습니다. 미래의 소망이 던져졌습니다. 마치 당구공이 던져졌으니 큣대를 바로 세우고, 자세를 고치는 것과 같습니다. 미래 소망이 먼저 던져졌으니, 현실의 삶을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깊은 숨으로 힘껏 자세를 고쳐나갑니다. 당구공 위치를 내 자세에 맞게 바꿔달라고 하는 건 당구 치기 싫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당구공 말고 테니스 공으로 바꿔달라고 해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참으로 인간다움이 드러났는데, 다른 소망을 달라고 하는건, 신을 못미더워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인간다움에 대해서 달리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탁월한 규칙 안에서, 점수를 얻는 게임의 즐거움을 가르쳐줄 차레입니다.
곧 돌봄입니다.
즉 올바르지 않게 행하는 사람은
그 올바르지 않음에 대해 돌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게 행하는 사람은, 그 올바르지 않음에 대해서 한 대 얻어맞는게 아니라, 돌봄을 받게 될 것이라 써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돌봄이 필요합니다. 올바르지 않게 행동했다고, 그 사람 전부를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해버리면, 이 사람은 더욱 올바른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리 안에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얻어가는 삶의 즐거움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누가요? 돌봄은 예수 공동체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image를 극복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눈에 뵈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사람을 참으로 돌볼 수 없습니다. 눈에 뵈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 세상의 몰골을 우리는 지금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림자만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빛은 너무도 눈부셔서, 빛을 직면하려다간 우리의 눈이 실명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인간에게 너무 높은 윤리수준을 요구한다는 푸념은, 빛을 보기에 눈부시다는 말과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높은 기준인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인간이 망가진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빛이 참으로 인간답다면,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의 현주소는 그만큼 인간다움과 거리가 먼 참혹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할 수 없다니요, 용서할 수 없다니요. 빛을 볼 수 없는 인간은 고개를 떨구고 그림자만을 봅니다. 그런데 그림자는 시시때때로 변해서, 이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막다른 골목입니다. 빛을 보려하나 볼 수 없고, 빛을 보지 않으면 그림자를 따를 뿐입니다.
그래서 구름이 있습니다. 구름은 빛을 가리지만, 빛을 없애지 않습니다. 구름은 빛과 함께 하늘의 장엄함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은 우리 속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천(人內天)입니다. 하늘과 우리 속은 하나입니다. 우리 속에 하늘의 뜻을 느끼고 판단하게 하는 불씨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을 양심이라 부르던, 도덕이라 부르던, 윤리라 부르던 좋습니다. 하여간 우리의 날마다의 삐뚤어짐의 대척점에 서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연소에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학교서 배웠습니다. 하나는 탈 것이요, 또 하나는 산소요, 또 다른 하나는 발화점 이상의 온도입니다. 우리 속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속이 하늘과 같이 밝아져서, 갈 길 알게 되려면 불이 필요합니다. 탈 것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온 몸으로 사셨던 바로 그 삶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먹어서 속에 넣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숨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 속에 연소를 위한 산소를 불어줍니다. 불씨는 다들 있습니다. 사람이 타락하더라도, 속에 이 불씨 하나는 남아 있었습니다. 이 불씨 위에 말씀이 떨어지고, 그 위에 숨 불어오니 속이 환해집니다. 이 빛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속이 환한 이가 그리스도입니다. 속이 환해지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됩니다. 어둠 속에 발 딛는데, 망설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 속에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면 세상이 거꾸로 뒤집힙니다. 멀쩡히 눈뜨고 있으나, 어디로 갈지 몰라 정처없이 사는 이가 소경입니까? 아니면 눈에 진흙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으나, 그 마음에 불이 있어 실로암으로 더듬더듬 찾아가는 이가 소경입니까? 당신의 세상은 뒤집혔습니까?
[3]
오늘 우리는 주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로 정초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노동력에 빚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노동력에 빚졌으니 주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떳떳해선 안됩니다. 죄송한 마음이 있어야지요. 그러니 이 주인들이 자신을 섬겨주는 이들을 의로움과 공평함으로 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괴물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괴물의 이름은 '유통 구조'입니다. 무엇 하나 생산하지도 않으면서, 온통 이미지들만 붙여놓고서, 종과 주인의 사이에 서서 양쪽을 죄다 피흘리게 만드는 괴물입니다. 그런데 이 괴물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무어라 불러야 마땅할까요? 아닙니다. 제 공상이 지나쳤습니다. 배역이 무엇이건 간에 사람은 다 사람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 인생 속에서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을 두고 여러 관계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내든, 남편이든, 자식이든, 어버이든, 주인이든, 종이든.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관계의 핵입니다. 모두가 중심입니다. 이 사람이 하늘에 사람을 다스리시는 분 계심을 아는 것부터가 참된 관계의 시작이겠습니다. 그 하늘을 받아들이면, 하늘은 우리 속에도 있고 우리 밖에 있게 됩니다. 이 생각하면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일으키시는 분이 계시니, 우리는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어나면 관계 전체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괜히 일어나는 거 아니라, 부활로 일어납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일어납니다. 나만 일어나지 않고, 나와 연결된 모든 관계를 일으킵니다.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러할 사람들이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곧 약속된 한 몸, '예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