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우리는 요즘 날마다 이 나라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우리의 지도자라고 세워놨던 이들은 모두 그 모양 그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구탓을 하겠습니까? 자기 생존만을 추구하던 선장이나, 그 참혹한 현장에서조차 자기 얼굴 사진에 박는 일만 중요했던 정치인이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누구 탓을 하겠습니까? 돈 따라서, 명예 따라서, 자기 생존만을 위해 살았던 것은 우리도 공통입니다. 이 나라 살고 있는 어느 누구를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았더라도, 우리는 이 아픔을 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는 안들어가면 큰 일나는 줄 알고, 사교육에는 이 돈 저돈 다 끌어다가 부어놨지만, 결국 하나를 가르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책임감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데, 우리가 이것 기르는데 사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은 뒤늦게 사력을 다해야 하는 아픔을 겪는 것입니다. 그 대가로 우리의 푸른 시절들이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습니다. 바로 인격입니다. 우리가 인격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봅시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남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줄 수 있었겠습니까? 남들을 구조해주느라 그 차디찬 물속에 남아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자기 목숨 하나 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아랑곳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이 선장입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구조는 형편없이 진행되고, 청해진 해운에서는 이 선장이 뭔가를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지 않았어요. 책임질일만 있고, 권한은 없는 상황 속에서 배에서 가장 마지막에 내릴 수 있겠습니까? 들여다보면, 다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믿지 않으면 내릴 수 없는 결정들입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이 사회가 정말 불신의 사회라는 것인데, 우리는 이 불신을 뚫어낼 수 있는 그 마음 깊은 곳 무언가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격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크게 하는 일에 전심전력 했느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나보다 중요한 더 큰 것을 품은 인격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돈이면 안됩니다. 명예면 안됩니다. 권력이면 안됩니다. 생계면 안됩니다. 주변에서 압박이 들어오고, 생명에 위협이 들어와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더 큰 것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올바른 판단을 비로소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 없이는 올바른 판단도 없습니다. 

  교육. 한 사람의 인격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을 가리켜 교육이라 하지 않습니까? 만약 교육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교육이겠습니까? 다른 사람 위해서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따뜻함을 가진 사람을 길러내는게 이 시대의 참된 교육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인격을 길러내는 것을 교육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교육에 이 나라는 통째로 전부 실패했습니다. 여러분의 성적이 여러분들을 살려내지 못해요. 여러분의 잘난 성적은, 죽어가는 옆 친구와 상관없는 숫자놀음입니다. 우리 각자의 스펙과 성적이 아니라, 인격을 생각해볼 시간입니다.  공교육도, 사교육도, 어른들도, 모두 이러한 인격의 사람 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사람 없는 와중에 서로에게 책임만 미루다가 생긴 참사가 오늘의 참사입니다. 어른들은 돈 따라서 명예 따라서 생계 따라서 올바른 선택을 내리지 못했고, 이것들이 쌓였습니다. 그 결과 무수한 아이들이 그 잘못된 선택 밑에서 죽게 생겼습니다. 이러한 판국에 우리는 아침에 모여서 성경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한 번 자신들에게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왜 보느냐? 예수를 왜 믿느냐? 이 사건과 성경이 무슨 관계가 있냐?

  성경이 어떠한 책입니까? 가장 극한의 상황 속에서, 모두를 사랑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아닙니까? 이 이야기에 푹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왜 이 상황에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 상황을, '내가 그 사람이다'하고서는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닦고, 날마다의 일상속에서 생각하고 움직이고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를 닮아가는 일상 속에서 나를 끊임없이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극한의 상황을 마주 했을 때, 올바른 선택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에 푹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맞닥뜨리는 모든 삶의 상황들을, 그 이야기에 비추어 생각해보고, 선택하고, 움직여봐야 합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수학 문제 하나 이해하고 푸는 것도 하루 아침에 되지 않았는데, 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인격 기르는 일이 하루 아침에 완성될리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작할 수는 있어. 오늘이 그 날 될 수는 있어. 오늘 학원가고 공부하는 루틴중에 하루가 아니라, 내가 예수가 되는 그 날이 될 수 있어. 

  이번 사건 겪으면서 저도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아, 시험기간인데', '얘네는 학생인데' 이 생각으로 나도 여러 말과 행동을 주저하게 되는거에요. 그런데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도 미쳤던 거에요. 생명 없이는 공부도 없습니다. 생명과 공부는 같이 갑니다. 왜 책을 보겠어요? 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겠어요? 살리자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생명과 죽음과 무관하게 책상에 앉아 있다면, 당신도 잘못된 결정으로 남을 죽이게 될 형편이에요. 그러니 깨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날마다 살리자고 책상 앞에 앉아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예수로서 책상에 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이야기. 곧 죽어도 예수 이야기. 그 안에 푹 들어갔다 나오는 것. 그래서 그 분을 이해하고, 그 분을 아는 대로 살아내는 것. 다른 것 없습니다. 시대가 원하는 사람. 지옥같은 곳에서 별과 같이 빛을 발하는 사람.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공부도 예수 안에서, 직장도 예수 안에서, 내 삶 전체가 예수 안에서. 그의 생각과 선택과 판단이 나를 덮고, 타인을 덮고, 죽음마저도 덮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 하나 입에 풀칠하게 하는 성적과 기술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를 살게 하기 위해 고난 받을 줄 아는 인격을 기르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텔레비젼을 마주하니 우리는 모두를 위해 죽는 그 분이 얼마나 가치로운지 아프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나의 인격에 심어 열매 맺기에 최선 다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위기 속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의 말숨. 자신을 내어주어, 세상을 살게 하는 그 넓은 마음이 이 시대에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1.

마가복음 13:28~37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에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워라 하십니다. 비유가 무엇입니까? 주변의 익숙한 사물들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을 가리켜 비유라 합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 라는 이스라엘에서 익숙한 나무을 가지고 무언가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그 이름처럼 꽃이 없고, 잎이 나면 곧장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꽃이 아니라 잎을 보고서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나뭇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나는 것으로 여름임을 알게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우리가 앞에서 확인했듯, 이스라엘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입성하기 전에 무화과나무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지 않으니 말라버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꽃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려함, 아름다움, 잘남, 남들의 인정받음, 이런 것들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열매가 중요합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내는 계절이 여름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잎이 무성하게 핀 여름, 그 잎 아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럼 예수의 비유는 어떠한 것을 얘기해주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기 시작하였으므로, 이제 열매를 맺게 될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름입니다.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열매가 어떠한 것인지도 압니다. 이사야서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공평과 정의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공평과 정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맺힐 것인가? 정리해봅시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가 준비됩니다. 그래서 열매 맺을 철인 여름이 다가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열매 입니까? 제자들이 지금 성전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이 마가복음을 읽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내용을 차근차근 이해해왔다면,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공평과 정의의 열매임을 알 것입니다. 이것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이것이 이뤄지냐는 것입니다.

  이 때쯤 인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이스라엘의 열매인, 세계에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 그 일이 인자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공평과 정의를 다른 말로 하면 세계 평화 아닙니까? 누가 감히 어느 한 사람을 통해서 세계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자를 통해서. 그리고 인자는 우리도 알다시피, 예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 아닙니까?

  이제 인자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세계 평화를 이룰 한 사람이 이제 다 왔다. 사람들이 안 믿을 것 같으니, 말을 보태십니다. 세상이 다 없어져도, 이 말은 맞는 것이다. 인자를 통해 세계평화가 이뤄진다. 너희 세대. A.D. 1세기를 살고 있는 너희 세대 안에, 이 일이 이뤄진다. 인자를 통해 세계평화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할 것이다.

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나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런데 인자가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는 그 때는 언제인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 합니다. 그 날은 인자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러니 이 날이 언제인지 셀 생각하지 말고, 공평과 정의로 사는 일에만 힘써라. 이 일이 인자를 통해서 이뤄진다. 이것만 믿고 실천해라.

  우리 삶속에서, 정의가 패배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공평이 이뤄지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정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정의와 공평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여러분의 학교가 정의롭습니까? 사람들을 지식의 정도로 줄세우는 짓을 하면서 어디 정의롭다 말할 수 있습니까? 넓은 인격의 사람 키우기는 커녕, 서울대에 들어가냐 안들어가냐에 목매면 정의소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정의롭습니까? 중산층이 없고, 가진 사람을 더 많이, 없는 사람은 더 없어지는 이 나라를 어찌 정의롭다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다른 얘기를 떠나서 우리 얘기를 해봅시다. 우리는 정의롭습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믿어야 합니다. 예수가 이겼다. 이 말이 어떻습니까. 예수가 이겼다. 이걸 믿으면 우리도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정의는 믿음대로 됩니다. 이겼다 믿으면 이깁니다. 졌다 믿으면 집니다. 예수가 이겼음을 믿었는데, 우리가 불의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정의롭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정의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 정의이지, 특정 사람들만 살게끔 하는 것이 정의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진짜 정의는 원수마저도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싫어하는 이들이 사람답게 살길 바라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자꾸 세상이 이것 못하게 하니까, 깨어 있으십시오. 혹, 여러분들이 이 사람 저 사람 편을 나누고 있다면 그 편을 당장 깨부수고, 가장 사람다운 삶을 사십시오. 만약 여러분 주변에, 소외당하고, 왕따 당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부당하게 금이 그어있다면, 그 인간답지 않은 금을 치워버리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 정의입니다.

  예수는 다른 것 아니라 이것을 원하십니다.

3.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른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이제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살펴보았던 12장을 떠올립니다. 그때 소작인 비유를 살피지 않았습니까? 주인이 노동자들에게 자기 포도원을 맡기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 주인은 왕자였는데, 왕으로부터 모든 대권을 물려받기 위해서 길 떠났던 것입니다. 왕자가 먼 길 떠나서 하늘로부터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물려받은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왕자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진정한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즉, 이 구절은 승천 사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승천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심판의 권세를 이양받는 인자였음이 온 세상에 선언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도 승천 이후에, 전세계로 흩어져 그 사실을 전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왕의 전령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모든 세상의 왕이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승천하는 것, 인자가 구름타고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인도되는 것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령이자 증인입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 예수가 진정한 세상의 왕이심이 드러나기 전까지, 제자에게 배신 당하고, 고문당하고, 매질 당하고, 십자가에 달릴 때, 제자들은 지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야 했을 것입니다. 내가 승천으로 세상의 왕이 드러나기 전까지, 너희는 깨어있어야 해.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자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그 방식이, 우리의 생각과는 정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그 정반대의 방식을 보고 우리는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꿰뚫어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 정반대의 방식, 우리의 모든 예상을 뒤엎는 방식을 보여주실 일만을 우리는 남겨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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