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44~52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0.


  
  지난 이야기를 먼저 확인해봅시다. 우리는 지난 주 겟세마네에 갔었습니다. 기름짜는 틀. 그 곳에서 예수는 자신을 온통 짜내셨습니다. 살고 싶다는 자신의 생존 욕구, 그렇게 끔찍하게 죽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모든 것이 이렇게 끝이 나야 하냐는 절망감. 그 모든 것들을 짜내고, 자신을 하나님으로 채우셨습니다.

-잠
  이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모두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꿈은 악몽이에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악, 그 악의 손바닥 위해서 바둥거리는 끔찍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탄은 끊임없이 예수에게 속삭였습니다. 세 가지 시험. 먼저는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을 빵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냐는 했습니다. 그러면 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냐 유혹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그저 예수 한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괴로워 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전체의 75%였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순간, 예수는 이 75%의 민중들의 지도자로 추앙받을 것입니다. 오병이어 때 보지 안았습니까?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몰려든 광경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장면 역시 변형된 사탄의 시험이었습니다. '민중들의 지도자가 되고 싶지 않아? 그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아?'

  두번째 시험은 무엇이었습니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을 때 천사가 받아주면, 사람들이 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해주지 않겠어?' 즉 하나님이 있나 없나 테스트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전 이스라엘 사람들도 광야에서 똑같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테스트해보려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시험은 나머지 15% 의 지도자가 되라는 시험입니다. 성전은 어떠한 곳입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바로 이 장소에 모여 있습니다. 이 건물에서 뛰어내려서 멀쩡하면, 가뜩이나 기적, 표적을 요구하는 이 지도자들이 예수를 인정 안하겠습니까? 지도자들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사탄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도자들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아?'

  마지막 세번째 시험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서 사탄은 말합니다. '나에게 한 번만 절해. 그럼 이 이스라엘을 통째로 너에게 줄게.'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곳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사탄이 보여주는 이스라엘에는 증오와 폭력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로마와의 전쟁을 위해 준비된 싸움꾼들입니다. '이들을 줄테니, 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보지 않겠어?'

  이 세 가지 시험을 '민중', '지도자', '폭력'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인기', '권력', '전쟁'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내가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내가 힘있는 사람들과 친해지며, 어떤 사람들을 힘으로 짓이겨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사탄은 동일한 것을 묻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온갖 문제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잠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허황된 꿈을 꿉니다. 인기로 민중을 선동하면, 지도자와 권력을 공유하면, 폭력을 가지고 하는 전쟁이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허황된 꿈을 꿉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것은 공상이고, 망상입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자의 헛된 꿈입니다. 문제를 오히려 심각하게 만들 것입니다. 다른 것 둘째 치고, 이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민중들을 선동하면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통일은 경제 효과로 산출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민족의 숙제입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통일이 먹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문제인 줄 모르면 우리는 통일 못합니다. 그럼 권력자들이 잘 하면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 분단조국의 현실을 틈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자들입니다. 아니면 어느 한 쪽을 박살내버리면 통일하고도 마음이 떳떳하겠습니까? 6.25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 민족의 정신은 되돌리지 못할 치명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깸
  그럼 무엇입니까? 깨어나야 합니다! 이 생존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바로 보입니다. 깨고 나면,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보입니다. 나의 옳음을 인정받는 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보입니다. 강압적 힘을 쓰는 것이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인격입니다. 나의 인격입니다. 목숨보다 중요한 것을 깨달아, 그것을 올곧이 따라가는 빛나는 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인기로도, 권력으로도, 폭력으로도 일하지 않으십니다. 인격으로 일하십니다. 예수께서 사탄의 소리에 귀를 막으시고,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맘으로 채우셨습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기도! 나를 짜내어, 내 안을 사탄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기름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온통 짜내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에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의 기름입니다. 성령. 거룩한 영. 곧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의 인격에 부어집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자신을 짜내시고, 하나님과 같은 맘 되셨습니다. 깸입니다. 생존의 잠에서 눈을 뜸입니다. 

  그럼 이제 이 깨어난 자가 무엇을 할지가 남았습니다. 이 깨어난 자가 어찌 행동하는지를 눈 여겨 봐야겠습니다. 이 걸음이 하나님의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 이 땅을 밟고 걸으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방법을 보여주십니다. 오, 예수여, 오 하나님이여! 이제 이 하나님의 맘과 같아진 사람은 해골언덕을 오를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사랑하던 민중의 침뱉음을 당할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지도자들은 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개와 고양이 관계처럼 서로 못죽여서 안달이었던 이스라엘과 로마가 웬일인지 한 자리에 모여 이 사람을 죽이는데 모든 폭력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우리는 이제 십자가의 이야기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전날 밤입니다. 예수가 그 유명한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날 밤. 깬 자가 붙잡히던 그 날 밤.

1. 그 날 밤의 지도자들

-군호, 첩자, 칼과 몽둥이


  그 날 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이 몽둥이와 칼을 손에 들고서 예수를 잡으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예수를 파는 자, 가룟유다입니다. 이 사람이 이미 예수를 잡으러 오는 종교 지도자들과 군인들과 '군호'를 짰다고 쓰여있습니다. 군호는 '군사신호'입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누가 예수인줄 몰라보아 그를 놓칠지도 모르니,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예수인 줄 알고 그를 붙잡으라는 속내인 것입니다. 


  입맞춤은 존경과 용서한다는 의미의 몸짓입니다. 그러나 이 배신자는 끝까지 배신자입니다. 예수를 팔아재낀 것도 모자라, 그 예수께 하는 짓 또한 야비합니다. 예수께 존경을 표하는 입맞춤으로 다가갑니다. 예수는 그에게 입맞춤 해주십니다. 그러나 그 입맞춤은 존경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죽이겠다는 살인 의지였습니다. 그 입맞춤을 보고서 군병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붙잡습니다.



  이 장면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손에는 칼과 몽둥이가 쥐어져 있습니다. 서로 신호를 미리 정해놓고, 죽일 표적을 정합니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 첩자를 대동하고 나타나 예수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유대 지도자들의 방법입니다. 속이고, 음모를 짜고, 여차 하면 때리고 찌르려고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지도자들의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이 그토록 손잡으라고 말했던, 성전을 출입하던 지도자들의 정체가 이러합니다. 그들의 인격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속이고, 음모를 짜고, 폭력을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방법은 이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나 속입니다. 누군가를 빠뜨릴 함정을 파둡니다. 힘을 써서 누군가를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2. 그 날 밤의 강도들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그런데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의 옆에 있었던 제자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칼을 꺼내어 휘두른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대제사장의 종의 귀가 잘렸습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우리 예수님의 몸에 손대지 말아. 이것들아!'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잘라놓은 그 귀를 다시 붙여주십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니다. 만약 베드로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맘을 구하고 기도했다면, 예수의 생각을 절반이라도 이해했다면, 이렇게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칼을 휘두르는 것은 지도자들의 방법입니다. 그토록 예수를 시험했던 사탄의 방법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잠들어 있습니다. 아직도 자기 생존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도 된다는, 그 거짓된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칼을 쥐고 있는 손은 떨렸을 것입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폭력에 맞서는 또다른 폭력. 이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악몽입니다.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너희가 나를 강도라 생각하느냐?" 강도는 혁명가 입니다. 정권을 뒤집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강도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날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셨음에도, 예수를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그러한 혁명가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자신들을 위협하고, 자신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밤에, 예수를 잡으러 오히려 자신들이 강도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들고, 첩자를 대동해서 말입니다. 누가 강도 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자가 강도입니다.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높은 자리를 탐하는 자가 강도입니다. 어떠한 방식이든간에, 다른 사람의 인격을 깔아 뭉개는 폭력을 인정하는 자가 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강도가 아닙니다. 이 밤에, 칼을 휘두른 제자와 유대 지도자들 무리가 강도입니다.


3. 그 날 밤의 도망자들, 그 속의 나


  방금 전 까지만해도, 함께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르던 제자들은 모두가 앞을 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싸울 의지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예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라길래,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줄 알았던니, 믿는 도끼에 발등찍혔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예수의 주위에 모두가 도망가, 그만 홀로 쓸쓸히 체포 당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도망가던 제자들 중에,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벗는 몸에 옷 하나만 걸치고 예수를 따라오던 청년이 있었는데, 군병들이 자신을 붙잡으니까, 그 겉에 두르고 있던 옷을 버려두고, 더불어 예수도 함께 버려두고, 알몸으로 도망했던 한 청년입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가입니다. 마가복음을 저술한 이 일의 목격자 자신입니다. 그는 이 구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예수를 홑이불과 함께 버려두고, 부끄럽게도 알몸으로 도망쳤던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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