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지난 주 '죽음'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오늘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먹힙니다. 땅으로부터 난 것을 먹어야 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죽여서 먹어야 살 수 있고, 또 누군가의 양분이 되기 위해 죽어 땅에 묻힌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땅과 순환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왜 우리는 먹고 먹히며, 죽이고 죽게 되었을까요? 불교나 도교는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사람의 인격이 삐뚤어져 하나님과 닿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은 에덴에서 쫒겨나고 이러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즉 삐뚤어진 인격, 다시 말해 죄 때문에 인간의 몸이 땅과 순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범인류적인 아픔입니다.

 

  인격이 삐뚤어진 사람은 그 다음 세대 가니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이라 생각한 삐뚤어진 인격의 사람은 자기 동생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이후 기륵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세기 4:17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최초의 살인자는 성을 지었습니다. 왜 성을 지었을까요? 자신이 타인을 죽인 것과 같이, 자신도 누군가가 죽일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류 최초의 담벼락이 세워졌습니다. 타인이 나를 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존의지로 가인은 성을 세웠고, 이후 생존을 위해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은 줄곧 성을 세웠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 성 안에서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얼굴에 땀을 흘리고 일해서 식물을 먹으라 하신 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과 힘으로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신을 먹여 살리도록 했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사상이 되어 사람들을 옭아 매게 되었고, 힘은 폭력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짓밟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성 안은 지배하는 자들과 지배당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들이 여기 저기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배하는 자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 아래 두고서, 성들은 점점 그 경계를 넓혀나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성'이란 말이 라틴어로 urbs인데,이 단어는 오늘날 '도시(Urban)'의 어원입니다. 


  하여간 그러다가 성과 성이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요? 전쟁이 벌어집니다. 폭력으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스포츠와 같이 반드시 승패를 가르려고 하잖아요? 전쟁에서 패배한 성읍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모두 다른 한 쪽성으로 흡수 됩니다. 지배당하는 사람들로 말입니다. 식민지, 포로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포로가 된 사람들은 1차 산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먹거리를 생산해서, 일하지 않고 지배하는 이들을 먹여 살립니다. 그렇게 전쟁하고 커지고 전쟁하고 커져서 세계는 거대한 제국이 여러번 생겼다 없어졌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이러합니다.





2.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입니다. 일하지 않고 지배하는 종교인들, 정치인들이 꼭대기에 앉았고, 그 아래에 있는 민중들은 실제로 먹거리를 생산함과 동시에 착취당합니다. 지도자들이 이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지식과 폭력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 마냥 사람들을 속여놨습니다. 다행히 이스라엘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군대를 두지 못해서 그렇지, 군대라도 두었다면 사람들을 얼마나 더 짜먹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밖으로는 성벽을 둘러놓고서 밖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로마와 싸워야 한다고, 안그러면 우리 다 죽는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언제나 뒷전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서 성전이나 으리으리하게 짓고 앉았고, 샤럄들을 선동하며 어떻게든 짜먹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 와중에 소외당하는 많은 사람들. 이스라엘의 생존을 부르짖는 동안, 그 안에서는 정말 생존을 위협당하는 사람들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뒷전입니다.


  지난 주 예수는 바로 이러한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고발 당하셨습니다. 죽이고자 결론 내려놓고서 증거들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던 예수. 그 예수를 끌고 간 이유는 그가 메시아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끌고 갑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유대 지도자들이 찾아간 곳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이젠 로마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로마도 하나의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농사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습니다.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획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카이사르 이후,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래서 지중해의 나라들을 죄다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농작물들을 생산하도록 하고 로마 본국으로 조공을 바치게 했습니다. 이걸로 먹고 살았습니다. 

  가장 꼭대기에 앉은 이는 카이사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지식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신이라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단이라는 폭력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났다고 떠들어도 많은 로마의 식민지 국가들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로마가 주장했던 것은 '팍스 로마나'였습니다. 즉 카이사르를 신이라 숭배하며 로마의 넓은 성벽 안 쪽에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하도 전쟁이 많았단 시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혹했습니다. '아, 그 전쟁 잘하는 카이사르라면, 세계를 통일해서 더이상 싸우지 않아도 될거야'이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카이사르 밑으로 들어온 민족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위해서는 카이사르가 세계를 재패해야 하는데, 전쟁으로 식민지를 넓히면 넓힐수록 지켜야 할 국경이 넓어져서 더많은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로마 시민권이 있는 남자만 군복무를 할 수 있었는데, 자국민들을 죄다 군대로 소집을 해도, 항상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들의 그리움은 일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국경만 잘 지킨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경 안쪽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지키랴, 안으로 지키랴, 로마는 팍스 로마나를 부르짖고 전진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된 평화를 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3. 


  그러한 로마에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끌고 간 것입니다. 죄목은 하나, "얘가 신이래요."

로마 황제만을 숭배해야 하는데, 자신이 신이라고 자처하고 나섰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십계명을 목숨처럼 지켜야 한다고 날마다 설교했던, 사람들에게 저 신성모독의 로마와 싸워야 한다고 사람들을 설교했던 이 유대 지도자들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빌라도의 심문이 시작됩니다.


막 15:1~5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빌라도는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서른살 먹은 청년을 하나를 유대 지도자들이 우르르 끌고 오다니 말입니다. 그것도 평소에는  로마 황제라면 이를 갈던 이들이 말입니다. 그런데 빗발치는 고소와 비방 중에도 예수는 말이 없습니다. 하신 말씀이 있다면,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느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내가 그로다"라고 대답하신 것 뿐입니다.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죄 있다고 뒤집어 씌우는게 뻔히 보이는데도 가만히 있는 이 사람이 참으로 기이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막 15:6~10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그리고는 제안을 하나 합니다. 지금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빌라도 앞에 끌고 온 날이 언제입니까? 겟세마네에서의 밤이 십자가 달리시기 전날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달리신 그 날은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입니다. 당시에는 명절을 맞으면 죄수 중에 한 명을 풀어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제안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와 더불어 로마에 고발당한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라바라는 사람입니다. 이사람은 혁명가입니다. 폭력을 써서 로마를 물리치자는, 로마 입장에서 보면 위험한 사람입니다. 로마는 언제나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가 지도자에게 이것을 주었습니다. 로마에게 까불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자 하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끔찍한 살해방법. 8시간 이상 나무에 매달려 체중 때문에 쳐진 폐가 답답해집니다.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주면 못을 박아놓은 팔과 다리에 통증이 더욱 심해집니다. 십자가. 바라바에게는 십자가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는 로마를 폭력으로 위협한 일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막 15:11~15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아마 빌라도는 예상하기를, 설마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겠나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리를 선동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를 봐야 합니다. 빌라도는 어떤 선택을 합니까?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님의 첫번째 시험. 민중을 만족시키는 선택을 합니다. 더불어 이 선택은 빌라도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를 죽이지 않아서 이 사람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팍스 로마나를 어떻게든 지키는데 민감한 로마가 빌라도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 모릅니다. 이 허울밖에 없는 가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빌라도는 민중들의 요구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4. 


  예전에 손마른 사람 고쳐주신 이야기 했던 것이 기억날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헤롯당과 바리새인이라는, 전혀 함께 할 일 없을 것 같은 견원지간의 두 파당이 예수를 죽이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손 마른 사람을 회당에 데려다 놓고, 고쳐주면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발하고, 못고치면 능력없다고 비아냥 거릴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 때 우리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살해하고자 하는 두개의 톱니바퀴가 회전하고 있다고. 그런데 예수는 그 손마른 자의 생명을 보고서, 그 톱니바퀴 사이로 들어가신다고.


  자신들의 생존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들이 대장인 사회체제를 지키는데는 보수요, 남의 생명에 대해서는 진보인 이들. 한 나라가 통째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들을 삼킨 제국이 통째로 그렇습니다. 그 나라와 제국이 돌리는 매서운 톱니바퀴로 예수는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말이 없으십니다. 내가 왕이다. 라는 말씀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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