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1) 창조는 선하다.

2) 이 세계는 두 가지 차원으로 창조되었다.

3) 하늘과 땅의 관계


2. 인간

1)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2) 하나님의 형상


3. 하나님-인간-세계



1. 창조는 선하다



   성서는 역사의 시작을, 이 문장으로 열어 재낍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1)

     

   바로 이 문장에서 우리는 역사의 바른 시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내용들에 주목해봅시다.



1) 먼저는 창조는 선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어진 세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지어졌습니다. 이 좋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토브' 라고 합니다. 즉, 창조 세계는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 '토브'인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악한 하나님'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 악한 세상을 창조한 신 역시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선합니다.


       생명이 태어났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정말 그것이 악하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난 것일까요? 우리는 아무 의미 없이 태어난 사람과 동물을 보며 의미 없는 아빠 미소를 짓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지으신 세계는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2) 이 세계는 두 가지 차원으로 창조되었다.


        '하늘과 땅'입니다. 즉, 성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하늘과 땅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늘은 그저 푸르른 하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생각해봅시다.

        먼저 '하늘'입니다. 잘못된 두 가지 이해를 살펴봅시다. 그림 그리는 주일학교 아이와, 우주 비행사의 경우입니다. 아이들에게 천국을 그려보라고 하면 어떻게 그릴까요? 하늘위에 있는 궁전을 그립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받아줄 것만 같은 수염 많은 인자한 할아버지를 그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늘이 아닙니다. 잘못된 이해는 아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에 다녀온 어느 우주 비행사는 지구로 귀환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늘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확실하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성서에 나오는 '하늘'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하늘'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거든요. ‘하늘’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그냥 우리가 보는 '하늘'이라는 의미

        (2) 우주. 유대인들에게는 '우주'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하늘이란 단어로 우주를 표현.

        (3) 그리고 하늘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차원'.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을 생각해보세요. 위의 의미를 적용한다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하나님의 차원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땅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영역’입니다. 다음 구절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 (시 115:16)



3) 하늘과 땅의 관계


        그리고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의 물음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믿음들이 있고, 그 믿음들은 다 이 하늘과 땅의 관계와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너무도 밀접한 이야기들이니까, 들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먼저는, 하늘과 땅이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리켜 '범신론' 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인도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신의 일부분이야" 그들에 보기에 하나님의 세계는 곧 인간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의 신적 세계는 곧 인간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신이 됩니다. 나무도, 돌도, 소도 거룩한 신의 일부입니다.


     또한 하늘과 땅이 결코 만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에피쿠로스가 그러합니다. 흔히들 에피쿠로스 하면, 쾌락추구라고 알고 있지만, 그 쾌락은, 신은 나를 도와줄 수 없으니, 내가 알아서 가장 바르고 검소하게 살아서 삶을 기쁨을 누리자는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나중에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에 찾아왔습니다. 이것을 '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은 시계공과 같아서, 지구를 정밀한 원리로 창조해놓고, 이 지구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즉,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신적 차원이 있더라도 오늘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다시 하늘과 땅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하늘과 땅을 보며 생각해봅시다. 하늘이 곧 땅인가요? 아니면 하늘과 땅은 만날 수가 없는 것인가요?



        하늘은 언제나 땅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땅과 결코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더불어, 이 다양성과 공존하는 조화로움도 보이십니까? 예술가의 손길입니다) 하늘과 땅은 언제나 붙어 있지만, 분명 다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인간의 영역과 분명히 분리가 되면서도, 언제나 인간의 영역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하늘'입니다. 신적 차원과 인간의 차원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는 범신론도 아니고, 이신론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차원은 인간의 차원과 분명히 분리되지만, 그럼에도 공존한다는, 이 독특한 해석이, 좁은 길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역사의 해석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늘은 땅을 지휘하는 관제탑이다." 즉, 하늘은 언제나 같은 공간 속에서 땅 위에 있으면서, 그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이 보이는 세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과, 그러한 땅, 즉, 이 하늘과 땅이 중첩된 세계가, 우리가 실제로 발 딛고 있는 세계의 참 모습이자, 이제부터 펼쳐질 인간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2. 인간


     이제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인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26~31)


     창세기 1:26~31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 질문입니다.


-인간은 왜 창조되었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인간과 창조 세계는 어떠한 상관이 있을까요?


-먹고 사는 문제를 얘기해봅시다.




1)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인간도 창조되었습니다. 시간처럼, 창조 세계처럼 말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선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게 된 인간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스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다스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한 창조 세계에 대한 다스림.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의 관리자로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죠. 다스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창조주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스림을 인간에게 일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그래서 이 세상의 일들이 인간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그 세계를 인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인간에게 맡겼으니, 더이상 이 땅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일을 인간과 함께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이 땅을 다스리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으로 창조의 선함이 유지되는 것.

          칸트의 말이, 이 내용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칸트는 행복이 조건으로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할 일입니다. 둘은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셋은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 만들어가는 희망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인간 창조 이야기에는 이 세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할 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떠맡긴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인간과 세계는, 생명으로 더욱 풍성해지는 미래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성서의 인간관을 요약하면, 

‘하나님과 함께 사랑의 교제 안에서 그 분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기 위하여 창조 된 것’입니다.


        목적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있게 된 것도 아닙니다. 세계 앞에 무력하게 굴종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악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떠나기를 갈망해야만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홀로 이 땅에서 고분분투 해야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2) 하나님의 형상


(창 1: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성서는 그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 따라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이 인간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놀이터에서 친구와 흙장난 하던 아이가, "이건 불공평해" 하고 말하는 순간, 그 아이는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정의를 인식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내어주는 누군가를 보며, 그 희생과 사랑에 눈물짓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만약 우리가 우연히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왜 우리 마음에 이러한 기준이 생긴 것입니까? 만약 악 조차도 신이라면, 우리는 왜 악을 인식할 수 있습니까? 성폭행 당하는 여자 옆을, 그저 지나친 당신의 밤은, 죄책감에 짓눌려 잠이 오지 않는 밤일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 입니다. 우리 안에, 옳음을, 사랑을, 정의를 인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적으로 표현하자면, 누군가 우리에게 이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옳음, 완전한 사랑, 완전한 정의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완전한 옳음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정의를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도 못한 완전한 것들을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진화의 과정을 거쳤던 그 어떠한 생물도 정의를 알지 못합니다.(자기의 새끼를 잡아먹는 구피에게 정의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그럴 수 있습니다. 유한하면서도 영원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말하는 이상한 존재. 인간입니다. 왜 입니까? 선하신 누군가로부터 우리에게 그것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옳음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느낍니다. 해보지도 않고 끄덕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인간의 잘남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땅을 진리로, 정의로, 사랑으로, 다스리게 하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탁월하신 하나님의 탁월한 '작품'입니다. 그것도 예술가의 '의도'가 들어있는 작품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의 의도가 있기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혹, 이러한 반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서의 관점으로 인간을 보는 것은, 인간의 무한함을 제한하는 것이다. 축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만약, 정말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 창조주의 의도는 결코 인간을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들판에 나가 꽃을 보세요. 창조주의 의도는 다양함 그 자체 아닙니까? 허나 빨갛고, 노랗고, 다양한 색깔 안에서 우리는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각각의 모든 개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창조주의 손 길을, 우리는 자연 속에서 확인합니다. 그러한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의도가, 천편일률적이거나, 인간을 축소시키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사실이라면,(이러한 조건문이 저에게는 어불성설이지만) 그 분의 의도는, (너무도 당연히)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일 것입니다.


   이러한 유비는 어떻습니까?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된 한 작가의 전시회 장면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같이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그림들이 다 그게 그거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각각 그림들의 고유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저와 달리 각각 작품들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그 전시회 전체 작품들은 모여서, 한 사람 예술가의 인격을 이해하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각각 다양하지만, 그것은 각자 따로 놀기 위한 개별화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창조주의 의도 안에서 모두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삶은, 한 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게 하는, 창조주의 작품들입니다. 이것을 유비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분의 의도가 너무 커서 상징이나 비유 아니고서는, 적절한 언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인간-세계

  

    신약성서에 보면, 인간을 '주인의 재산을 맡은 종' 이나 '청지기', '포도원 주인', '목자', '왕'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인간-세계'의 그림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의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땅을 다스려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마치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종처럼, 하나님의 양 떼를 치는 목자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을 다스리는 왕처럼.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창조된 세계를 가꾸고 다스리도록 인간은 창조되었고, 다스리는 왕으로, 세상을 섬기는 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의해, 하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주 예고!> "응? 먹고 사는 문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을 다스리는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는 인간을, 하나님이 굶기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먹는 것보다 소가 먹는 것이 3배나 많은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인형 뽑기 하듯 들어서 미국 땅에 집어넣어도 인구밀도가 우리나라의 4분의 1입니다. 즉, 하나님은 일부러 적은 자원을 주시고, 인간에게 배틀로얄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정말 넓고, 정말 풍족합니다. 하나님의 뜻 따라 이 땅이 다스려지면, 아무도 굶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29,30)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늘의 하나님이, 땅의 인간에게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복이 인간을 통해 이 세계로 퍼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 땅에 실현할 책임이 있고, 그러한 다스림 속에 먹고 사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됩니다. 지금도 매년 우리나라 인구만큼 아이들이 굶어 죽습니다. 지금도 수원역에는 노숙자들이 즐비합니다. 입에 김밥을 물고 달려가는 회사원의 발걸음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오늘날 전혀 해결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니, 좀 더 적실하게 말하면, 오늘날 이 땅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다음 시간에 배울, '타락의 역사'에 대한 단초를 얻은 것과 다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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