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한이 목격한 예수 이야기

  앞으로 여러분들과 성경 읽는 법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보려는 책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목격한 예수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응용할 수도 있지요. 그럼 <마태복음>은 무슨 뜻이겠어요? '마태가 목격한 예수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마치 살인 사건을 목격한 증인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줄곧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쓴 것이 복음입니다. 그 사람 예수요, 그 사람을 목격한 이 요한입니다. 이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바로 그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었고요. "사랑받는 제자"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죽임당했지만, 이 요한은 순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배웠듯이 안드레는 엑스자형 십자가에 달려 죽었었지요. 그 엑스자형 십자가가 스코틀랜드 국기가 되었다는 얘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요한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는지,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25~27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하는 제자"가 바로 요한 자신입니다.

  그럼 오늘은 요한이 쓴 요한복음의 첫머리를 살펴볼까요?


요한복음 1:1~8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숨 계시길 하나님 향해,
그리고 하나님이셨다, 이 말씀이.
그이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이를 통해 지은 바 되었으니
어느 것 하나도 그이 없이 된 것이 없다.

그이 안에 삶이 있었으니 이 삶이 사람들의 빛,
이 빛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고, 어둠은 그 빛을 감당 못했다.


1. 태초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는 이 구절을 읽고서, "요한이 이걸 왜 썼을까?"이 생각을 꼭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요한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마태복음을 볼 때는 마태의 생각을, 마가복음을 볼때는 마가의 생각을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게 순서에요. 그 다음 내 생각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이 말 참 이상하죠? 아마 요한은 고민을 많이 했을거에요. 요한이 자기가 너무도 사랑하는 예수님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데, 그 첫 구절을 대충 쓸 수 있겠어요? 아마도 어떻게 시작할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로 시작했어요. "태초에 말숨이..." 요한은 요한복음을 왜 이렇게 시작했을까요?


  요한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에요. 유대인이라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유대인 요한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열어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책의 첫 장을 펴보세요.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뭔가 비슷하지요? 요한복음의 시작도, 토라의 시작도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인데,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을 잘 들여다 보세요.


요한복음 1:1c

그리고 하나님이셨다, 이 말씀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씀이라 부르는 분은 한 분 밖에 안계십니다. 바로 요한복음의 주인공, 예수이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대범하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지금 요한은 토라의 첫 부분처럼 요한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이라는 책은 마치 새로운 토라를 써내려가듯 하고 있어요. 그리고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말하는 창세기 1:1처럼, 태초에 하나님이신 말씀이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만났던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태어나기도 먼저 원래 계셨던 분입니다. 요한의 말을 들어보세요.


요한복음 1:2

그이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러니까 요한이 보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자, 하나님과 태초에 함께 계시고, 말씀이신 분이십니다.


2.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이라고 말한 요한이, 이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모르는 얘기를 하지 않을 겁니다.


요한복음 1:3

모든 것이 그이를 통해 지은 바 되었으니

어느 것 하나도 그이 없이 된 것이 없다.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치 토라의 첫번째 책 창세기처럼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것은 그 창조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이뤄졌다는 충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아버지가 찌개가 먹고 싶다하셔서 마트에 다녀왔습니다. 마트에서 느타리 버섯과 파를 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봤습니다. 가을 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는데, 특히 하늘을 유유히 떠가는 다양한 모습들의 구름은 제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 감탄하며 보고 있는 저 하늘도 예수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겠구나! 요한도 저와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창조하는 모든 것들은 예수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모두 망가지고 고장나버렸습니다. 사람이 잘못되었더니,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하늘과 땅도 잘못되어 버렸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 살라고 마련한 지구가 지진을 일으켜 사람을 죽입니까? 왜 태풍을 일어나 우리를 슬프게 합니까? 그리고 이 땅에는 자꾸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그 억울한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들었다면, 미안하다고 하는 게 정상입니다. 미안한 정도가 아닙니다.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내가 잘못했다고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계속 죽어나가는데,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지만, 창조된 모든 것은 망가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입니다. 현시대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된 세상을 보시며, 하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창조된 세상을 보며 "보기 좋다"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보기 안좋은 일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도 그렇지만, 요한이 살던 시대도 그랬습니다. 요한과 우리는 똑같은 시작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타락한 현시대입니다. 우리는 이 현시대에서 나고, 현시대에서 자랐습니다.


3. 빛이 있으라!

  그 현시대에서 요한이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을 목격했기에 요한은 요한복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까요?


요한복음 1:4,5

그이 안에 삶이 있었으니 이 삶이 사람들의 빛,
이 빛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고, 어둠은 그 빛을 감당 못했다.


  요한은 빛을 얘기합니다. 요한은 그이 안에서, 메시아 예수 안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 빛은 그의 삶이었다고. 메시아 예수의 삶이 빛이었습니다. 왜 요한은 "빛"이란 말을 썼을까요? 요한이 지금 토라의 첫번째 책,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세요.


창세기 1:2,3
땅이 어지럽고, 비어있으며, 캄캄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땅이 어지럽습니다, 비어있습니다, 캄캄합니다. 이럴 때 꼭 필요한게 있습니다. 빛입니다. 밝은 방에 들어가서 촛불을 켤 필요가 없습니다. 정전이 되어서 캄캄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빛이 필요합니다. 태초의 어두움을 밝히던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이후 모든 만물이 그 빛 아래서 창조되었습니다. 이점을 기억합시다. 빛은 창조의 시작이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옵시다.


요한복음 1:4,5

그이 안에 삶이 있었으니 이 삶이 사람들의 빛,
이 빛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고, 어둠은 그 빛을 감당 못했다.


  세상이 현시대 속에서 어지러웠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어보였습니다. 어디로 갈지 몰라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시대 안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삶을 목격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요한이, 그 삶은 빛이었다고 말합니다. 왜 빛이겠습니까? 빛은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망가진 첫번째 창조를 고칠, 새로운 두번째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창조의 빛이십니다.


  그이의 삶이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러나 그이의 삶을 생각해보면, 밝게 빛나는 태양이 아니라 그 빛은 꺼질듯 꺼질듯 꺼지지 않는 촛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이의 삶은 늘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이의 삶은 평생 머리둘 곳조차 없을만큼 고단하고 힘든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아픈 사람들을 고치고, 모르는 사람을 알게 하고,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참말을 건내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끝은 비참한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러한 삶을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대개 사람들이 싫어하고 별로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4. 빛이 되는 길


에베소서 5:8
왜냐하면 여러분이 전에는 캄캄했지만, 이제는 주 안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아이들로서 걸어가십시오.


  이 말이 어찌 들리십니까? 이제 여러분은 남들이 정말로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은 예수처럼 사는 일입니다. 그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밝고 화려한 빛이 아닙니다. 마치 늙은 군인이 쓰러질듯 쓰러질듯 걸어가는 희미한 빛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때로는 외로운 빛, 누군가는 짓밟아 꺼뜨려 버리려고 하는 빛,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절실하여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대하는 빛, 여러분이 그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학교에 에클레시아를 세우자고 얘기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 학교에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저도 하지 못했던 일을 여러분에게 떠넘겼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친구들이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싸우고 있는 두 친구 사이를 중재하려고 할때, 오히려 양쪽 친구의 미움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밥 먹기 전 잠깐 기도할 때, 다른 사람의 눈동자들이 감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여러분을 이간질할지도 모르고, 때로는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어디 예상 못한 일입니까? 세상이 어두워서 악하고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생기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캄캄함은 놀랄 일도 아닙니다. 정말 놀랄만한 일은, 그 캄캄함 속에 피어나는 빛 아닙니까? 그 희미한 빛 때문에, 어둔 자리가 환해집니다. 빛은 어둠과 싸우지 않습니다. 어둠과 싸운다면 그것은 빛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빛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어두움이 있을 자리를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힘들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사랑입니다. 메시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창조의 빛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하기 위해서 힘들어도 버티고 견디고, 에클레시아로서 마땅히 보일 빛을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리가 환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빛을 내야 합니다. 메시아 예수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엄마 뱃속의 아이가 컴컴한 엄마 뱃속에 있다가, 엄마의 좁은 문을 지나 빛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컴컴한 뱃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과정은 힘들지만, 그때 힘주고 숨 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터널을 지나기가 무섭다고, 거기서 주차하고 있다간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빛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마치 파도가 덮치려 하고 뒤에선 파라오의 군대가 추격하는 그 길을 지나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지만 반드시 가야할 좁을 길로 밀어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 현시대 속에서 만나는 캄캄함은 빛이 되기 위한 길의 색깔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캄캄한 길을 빛으로서 조심조심 걸어야 합니다. 이 길의 끝에 메시아 예수가 계십니다. 그이가 우리에게 숨을 보내어 그 캄캄한 길을 걷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새 창조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러니 견딜만한 길입니다.


20161009_어린이예배.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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