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기적에 대해서


  오늘은 조금 길더라도,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지역에서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의 첫번째 기적입니다. 흔히 '기적'이라는 말이 '예수가 자신이 신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벌인 초월적 사건'으로 이해됩니다만, 이것은 기적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입니다. 예수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것은 기적의 목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오히려 '표적'이라 읽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것은 '표적'이란 단어가 "드러난 현상을 통해서 배후의 원리를 파악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는 '역(易)'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줄곧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은 닫힌 세계관이요. 닫힌 세계관 속에서는, 삶의 참 이치(理)를 자연(自然)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퇴계는 말하길, "도무형상(道無形象), 천무언어(天無言語)"라 했습니다. "길은 뵈임이 없고, 하늘은 말씀이 없으시다"는 뜻인데, 이런 상황 속에서 진리를 따르는 삶이란, 보이는 것을 통해서 이치를 깨닫는 삶이요, 그 보이는 모범이란 자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易)은 닫힌 세계관입니다. 계시 없이, 이해가능한 세계관 속에서 참을 찾자는 애씀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의 돌입입니다. 그리고 기적의 사건은, 사람에게 무언가 해석을 요구합니다. 즉 기적이란, 역(易)을 넘어선 초역(超易)이 드러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기적은 인간이 자연을 보고서는 깨칠 수 없는 무언가를 읽어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현대인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기적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상식적인 예수, 현실적인 예수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새로운 우주에 대한 단서입니다. 역의 닫힌 세계관을 넘어서, 더 큰 차원이 있음이 드러난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 대한 기록은, 곧 새로운 차원을 만나는 입구라 하겠습니다. 


1. 1층 : 토라의 서사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는 세 단계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치 3층 건물처럼 말입니다. 1층을 지나지 않으면 2층으로 올라갈 수 없고, 마찬가지로 2층을 지나지 않으면 3층으로 올라갈 수 없는 건물처럼 말입니다. 1층은 율법의 여섯 항아리 이야기입니다. 2층은 변화된 포도주 이야기입니다. 3층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치뤄진 혼인 잔치입니다. 


  이러한 구성을 염두하고 읽어내려 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독자가 '역사적'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독자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성서 전체의 역사를 훑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1층입니다. 1층의 율법의 여섯 항아리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맡긴 특별한 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토라입니다. 그리고 이 토라를 항아리 갯수에 따라 다음 여섯 가지로 요약해보겠습니다.


1) 창조된 우주와 인간

2) 인간의 타락과 망가진 세계

3) 해결책으로서의 이스라엘

4) 악으로부터의 구출 : 출애굽

5) 광야에서의 단련

6) 마침내 이뤄진 다스림


  율법의 정결 예식을 따라 놓인 이 항아리들은, 이 토라의 서사를 상징합니다. 이 서사는 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이스라엘에게 맡기신 것으로, 악의 문제에 직면한 인류와 세계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마침내 회복되고 새로워 질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여섯 항아리는 정말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의 이스라엘을 저 자리에 놓고 생각해 본다면, 저 이야기는 허구라 부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해결책으로서 신의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마저도 악의 일부가 되었고, 그러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히 실패한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2. 2층 : 새로운 포도주, 십자가와 부활


  그렇게 맹물을 남겨두고, 두번째 층으로 올라오니 포도주가 있습니다. 이 포도주는 '새로운 포도주'입니다. 여섯번째 항아리를 가득 채웠던 그 물이 변화되어 포도주가 되었다는 얘기가 이 기적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물에다가 포도 원액을 탄 것도 아니고, 물을 버리고 새로운 포도주를 탄생시킨 것도 아닙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곧 물질의 변화입니다. 


  에페소스 지역의 요한 공동체가 이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읽을 때, 이 물질이 변화된 사건을 보면서, 어떤 사건을 떠올렸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읽기는,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10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읽기입니다. 게다가 그들 공동체에는 그 부활의 예수를 직접 목격했던 목격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죽었던 몸이, 죽음을 극복하여 새로운 몸으로 변화된 사건. 게다가 이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의 시작이 "사흘째"라는, 강력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기적 이야기가 역사적인 의미를 읽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줍니다.


  포도주라는 상징은 겟세마네에서의 십자가 수난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이라 알려진 유월절 식사 중에, "하나님 나라의 새것으로 마시기 전까지는,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막 14:23~25). 그리고 이러한 특정한 때를 암시하는 대화가 이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 속에도 등장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그런가요, 어머니. 하지만 그것이 어머니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


  이러한 상징들이 겹치며 새로운 의미를 드러냅니다. 예수의 "때"는 마가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 나라의 새 것을 마시는 때"요, 하나님 나라의 새 것이란, 십자가 수난에 이은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바울은 "때가 차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해융에 묻힌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새로운 포도주" 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포도주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른 여섯 항아리 이후에 드러났습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은 당대 요한 공동체 속에서, 이스라엘 토라 서사의 정점으로 읽혔던 것입니다. 토라의 서사 없이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추후에 글을 쓰고자 합니다. (실존주의 이후 성경 읽기에 대한 비판조의 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포도주는 토라의 서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옵니다. 말그대로 물이 포도주가 됩니다.


3) 해결책으로서의 이스라엘

4) 악으로부터의 구출 : 출애굽 


  토라의 서사 중 3), 4)가 새롭게 됩니다. 즉 해결책으로서의 이스라엘이 가리키는 바는, 혈연집단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였음이 드러납니다. 예수가 해결책인 이유는 다름 아닌 십자가와 부활 때문인데, 저 사건들이 곧 악으로부터의 구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이해는 이스라엘 서사 없이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그간 이 서사를 간과했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을 비롯한 성경의 기적 이야기들을, 예수 almighty를 말하는 신화정도로 설익게 읽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즉 1층의 '율법의 여섯 항아리 서사'가 다시금 요청됩니다. 출애굽의 서사에서, 십자가의 예수는 출애굽의 희생양의 배역이고, 부활은 다니엘서 12장의 인자의 부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이스라엘의 서사 속에서, 유월절의 희생양이 다시 살아서 백성을 이끄는 왕이 되었다는 의미를 새로이 만들어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고, 종이 왕이 됩니다. 이 역설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3. 그 포도주를 나르는 사람들


  출애굽 이야기는 그 왕을 따르는 새로운 백성의 탄생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혈연 집단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이 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의 배역 속에서는, 포도주를 나르는 하인들이 맡은 배역입니다. 즉 "새로운 포도주의 소식(곧 '복음')을 알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본문에서는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들이 앎은, 물질의 변화를 아는 것이요, 이 앎은 예수를 통해 새로운 역사에 대한 앎입니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앎입니다. 


  또한 그 하인들의 길을 부활에 비추어 상고해본다면, 그들의 추구는 살몸을 지키고자 함도 아니고, 살몸을 버림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를 따르는 길은, 살몸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버리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기 때문에 좁은 길,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바울의 말 속에서, 물 떠가는 하인의 목소리, 부활왕을 따라 광야길을 걷는 사람의 울림이 느껴집니다. 


빌립보서 3:10~12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토라 이야기 안에서는 '5) 광야에서의 단련'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의 변화를 믿고, 날마다 자신과 세계의 새로움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복음서 읽기는 다층적인 차원을 염두해둡니다. 토라의 맥락, 예수의 맥락,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의 현실의 맥락을 가로 지릅니다.


4. 3층 : 완성된 혼인 잔치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 즉 이 여섯개의 율법 항아리와 새로운 포도주 이야기, 그리고 하인 이야기는 더 큰 이야기의 부분들입니다. 바로 혼인 잔치입니다. 이 혼인은 지금까지의 모든 부분 요소들을 전체로 묶는 거대한 틀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토라 서사 안에서,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수의 부활로 새로이 이해되어, (그 소식을 전하는 하인으로서) 몸으로 익혀나가는 토라 서사 안에서새로운 이해의 차원을 열어재낍니다. 그 이해는 끝내 우주에 닿게 됩니다.


1) 창조된 우주와 인간

2) 인간의 타락과 망가진 세계


6) 마침내 이뤄진 다스림


  성경에서의 혼인은 창세기 2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흔히 창세기 2장은 '결혼 정당성'을 위한 본문으로 해석되지만, 그 창세기 역시 계시록의 빛에 비추어 이해하면, 창세기 2장의 아담은 예수로, 여자는 예수 공동체(즉 하인들)로 고쳐 읽을 수 있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남은,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늘의 하나님이 땅의 인간과 하나되기 위해서라는 대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롬 1:16) 태초의 부부의 모습으로 서로 연합합니다. 그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우주의 대결말은 '혼인' 뿐만 아니라, 왕과 상속자의 이미지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창조된 우주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뤄집니다. 다스림이 이뤄지는 과정은, 어느 한 쪽의 폐기가 아닌 새로워짐을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을, 예수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와 요한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뤄진 우주에 대해서 " 하늘과 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새'가 예수에게, 그리고 그이를 믿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우주 전체에 적용됩니다. 그리고 새로워진 우주 전체는 부활을 따라 달려가는 광야의 하인들을 위한 유업이요, 그들은 예수와 함께 공동 상속자입니다.


  새로운 포도주를 통해서 혼인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질 것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신호탄이 부활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여 부활을 추구하는 이들의 목적은, 온 우주가 새로워지는데 있고, 이 새로움 속에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포섭되는 것입니다. 


5. 결론


  그 물질의 변화가 율법의 여섯 항아리를 채운 이후, 벌어졌고, 그 물질의 변화는 다시 혼인잔치의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하인들이 끼어있습니다. 즉 이 가나의 혼인잔치는, 단순 기적 이야기가 아닌, 예수의 부활 사건을 토라 서사의 정점으로 이해하는 예수 공동체의 세계관이 반영된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저는 이 기적 이야기가 '닫힌 세계관으로서의 역(易)'을 넘어서는 '초역(超易)'을 드러내는 이야기라 했습니다. '닫힌 세계관'이라 말함은, 역(易)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가 '생사(生死)'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나고 집니다. 죽음이 새로워져서, 그것이 완전한 삶이 되고, 이것이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새로워질 것이라는 흔적은 그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를 통해서 죽음으로 치닫는 아담의 운명으로서의 '생사(生死)'가 이스라엘 서사를 완성시키는 예수의 '사생(死生)'으로 뒤집히는 이야기입니다. '사생(死生)'에서의 '생'은 '생사'의 '생'과 같은 '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부활, 죽음을 극복하는 물질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닫혀 있는 역을 뛰어넘고, 그 역 마저도 변화시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는 역사 전체를 조망하며, 그 의미를 따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역(易)'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으로 초대합니다. 자신의 이해와 세계관을 넘어선 새로운 우주를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초대는 너도 물질의 변화를 '알고' 사는 하인으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가 이러한 이해를 요구한다면, 앞서 설명드린 해석의 틀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나머지 여섯가지 기적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넘어 삶에도 적용이 될 것이며, 마침내 우주 전체에도 적용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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