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야기


  오늘 우리는 한 편의 이야기를 보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우리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동물과 다르게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써가는 중이죠.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로또를 사는 아저씨는 어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아마 일확천금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로또를 사서, 그 번호가 그림처럼 들어맞고, 엄청난 돈방석에 앉는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 말입니다. 수험생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열심히 공부하는 전개와 발단을 지나,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결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정말 제대로 된 이야기냐'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이야기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시작과 끝입니다. 시작과 끝이 영원에 잇댄 이야기가 아니라면, 거짓 이야기입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로또에 당첨되는 이야기는 어떨까요? 그 결말은 돈방석에 앉는 행복한 결말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그 이야기의끝이라면, 그 이야기는 영원에 잇대어 있지 않습니다. 수험생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대학에 갈 수는 있죠. 그러나 그것이 영원에 잇대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이든간에, 정작 중요한 것은, 성도는,  크리스챤은, 나의 이야기를 버리고 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야기를 듣기 위해 왔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의 이야기를 버리고 신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 삼기 위합니다. 이 신의 이야기는 영원에 잇댄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만이 우리를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배역을 얻는 일이야 말로, 인생의 참의미를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미있습니다. 이런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책"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재미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그저 재미있는 것으로 그치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세상을 바꿉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을 세상을 바꿀 이야기, 그것은 요한복음 7장의 이야기입니다.

1. 요한복음 7장의 밑그림

  요한복음 7장 뒤에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밑그림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요한복음 7장 이야기를 재미있게, 의미있게 읽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의 시작을 같이 읽어볼까요?

요한복음 7:1,2

그 뒤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유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 지방에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유대 사람의 명절인 장막절이 가까워지니,


  여기에 보면 '장막절'이 등장합니다. 장막절은 유대인들의 명절이죠. 무엇을 기념하는 날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장막치고 살았던 날들을 추억하는 명절입니다. 사진 한 장을 함께 봅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장막을 짓고 다시 이동하고, 장막을 짓고 그렇게 가나안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물론 그냥 대강대강 얼기설기 아무렇게나 짓지 않았습니다. 각 지파대로 열과 오를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지었죠. 그리고 그 중앙에는 바로 성막이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막은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처가 중심에 있고, 그 주위로 이스라엘의 장막들이 쫙 놓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의 진영의 한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그 광야에서의 날들"을 기념했습니다. 이것이 초막절입니다.

  그리고 정보 하나 더, 요한복음 7장에서의 이스라엘은 곤경 중에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의 군홧발에 밟혀 신음하던 시절처럼, 로마의 지배 아래 놓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한 나날 속에서 초막절을 기념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로마가 지배하는 식민지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광야에서의 날들을 기념한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럼 초막절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죠. "하나님 이 어지러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세요!" 가 됩니다. 당시 성전에서 포도주를 붓고, 집 뒷 뜰에 간이 장막을 지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망하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다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세요!" 이렇게 줄여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메시아 강림의 열망", 이것이 요한복음 7장에서의 초막절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7:1

그 뒤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유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 지방에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아, 이럴수가! 저는 여기서 이 이야기의 탁월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막절이 어떤 날이라고요? "하나님 다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세요!" 그런데 그 초막절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예수가 계시다, 안계시다? 안계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7장의 시작입니다. 메시아 강림을 염원하던 이스라엘 사이에 예수가 안계시다는 역설! 무엇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메시아를 염원하던 그들이 예수는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7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메시아를 갈망하는 그들이 예수를 쫒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을 확인해봅시다.



2. 메시아의 조건

  그 다음 예수의 형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7:3~5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어지는 내용은 자연스럽게 다음의 의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왜 초막절에 메시아이신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지 않는가?"
먼저 첫번째 답은 예수의 친형제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초막절에 유대 땅에서 쫓겨난 예수, 그리고 그 예수의 친형제들이 예수께 말합니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목사님 설교와도 일맥한 내용입니다. '뜸'이죠? 형제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좀 뜨셔야죠? 좀 뜨셔야 메시아지! 즉, 예수의 형제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사람들이 추앙하는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완전한 오해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잘 기억해둡시다. 이후 내용을 살펴가는데 실마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7:6~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보고서, 그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거라.

나는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이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그냥 머물러 계셨다.


  무슨 말씀입니까? 진정한 메시아는 뜨기 위해 발악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때는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적어도 초막절은 아닙니다. 유월절이죠.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뜨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성취를 약속하신 때입니다. 예수님은 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참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참은,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고발하는 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메시아를 미워합니다.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까발리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초막절에 유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첫번째 이유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곧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진실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추앙하는 메시아를 원했으나, 진정한 메시아는 세상을 고발하는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초막절은 메시아 강림을 바라는 날이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이 초막절에,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났다.
왜냐하면 그들이 메시아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진실1.
  -세상이 추앙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을 고발하는 메시아다.



  사람들이 추앙하는 메시아를 말하던 형제들을 뒤로하고, 예수는 몰래, 조용히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즐비한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3. 백분토론

  오해와 진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몰래 올라가셨던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백분토론의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11~13

명절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물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무리 가운데서는 예수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더러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더러는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메시아가 맞다 안맞다 갑론을박 합니다. 초막절이라 메시아 강림에 대한 열기가 들끓고 있었고, 그러한 분위기는 곧 예수는 진짜 메시아가 맞는가 아닌가의 열띤 토론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백분토론과 같은 논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메시아에 대한 두번째 오해와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의 학식에 놀랐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학식을 쌓았단 말인가?" 그들의 질문에 예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요한복음 7:16~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즉, 메시아의 가르침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메시아에게 확인해야 할 기준은,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그 가르침의 내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닌가'의 물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가르치는 자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그 속에는 불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요약하면 메시아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입니다. 사람을 대변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대변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번째 오해와 진실을 확인합니다.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진실2.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이가 메시아이다.



  여기서 토론이 정리되고,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좋은데, 이 사람들 그렇지 않습니다. 곧 누군가 반론을 제기합니다. "당신의 출신은 고작 나사렛 아니요!" "당신은 율법대로 생활하지 않지않소!" 오늘말로 하면, "당신의 출신이, 당신의 라인이, 당신의 연줄이, 당신의 생할방식이 문제가 있지 않소!" 그러나 예수의 답변은 기가 막힙니다.

요한복음 7: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는데, 너희는 모두 놀라고 있다.

  즉, 출신이 어떠하든, 연줄이 어떠하든, 생활방식이 전통적이든 그렇지 않든, 예수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단 한 가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23b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전체를 온전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분개하느냐?

  예수가 했던 그 한 가지의 일, 그것은 한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가 했던 그 한 가지 일은 그것입니다.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일, 이것이 메시아의 사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트집잡은 출신도, 율법학자의 권력과 연결된 연줄도, 율법의 껍데기를 따르는 전통적인 생활방식도 아니었습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 한 가지 일을 했던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 한 가지 일은, 메시아의 조건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갑론을박의 마지막 단서를 발견합니다.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오해와 진실입니다.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진실3.
  -메시아의 사역은 인기도, 권력도, 전통도 아닌,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일이다.



4. 요한복음 7장 

  그리고 이제 오늘 우리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발견한 밑그림들과 단서들을 따라, 다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이 초막절에 일어난 '메시아는 누구신가?'라는 주제의 백분토론, 그리고 예수는 그 안에서 진정한 메시아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것들을 다시 정리하면,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진실1.
  -세상이 추앙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을 고발하는 메시아다.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진실2.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이가 메시아이다.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진실3.
  -메시아의 사역은 인기도, 권력도, 전통도 아닌,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메시아, 세상을 고발하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메시아를 우리는 언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초막절아닌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는, 그리고 그 충격적인 사건으로 한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진정한 메시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삶으로 변환될지는,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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