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를 생각해 봅니다. 이 표적 이후 예수님과 유대사람들 사이에는 긴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 대화의 포문을 예수님께서 여셨습니다. "멸망하는 먹음"이 있고, "오는시대로 머무는 먹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여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오는시대로 머무는 먹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시 오병이어가 벌어진 현장으로 돌아가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 표적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예수는 분명 오는시대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즉 미래로부터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그는 현실 속으로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오는시대로 머무는 먹음'이 무엇인지는 그이의 말과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표적의 시작에, 예수님이 빌립에게 했던 질문이 '오는시대로 머무는 먹음'이 무엇인지 밝히는 큰 힌트가 됩니다.

    "이들을 먹이기 위해서 우리가 어디로부터 빵들을 살 수 있을까?"

  예수께서 왜 이들을 먹여야 합니까? "각자 다 집에서 밥 먹고와. 그 다음 설교 들어!" 이렇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들을 먹이기 위해서"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먹는 사건이 벌어졌고, '먹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먹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는시대로 머무는 먹음이 누굴 위한 먹음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들을 먹이기 위해서" 예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자신과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들조차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던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배가 불러서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의 배를 불리려는 것입니까? 자기 배에요. 그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자기 배만 배불리려는 건 현시대에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먹이려는 건 오는시대에서의 삶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먹음'과 '먹임'이 섞여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 저는 광화문에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열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꾸 자기 배만 불리려는 몇몇 현시대의 사람들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낸 세금 가지고, 자기 배만 불리려는 멸망할 먹음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습니다. 모여서 별로 할 건없습니다. 그저 구호 외치고 노래 부르고 사람들 말하는 거 듣고 같이 걷고 그런 거에요.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데, 여러분이 모를 법한 가수들이 나왔습니다. 양희은, 안치환 이란 사람들이에요. 안치환씨가 이런 제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광야에서>.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제목이잖아요? 광장에 서서 광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로 양희은씨가 올라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가사가 이래요.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이상한 우연입니다. 어제 들은 노래에는 모두 광야가 나옵니다. 심지어 그 뒤에 불렀던 <상록수>란 노래에서도 "거치른 들판"이 나왔습니다. 광야를 우리말로 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광야랑 친하잖아요?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이집트와 약속의 땅 사이에 있는 곳입니다. 앞으로 가면 약속의 땅이고, 뒤로 가면 이집트입니다. 그 광야는 희망과 절망이 섞여있어요. 아직 약속의 땅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망할 수 있지만, 더욱 힘을 내면 도착할 수 도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가능성의 땅입니다. 가고자 한다면 약속의 땅으로 갈수도 있고, 포기한다면 그 자리에서 머물러 버릴수도 있어요. 광야는 부화하기 직전 달걀과도 같습니다. 아직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과정이에요. 광야는.


  우리는 광야에 살고 있어요.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은 오지 않았습니다만, 사탄의 머리는 이미 깨졌습니다. 그래서 머리 깨진 사탄과 하나님의 신부가 맞서고 있는 오늘날이 바로 광야에요. 그래서 두 가지가 늘 같이 있는 겁니다. 먹음도 있고 먹임도 있습니다. '먹'자로 시작하는 건 똑같지만, 뒤는 달라요. 그런데 다들 '먹'자 뒤에 숨었어요. 여러분은 '음'이에요, '임'이에요? 절망한 사람들은 '먹'자 뒤에 '음' 붙이기도 모자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는시대의 확실한 희망을 가진 사람은 '임'자를 붙이려고 고분분투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고자 하면 '임'이 될수도 있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면 '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쩌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오는시대를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자물쇠로 가둬놓은 그 오는시대를 인자만 너희에게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가 오늘 우리로 하여금 먹임으로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믿고 따라야 하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인자가 주시는 삶은 다른 삶이 아닙니다. 그분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들을 먹이기 위해서 우리가 어디로부터 빵들을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못알아 먹었어요. 알아먹어야 하는데 못 먹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표적을 좀 보여주십시오. 모세가 만나내리는 것을 보여줬듯이, 당신도 우리에게 뭔가 보여줘봐. 그럼 내가 그렇게 살지 말지 생각해볼게요!" 오늘날 하나님이 있다면 기적을 보여달라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대답은 간단합니다. '표적은 그 사람이 맞는지 안맞는지 맞추라고 주시는 거 아니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표적이야. 그런데 그 하나님이 하늘에서 빵을 주시니까, 너희들은 그거 먹고 어서 다른 사람 먹여.' 이 말이거든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되묻는거에요. '아니 무슨 하늘에서 빵이 내려와? 뭘 먹고 누굴 먹이라는거야?' 예수님 대답이 뭐에요? "바로 나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이야." 즉 예수님을 먹고서, 남을 먹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자 사람들이 수군수군거려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빵인 나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이야. 그 사람은 멸망당하지 않아. 그런데 이 '멸망' 어디서 들어본 것 아니에요? 오병이어할 때 예수님이 먹고 남은 것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멸망하지 않도록 다 모으라"고 했죠? 즉 예수님께서 모으신 사람들은 멸망당하지 않아요. 이 멸망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모으신 사람들은 서로 먹이려고 하거든.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싸우고 멸망할 일 있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으시는 걸 거절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서로 먹으려고 할 것 아니겠어요? 그럼 멸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시는데 누군가 옆에서 그럽니다.

    "저 사람 요셉네 아들내미잖아. 그런데 무슨 자기가 하늘에서 왔데? 웃겨!"

   그런데 예수님은 단호해요. '니네 나 안먹으면 멸망이다. 나 안먹으면 다른 사람 못 먹인다. 자기 배만 불리려다가 헛된 삶을 살고 죽게 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먹으라는거야!" 그런데 예수님 양보 안해요. 과격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씹어먹어야 해!" 실제로 이렇게 쓰여있어요. "씹어먹다." 그런데 이 표현이 너무 세니까,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에서는 '먹다'라고 고상하게 써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씹어먹어야 해! 나를 마셔야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만이 오는시대에서 산다고, 먹이면서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 오병이어 기적 때만 하신 게 아니고 자주 하신 거 같아요. 요한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반응은 싸늘해요.

"이 말씀은 잔인하다.
누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겠어?"

   예수님은 한 술 더뜨십니다. "이 말도 못받아들인다면, 내가 승천하는 걸보면 아주 뒤집어지겠구나!" 그리고 이런 말도 하십니다. "숨은 삶을 창조한다. 그런데 살은 그렇게 못해. 내가 너희에게 말한게 숨이고 삶이야."

   무슨 뜻인지 다 알면 좋겠지만, 일단 여러분에게 필요한 건 이 이야기를 잘 알아두는 거에요. 뜻은 나중에 알게 될 수도 있어. 그런데 일단 이야기를 잘 알아두고 있어야 뜻이 나중에 알아지기도 할 거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런 말씀들을 하셨다는 걸 잘 기억해두세요.

   어찌되었든 오병이어 표적,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네번째 표적 이후 이런 얘기들을 하신 겁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을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요. 예수님을 먹어야 오는시대를 산다는 말이 도통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잔인하게 들리기만 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립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갈 때,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니네도 갈거니?"

   이 말에 베드로가 멋있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는시대의 삶에 대해 말씀해주시는데 제가 가긴 어딜 가겠습까?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인거 알아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멋있는 말인 것 같지만, 이 친구도 나중에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물론 돌아오긴 하지만요. 예수님은 자신이 임명한 열둘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열둘이 나중에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 곁으로 모을 것이거든요. 마치 남은 빵조각들을 열두광주리에 담았듯이, 이 제자들이 모은 사람들이 남들을 먹이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거든요.

   그러나 이 열 두 제자 중에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돌아오지 않을 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 제자는 끝내 예수님을 먹지 않고,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먹을 준비를 서서히 계획하고 있었어요.

   이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세요.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나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 나에게 먹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도 남에게 먹히는 삶을 살겠다는 말입니다. 오는시대의 삶은 그런거에요. 그러나 먹힐 생각않고 먹을 생각만 하면 그게 바로 현시대입니다. 여러분은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끼어있는 이 광야에서 누구인가요? 일곱 머리 열뿔 짐승인가요, 아니면 그 짐승과 맞서고 있는 해달별입은 여자인가요? 우리는 단연 우리가 에클레시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먹히세요. 먹이고 먹이고 먹이다가 끝내 먹히는 삶이 예수님의 삶이에요. 그럼 십자가에요. 이렇게 살면 오는시대에요.

   이게 싫으면 다른 소리 하게 되어요. 예수님에게 모세처럼 표적을 보여달라던지, 누구 아들내미인지 따진다던지, 잔인하다던지 하는 얘기들은 다 그렇게 살기 싫어서 하는 말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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