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0일 12:45에 쓴 글을 2016년 10월 8일에 수정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다시 읽는다. 아니 새로이 읽혔다. 혹 '새로이 읽힘'은 그이가 자기 자신을 내 속에 나타내심인가? 사랑은 존재와 인식을 변화시킨다. 사랑은 '아나므네스코', 내 살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것을 기억하게 한다. 그이를 사랑한다면, 믿는 마음으로 기억해보자. 태초의 일을, 코스모스의 시작에.


요한복음 1:1~18


태초에 지혜말숨 계셨고, 

이 지혜는 계시길 하나님 향해,

그리고 하나님이셨다, 이 지혜가말숨이.

그이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온 우주가 그이를 통해 지은 바 되었으니 

어느 것 하나도 그이 없이 된 것이 없다.


  지혜. 유대인들에게 지혜는 하나님의 제 2의 자아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지혜로 창조하시고, 지혜로 나타나시며, 지혜는 곧 하나님이시다. 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다.


  다시금 지혜라는 번역어에서 말숨으로 돌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장이 창세기 1장의 반영임을 생각했을 때, 저 말숨은 1) 하늘과 땅의 창조 2) 최초의 말씀인 "빛이 있으라"와 연결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숨 계셨고"이후 "온 우주의 지음"이 나오는 것은 창세기 이야기를 반영합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빛 역시 창세기의 그 빛을 연상시킵니다.

  옛창조와 새창조가 사실은 같은 방식이라는 신천지의 통찰은 타당합니다. 어둠 위에 빛이 던져지고, 그 빛은 어둠을 새롭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빛은 어둠과 싸우지 않으며("빛이 있는 자리에 어둠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결코 어둠에 잠식된 자리는 버려지지 않습니다. 타락 위에 구속이 있고 그 구속은 타락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 몸이 어둠의 '자리'였음을 생각해보세요.

  

  요한복음은 요한이라는 목격자의 진술임을 염두하고 읽어야 한다. 요한이 말하는 이 지혜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예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목격하고 깨닫게 된 것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었다.


  요한은 부활하신 메시아를 목격하고서, 이 분이 만물을 새로이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성격을 따라, 하늘과 땅을 새로이 지으실, 바로 그 빛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이 안에 삶이 있었으니 이 삶이 사람들의 빛,

이 빛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고, 어둠은 그 빛을 감당 못했다


  만물을 지은 근원, 그이 안에 삶이 있다. 그 삶이 사람들의 빛이다. 삶을 잃은 자리에, 삶이 나타났다. 지혜로 빚어진 하나님의 삶. 예수.


  생명을 삶으로 번역했습니다.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창조의 빛이신 예수 안에 삶이 있다고 요한이 증언하는데, 그 삶이란 오는시대의 삶, 현시대와는 이질적인 참된 삶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역사 위에서의 인간으로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 삶이 사람들의 빛입니다. 즉 예수를 통해 밖으로 표현되는 그 삶은 빛 자체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삶을 모른다면, 우리는 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빛"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빛이 어둠 속에 드러났고"는 현시대 안에 오는시대를 가져오는 새 창조의 빛이신 한 분이 오셨다는 말입니다. '드러나다'라는 동사는 수동태인데, 이 수동태의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새 창조의 빛을 어둠 속에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밝히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고통이란 과정을 필연적으로 지날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어둠 밖에 모르던 아이가 찬란한 빛을 맞이하는 출산과 같이(그러나 그 출산에는 어미의 고통이 따릅니다), 파도가 덮치려하고 뒤에서는 전차부대가 추격하는 좁은 길을 걸어야 했던 이스라엘과 같이(그 길은 두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요한복음에서 계속 전합니다.(6:20, 12:15, 14:27)


고린도후서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래서 이 빛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즉 예수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새창조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자신을 알리시는 문(10:7)으로서 오셨습니다.

 

  이 삶을 짓이겨보려고 '악은 최선을 다했다'(이런 경우, '악은 최악을 다 했다'고 말해야 않는가?). 그러나 어둠은 빛과 싸울 수 없다. 오히려 빛이 있는 자리에 어둠은 발붙일 수도 없음이다. 개역성경에는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깨닫지 못하다는 '카타람바노'라는 동사를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 동사는 '잡아 누르다', '압도하다'의 의미도 있다. 그래서 RSV에서는 'overcome'이라는 동사를 썼다.


  단순히 "빛이 어둠을 이겼다"라고 쓰기엔, 우리는 그 이김이 요구했던 처절함을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이김의 방식은 십자가였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새 창조의 좁은 문이 비로소 열렸습니다. 십자가는 전적타자였던 절대자가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아버지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더불어 아빠와 아들의 관계를 갈라놓으려했던 모든 이간질이 소용없음이 밝혀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어둠이 빛을 감당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공상이 아닌 역사에서 확인한다. 끝까지 '올'을 배신하라는 사탄의 목소리. 그럼에도 십자가. 그 찢겨 죽은 지혜를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한.

그는 증언하기 위해 왔다. 

곧 빛에 관해 증언하기 위해. 

곧 모두가 자신을 통해 신실하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은 빛이 아니라,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였다.


  예수는 그러한 분이시다. 그 하나님을 역사의 바톤을 이어받아 전하는 이가 있으니 요한이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다. 예수는 아무런 역사적 개연성없이 불쑥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정점에서(바울의 말대로라면 "때가 차매") 나타나셨음을 증언하는 인물이 요한이다. 그이는 예고된 빛. 세상은 빛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어두워졌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세상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시다. 율법을 새롭게, 당위를 자유로, 서사를 완성시키시는 그이! 


  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나를 생각해보라. 그는 빛으로 오셨다. 태초에 빛이 있음은 곧 창조의 시작이었다. 예수는 새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빛이다. 그는 그 '새로움'이 무엇인지, 먼지나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보여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새로움은... 


진리 빛, 모든 사람을 비추는 그 빛은 코스모스로 들어와서,

그 코스모스 안에 있었고, 코스모스는 그를 통해 되었으나,

코스모스는 그이를 깨닫지 못했다.

자기 땅으로 들어왔으나, 그의 씨알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곧 코스모스 전체의 새로움이 될 것이다. 


  코스모스는 우리가 사는 우주다. '코스모스'와 '그의 씨알'과 '그이'의 관계를 보라. 코스모스는 그이를 알지 못했고, 그의 씨알은 그이 안에 있는 삶을, 코스모스 전체에게 증언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그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즉 그이의 이름을 따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이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으로부터 난 이들도 아니고, 

살몸의 끌림으로부터 난 이들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 난 이들도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이들이다.


  그럼 하나님은 실패한 것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예수마저 죽였으니, 지혜와 더불어 사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셨던 하나님의 뜻은 꺾였단 말인가?

  아니다. '계약갱신'이다. 이스라엘이 새로워진다. 예수의 이름을 따르는 이들이 이스라엘에 합류한다.  이들은 곧 지혜(예수)와 더불어 사는 자들이다. 이들이 새로움을 이뤄가는 새창조의 일꾼들이다. 이들은 예수의 새로움을 시작으로, 자신들이 새로워지고, 이웃을 새롭게 하며, 우주 전체가 새로워질 것을 고대하는 사람들이다. 새창조를 이루시는 계약, 그리고 그 계약에 따른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다. 


지혜가 살몸 되었고, 

우리 안에 장막을 쳐서,

(그이의 뚜렷함을 목격하니, 

아빠 곁에 있는 하나됨의 뚜렷함이었다)

은혜와 참이 흘러넘침.


  그 이스라엘 가운데 지혜가 계신다. 마치 광야를 지나가던 이스라엘 한 복판에 성막이 있듯. 그런데 이제는 텐트가 아니라, 살몸의 장막으로 우리 곁에 계신 지혜! 그 지혜를 목격한 요한이다. 그이는 역사적 존재. 그는 함께 먹고 마시고 다니면서 그이를 목격했고, 그이에게서 하나님 아빠의 뚜렷함을 보았다. 거저 주심과 진리가 그이에게서 흘러넘친다는 말은 곧 목격자 증언이다.

  그이에게서 은혜와 참이 흘러넘치듯,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와 참이 흘러넘친다면, 그이가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목격자 요한에게는, 살몸으로 함께 헀던 지혜가, 오늘 언약 백성에게는 호흡으로 함께 한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숨. 목숨을 넘어선 새로운 호흡. 성령.


요한이 그이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했던 그이는, 나보다 나중에 오시는 이지만, 

나보다 먼저 보내심을 받은 이에요. 

그이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가 시간의 흐름으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나중에 왔으나 먼저다. 그는 인과율을 벗어난다. 오히려 그이는 참과 거짓을 가르시는 심판주이시다.


그이의 흘러넘침으로부터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으니, 은혜를 넘어선 은혜.

왜냐하면 율법은 모세를 통해 받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아빠 품 속에 있어 (아빠와) 하나 된 아들 드러나셨다.


  은혜를 넘어선 은혜. 이 말은 아래서 부연된다. 율법은 은혜이다(이런 측면에서 율법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율법을 폐기되어야 할 과거의 악습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율법을 만족시키고도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를 넘어선 은혜'다. 율법을 새로이 읽는 사고와, 그 율법을 이뤄내는 삶의 힘이 예수에게 있다. 

  그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아빠 품에 있어서 아빠와 하나된 아들의 모습을 본다. 참 인간을 본다. 이제 참 세상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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