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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1~21


  우리는 마땅히 메시아의 (노 젓는) 일꾼이요, 하나님의 뮈스테리온을 맡은 주택 관리인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택 관리인에게 요구할 것은 신실함 뿐입니다. 이것을 말한 것으로 내가 여러분에게든 혹은 사람의 법정에서든 심판 받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재판장이 아닐 뿐더러, 나는 사실 거리끼는 일이 조금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에 대한 판결이 이미 끝나버린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판결을 이루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는 아무 일에도 가능성을 닫고서 판단을 굳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어둠에 감춰진 것들을 밝히실 것이고, 가온 속 방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칭찬이 각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종'에 대한 여러 이미지들을 가져와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바울이 '종'이라고 할 때는 '둘로스'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주인 '아래' 있음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어제 본문에서 '디아코노스'라는 말도 종이라 번역되는데(우리는 식당의 웨이터에 빗대어 이해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일이 '주인으로부터' 왔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개역성경을 보면 또다시 '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단어는 '주인 아래 있는 사람도'도 '주인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배 아래서 노를 힘차게 젓는 일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쓴 것은 그 뒤에 나오는 '신실함' 때문입니다. 배 아래서 노를 젓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온 몸을 사용해서 지금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게을러서는 배가 방향을 잡고 제대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노젓는 일꾼으로서, 신실함을 가지고 일하며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뮈스테리온을 맡은 주택 관리인으로서 말입니다.

  그가 맡은 주택은 오는시대를 통해 누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요, 그는 미래에 반드시 찾아올 창조세계의 갱신을, 지금 선언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신실한 삶을 보며, 십자가에서 찢겨 죽임당한 그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 뮈스테리온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뮈스테리온으로 들어간 이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일은 노 젓는 것으로 표현된, 신실함입니다.


  이 말을 하면, 아마 다른 자격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바울을 공격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하나로 서신 예수를, 유대와 로마가 심문하고 죽인 것처럼 말입니다. 유대는 혈통과 토라를, 로마는 황제 숭배와 강한 군사력을 '인간다움'으로 규정하고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신실함 뿐'이란 말은 그간의 모든 생존의 도구들로 쌓아올린 피라미드를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그 오는시대의 뮈스테리온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묻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신실하겠느냐?' 하나만 묻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신실함 이외에 다른 기준들을 붙들고 사는 이들이 자신을 고소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을 재판하시는 분은 현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논리전개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일꾼이다 - 일꾼에겐 신실함 뿐이다 - 내가 그렇게 말했다 - 신실함 이외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은 나를 공격할 것인데(너희가 그렇다) - 그러나 나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주의 날에 만물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바로잡음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최후의 심판

  흔히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만(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이 바로 잡힌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희소식입니다. 더불어 그 날이 온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바울은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그때까지는 아무 것도 심판하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심판'이라 번역되는 말은, '판단', '재판'과 같은 단어입니다. 의미는 분명합니다. '둘로 나누어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시간이, 메시아의 부활을 통해 새로이 창조된 가능성의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다움의 가능성이 없이, 신실할 수 없이, 가능성이 없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가 온 몸을 찢어 이 땅으로 가져온 그 가능성이, 우리로 하여금 새 시간을 살게 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오는시대를 산다 말하면서 타인의 가능성을 어찌 닫아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시간을 창조하신 이의 권한입니다.


  '어둠에 감춰진 것들을 밝히실 것'이라는 표현은 어제 보았던 메시아의 토대 위에 세운 성전을 시험하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불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람의 잣대와 다릅니다. 마음 속 방향 마저도 드러내는 것이요, 그 불의 날에 메시아를 따라 사람됨을 이루려는 사람이 반드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내 가족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나와 아볼로에게 먼저 적용했습니다. 그것은 격언대로, 여러분이 다함께 성경이 말씀한 바를 벗어나지 않는 법을 익혀, 아무도 어떤 사람을 지지하고 다른 사람을 반대하는 것으로 우쭐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대체 누가 여러분이 우월하다고 수긍해 주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여러분은 정말 필요한 음식을 이미 모두 가졌다고 여깁니까? 여러분이 벌써 풍요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정말로 여러분이 진작 왕이 되어서, 우리도 여러분 곁에서 왕노릇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말만 해놓고 자신은 나몰라라 하는 자칭 지혜로운 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이 말들을 자신과 아볼로에게 먼저 적용합니다. 바울과 아볼로도 말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지, 그 말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누군가를 지지하고 반대하는 것으로 우쭐대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혜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격언에 '어떤 사람을 지지하고 다른 사람을 반대하는 것으로 우쭐대지 말라'는 말이 있었듯 싶습니다.


  바울은 받은 것으로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나서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우리가 만나 관계로 연결된 사람들조차도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그래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을 뚜렷이 해야 할 웨이터들이, 열심히 노를 젓기는 커녕 가만히 서서 말만 하고서 자신은 문제 없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고, 아직 다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시는 이를 뚜렷히 드러내며, 감사하고, 그 분이 주시는 것을 통해 신실하게 살가야 합니다. 먹을 것에 적용하면 '일용'이 될 것이고, 사람은 자랑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저 얻음'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끊어진적 없이 줄곧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히 그것들을 얻고, 그것들을 주시는 그 근원되시는 이에게 한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이미 다 얻었으니, 더 이상 얻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나는 다 안다고 생각하니 생각은 굳을 것이요(그래서 타인에게서 가능성을 박탈하고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더이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사람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혜롭다 생각하고, 자신들이 풍요롭다 생각하고, 바울이 전해준 메시아 예수의 소식은 지혜만도 못한 기초적인 것이라 여깁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상황을 유쾌하게 비꼬아 말합니다. "정말로 여러분이 진작 왕이 되어서 우리도 여러분 곁에서 왕노릇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왕"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생각하는 왕은, 풍요를 누리며 '말'만 가지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왕일 것입니다. 이러한 왕은 우리도 여럿 이름을 댈 수 있을만큼 현시대에 흔한 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왕은 그러한 왕이 아닙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나, 그 왕은 군림하는 왕, 타인을 심판하는 왕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듯,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란, 현시대의 왕이 아닙니다. 이제 바울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하나님 성전의 토대가 되시는 그 오는시대의 왕에 대해서 말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유대의 전통을 따라 '메시아(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도들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개선행진의 끄트머리에 두셨습니다. 우리는 현시대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똑같이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대로 메시아로 인해 우리는 바보입니다. 여러분은 메시아 안에서 지혜가 있다지요? 우리는 약합니다. 여러분은 강하다지요? 여러분은 칭찬받지만,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지요?

  맞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각까지도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우리는 제대로 입지 못하고, 가혹한 대접을 받고, 우리 소유라 할 만한 집고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밤새 육체노동을 하면서 고되게 일합니다. 욕을 먹으면 우리는 복으로 되돌려 줍니다. 핍박을 받으면 우리는 견딥니다. 중상모략을 당하면 우리는 온유한 말로 대해줍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는 그저 접시에서 쓸려나와 버려지는 현시대의 쓰레기처럼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메시아를 이러한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로마의 개선행진이 벌어집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 장군이 가장 맨 앞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습니다. 그 뒤로 그의 충직한 신하들이, 그리고 군병들이, 가장 마지막에는 찢겨진 옷에 머리가 흐트러진채 끌려오는 포로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포로가 바로 우리의 메시아고, 우리는 그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끌고 가는 저 개선장군은 누구냐, 바로 사탄입니다. 죽음입니다. 현시대의 왕입니다. 모든 현시대인들이 살고자 바둥거리나 결국에는 그의 막강한 힘을 섬기게 됩니다.


  이 죽음의 왕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허위를 밝히는 사람들을 힘으로 짓눌렀습니다. 늘 있었던 일이라 익숙한 일처럼, 그 날도 그 죽음의 왕은 아무 잘못 없는 진리의 사람의 머리채를 쥐고, 해골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없으니, 나에게 대항하는 모든 것을 이 꼴로 만들어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메시아는 힘없이 죽어갔습니다. 사탄은 끝까지 그의 입에서 저주의 소리가 쏟아지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입에서, 자신의 손에 못을 박고 조롱하는 저 인간들에 대한 분노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3: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그때 모든 것은 뒤집혔고, 사탄은 깨진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시대의 가장 낮은 곳에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쓰레기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죽음과 가까운 자리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메시아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욕을 먿어도 온유한 말로 되돌려 주는 것은, 자신의 평판이나 먹고 사는 일을 위해 친절이라는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악을 이기는 메시아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지금 고린도의 에클레시아가 추구하는 것과 아주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아주 다르지 않습니까?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만들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여러분을 소중한 나의 아이들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메시아 안에서 파다고기는 천 명이나 있지만,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메시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해 나는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바울은 위의 '말'을 가지고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판단'하고서, 그 위에 '군림'하는 거짓괸 다스림을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을 자신이 복음으로 낳은 자녀라 생각합니다. 옆에서 지혜를 말해주는 파다고기는 널렸지만, 이렇게 사람을 낳으려는 아버지는 적습니다. 바울은 파다고기가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이 '파다고기'는 똑똑한 외국인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대 귀족들은 그러한 노예를 붙잡아 와서 자녀 교육에 쓰곤 했습니다. 파다고기는 도련님들을 모시고 뭔가 가르쳐보려고 애쓰겠지만, 아버지를 대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린도의 에클레시아에도 뭔가 가르쳐보려는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그들을 위해서 함께 고통받기를 자처하는 아버지는 적었습니다.


  이 '고통을 통한 낳음'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에덴 동산에서도 출산이 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최초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녀의 성관계도 있었을 것이고, 그를 통해 자손들을 낳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낳음에 고통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통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생겨난 것입니다.

  이 '고통을 통한 낳음'이 로마서에도 등장합니다. 8장에 보면, "창조 세계 전체가 산고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덧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통 이후 새 창조의 낳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은 새창조에 참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낳은 이 사람들은 바울의 아들들입니다. 몸으로 낳지는 않았으나, 맘으로 낳았으니 맘아들이요, 이 맘아들이 메시아 예수께서 말씀하신 '제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그래서 나는 여러분 곁에서 속삭입니다. 나처럼 되십시오. 이 때문에 내가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이자 주 안에서 신실하니, 그가 여러분에게 기억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모든 에클레시아에서 가르쳤던 바와 같은 것, 곧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나의 길(道)을.


  '곁에서 속삭인다'는 표현은 희랍어로 '파라.클레오'라고 합니다. '파라'는 '곁'이고, '클레오'는 '에클레시아'라고 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파라클레오는 '곁에서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언하다, 권면하다, 격려하다'의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파라클레오는 '보혜사'라 번역되었습니다. 즉 '곁에서 부른다'는 말은 성령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성령을 떠올리게 하는 동사를 사용한 뒤 하는 말은, "나처럼 되십시오"입니다. '미메시스'라는 말도 같은 동사를 쓰는데, 이 말은 "나의 복사판이 되세요"겠습니다. 이것이 무척이나 교만한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뒤에 내용을 들여다보면 바울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에 디모데를 보냅니다. 그 데모데는 1) 바울의 '사랑하는 자녀'인 것으로 보아, 이 사람 역시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사람입니다. 2) 복음으로 낳아진 사람인 그는 주 안에서 신실합니다. 즉 앞에서 말한 것을 가져오면, 오는 시대의 배 위에서 성실하게 노젓는 일꾼입니다. 이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디모데와 고린도 에클레시아와는 1)은 공통점이요, 2)는 차이점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디모데라는 인격을 마주하면, 자신들이 2)를 배워야 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모든 에클레시아에서 가르쳤던 바와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했던 '십자가의 길', 바로 신실함으로 점찍어 살아가는 오는시대의 삶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서 우쭐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원하시면 나는 여러분에게 속히 갈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나는, 그렇게 우쭐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실천력이 어떠한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이 아니라 실천력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합니까? 내가 회초리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사랑의 숨결과 온화함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까?


  바울은 4장 끝까지 아버지로서 자신의 입장을 버리지 않습니다.(마지막 문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말들을 늘어놓으며 아이들 앞에서 우쭐거리고 있는 몇몇 파다고기들은, 아버지의 등장을 바라지 않을테지요.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말이 아니라 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힘을 '실천력'이라는 말로 풀어보았습니다. 실천은 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을 지키면, 우리 자신이 말씀이 될 것이요, 스스로 말씀이 되는 것만이 영원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도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스스로 말씀이 된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간의 모든 단어들이 연결되지 않습니까?


현시대-뮈스테리온-신실함-거룩한 숨결-실천력-하나님의 칭찬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거룩한 숨결로, 아빠 뚜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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