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로마는 인구가 100만 정도였고, 그 도시에는 약 100명 정도의 에클레시아가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가정 교회들이었습니다.
로마서 16:1~16
포이베를 여러분의 가족으로 함께 세웁니다. 그녀는 겡크레아에 있는 공동체의 일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주 안에서 씻어난 이에 걸맞게 그를 맞이하고, 무엇이든지 그녀에게 필요한 바를 도와주세요. 왜냐하면 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를 뒤에서 돕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한참 쓰고나서, 이제 이 편지를 이 '포이베'라는 사람의 손에 들려 보냅니다. 우리에게는 '뵈뵈'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사람이지요. 이 사람은 '겡크레아'에 있는 예수 공동체를 섬기던 사람입니다. 지도를 찾아보면 겡크레아에서 로마까지는 상당한 거리입니다. 이 거리를 마다 않고 바울의 편지를 배달하는걸 보면, 바울이 포이베를 상당히 신뢰한듯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신뢰했던 이 '포이베'라는 사람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름부터가 그러한데, 이 '포이베'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만나 만든 거인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이 이름이 '아르테미스'라는 미의 여신의 이름이 됩니다. 나중에는 이 이름이 '빛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어서, 아폴론이라는 이방 신의 이름 앞에 으레 붙는 말이 됩니다. 빛나는 아폴론이라 해서, '포이부스 아폴론', '포이부스 아폴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뵈뵈, 포이베라는 이름은 그리스의 우상숭배의 환경에서 나온 이름이었습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준 포이베의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와 너무도 달라서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을까요?
우상숭배가 만연한 이방 지역에서, 이방신의 이름을 가진 여자가 <로마서>를 들고 공동체를 방문했다고 생각해봅시다. 뭐 이런 것이죠. 오늘 교회에 누가 찾아왔는데, 승복을 입고서 말씀을 전하러 왔다고 하는 이 사람 이름이 김석가모니에요.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대번에 내치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뵈뵈라는 여자는 정말정말 낯선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뵈뵈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여자에요. 당시 여자는 재판에서 증인으로 채택이 불가능했습니다. 한 마디로 "여자 말은 안 믿어"라는 사회적인 동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바울이라면 로마서를 써서 이 뵈뵈의 손에 안들려보냅니다. 이방사람에다가 여자인 이 사람의 신용등급은 이 사회에서 최하위이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이 낯선 사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환경 속에서 살아온 이 여자를 '가족'이라 부릅니다. 이 가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세계에 둘도 없는, '하나님의 우주 가족'입니다. 그럼 왜 이런 낯선 여자를 가족이라 부릅니까? 이유는 하나 뿐입니다. 이 사람이 '씻어난 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씻어난 이'라는 말은 '성도'를 고쳐본 말인데, '씻어서 새로 났다' 이 말입니다. 즉 우리가 물에 들어가 죄된 내가 죽고, 다시 성령으로 일어났습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씻었다. 거듭났다. 즉 성도는 세례받고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이 '성도'입니다. 바울이 이 포이베라는 여자를 가리켜 무어라 말합니까? "그녀는 씻어난 이야. 성도야. 예수로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가치에 걸맞게 대접해줘야해." 그녀의 과거가 이방문화든, 그녀의 이름이 이방신의 이름이든 무엇이든, 그녀가 심지어 성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예수와 죽고 성령으로 살았으면 그 사람은 성도요, 우리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본적 없는 다른 동네 낯선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이 낯선 여자 역시 자신이 성도라는 사실을 삶으로 증명합니다. 그녀는 바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뒤에서 도왔습니다. 겡그레아에서 로마까지 편지 한 통 들고 달려갑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정도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녀에게 필요한 바를 도와주세요." 그녀의 생각, 판단, 그녀의 행동, 그녀의 지출을 바울은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낯섬을 거둬내니, 그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빛나는 인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을만 합니다.
여러분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들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나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방 사람들의 공동체도 고마워합니다.
또한 그들의 집에 있는 공동체도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내 사랑하는 에파이네토스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는 아시아에서 메시아를 향한 첫 수확입니다.
마리아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녀는 여러분을 위해서 많이 일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들은 나와 같은 핏줄이며, 같이 감옥에 갇힌 바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 안에서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에게도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또 주 안에서 나의 사랑하는 암플리아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메시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는 우르바노스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나의 사랑하는 스타퀴스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메시아 안에서 인정받은 아펠레스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뵈뵈에 대한 이야기를 마마치고, 이제 "문안하세요" 구절들이 이어집니다. '문안'은 무슨 뜻일까요? 문안을 희랍어 있는 그대로 풀면, "하나로 끌어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이 말을 '문안하다'로 풀어놨습니다. 한자로 문안(問安)하면 안부를 묻는게 되는데, 좀 번역이 약하다 생각됩니다. '문안'은 '잘있냐'를 묻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확인할 땐 끌어도 안고, 입도 맞춰도 됩니다. '너와 내가 진짜 가족이고, 하나야' 이 사실을 확인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안입니다. 그래서 "찾아가 안아주다" 라고 고쳐 보았습니다.
제가 어제 상갓집에 있었거든요. 저는 그 자리에서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찾아가서 얼굴을 보고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위로하고, 위로받습니다. 가까운 사람이라도, 말이 안통하면 숨이 턱턱 막히잖아요. 그러나 서로 찾아가서 안아주면 말 없이도 숨이 시원하게 통합니다. 어제 이걸 봤어요. 많은 말보다 한 번의 안아줌이 서로를 하나되게 합니다. 그래서 '아, 문안하나는 말은 찾아가서 안아주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찾아가 안아주세요". 그들과 '하나'임을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과 추억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위해 모가지를 내놓았던 추억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숨이 끊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 정작 자신들의 숨은 끊어져도 좋다 했습니다. 무슨 사건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하여간 다른 이의 호흡을 위해서 자신들의 호흡을 기꺼이 끊으려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니 바울이 이 두 사람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바울로 인해서 덕을 보고 있는 다른 지역 공동체들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고마워합니다. 서로를 위해서 숨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을 몸 전체가 고마워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지요. 다른 것 하나 아니라, 나만 숨쉬려고 하지 않고 같이 숨쉬려고 하면 하나가 틀림없습니다. 누군가 숨쉬지 못할 때, 그 숨통 열어주기에 최선을 다하는게 하나고 한 몸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다섯개의 공동체들을 언급하며, 그들을 문안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첫번째 공동체가 바로 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이름들을 들여다보니까, 대부분이 뵈뵈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에파이네토스, 안드로니코스, 유니아, 암플리아, 우르바노스, 스타퀴스. 거기에 유대 이름인 '마리아'도 끼어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뵈뵈만 그런게 아니구나', '예수 공동체는 원래 이런거구나' 알게 됩니다. 애시당초 우리는 낯선 이들의 모임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 것 없습니다. 사람이 금 그어놓은 잣대들을 다 거둬내고, 예수를 왕으로 모신다는 그 하나의 믿음만으로, 낯선이들끼리 서로 가족이 되자고 모인 사람들이 예수 공동체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친밀한 사람들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린 다 서로에게 낯선 이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씻어날 때, 그 낯섬도 씻어냅니다. 우리의 사랑이 낯섬에 질식될 수 없도록 마음을 씻어, 새로 나는 것입니다. 낯선 이들과도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되는 것이 다름 아닌 예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 공동체 안에는 추억이 있습니다. 어떤 추억입니까? 아시아에서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이 나타났던 에파이네토스의 추억, 사람들을 위해서 많이 일하는 마리아에 대한 추억, 같은 핏줄이면서도 감옥 동기이기도한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에 대한 추억...다 서로를 위해서 고생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하나되기 위해서 애썼던 추억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만든 하나됨의 추억입니다. 지금이야 그들의 추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금 남겨져있는 글자들만으로는 다 알 수 없지만,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추억을 추적하기 보다는 우리도 우리의 추억을 만들어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되기 위해서 고분분투했던 공동체의 추억을 우리도 만들어 가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남의 추억이 필요 없고, 우리들의 추억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낯섬을 씻어내고, 하나되기 위해 새로 사는 우리가 되면 됩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사람들을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나와 함께 일하는 헤로디오나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주 안에 있는 나르키수스의 사람들을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주 안에서 많은 일을 하는 트뤼파이나와 트뤼포사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사랑하는 페르시다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녀가 주 안에서 많은 일을 합니다.
주 안에서 선택된 사람 루포스와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의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입니다.
에슁그리토스와 플레곤과 헤르마와 파트로바와 헤르메스와 그들과 함께 있는 우리 가족들을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필롤로고스와 이유리아와 네레아와 그의 가족들을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올륌파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거룩한 이들을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서로를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세요. 메시아의 모든 공동체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바울은 브리스길와 아굴라의 공동체 외에도 4개의 공동체를 더 언급합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공동체, 나르키수스의 공동체, 에슁그리토스의 공동체, 필롤로고스의 공동체가 더 있습니다. 명단을 보면서 재밌는 건, 이쪽 로마 사람들의 이름은 '스'로 끝나면 남자고, '아'로 끝나면 여자거든요? 이 사실을 알고서 이름들을 들여다보면, 남자 여자가 고루 있습니다. 여자라고해서 차별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성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 뵈뵈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그 대도시 로마에 편지를 썼는데, 그 지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겨우 이 사람들 뿐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계산해보면, 한 공동체당 스무명씩 잡아도 다섯 공동체니까 100명 남짓입니다. 그럼 로마에 바울이 언급한 공동체 말고 다른 공동체가 더 있었을 것이냐? 이토록 '하나됨'을 강조하는 바울이, 그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인양 뺴먹었을리 없을 것 같습니다. 작심하고 명단을 쓰겠다고 했을 땐 빼먹는 사람이 없어야죠. 뺴먹으면 서운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게 다 라고 치면, <로마서>가 뵈뵈를 통해 로마에 전달되던 당시 로마의 기독인은 고작해야 1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아봐야 200명? 지금 우리 교회 주일 예배 드리는 정도 입니다.
'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애개...'지요. HOT 팬들이 200만에 육박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제자 고작 100명. 그런데 머릿수로 따지만 '애개...'인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삶의 능력은 머릿수에 달려있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로마에서 예수 공동체의 문안을 받던 그 100명은 어떤 100명입니까?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서로를 찾아가 안아주세요.
그리스도의 교회가 여러분을 찾아가 안아줍니다.
뭔가를 신학적으로 깊이 이해한 100명도 아니었고, 돈이 많아서 이런 저런 사업을 많이 벌일 수 있는 100명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서로서로 찾아가 안아주는 100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교회를 대표했습니다. 이들이 낯섬을 깨뜨리고, 사람에게 나아가 서로 하나됨을 확인하는 100명입니다. 그 때 이들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가 됩니다. 이들의 나아감은 곧 그리스도 교회의 나아감입니다. 여기에 거룩한 입맞춤이 나오는데, 이 역시 서로 하나됨을 확인하는 초대교회의 독특한 인사법이었습니다. 예수 공동체에 하나됨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서로를 찾아가 입맞춰주고, 안아주며 하나임을 확인하는 일이 초대교회의 인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100명입니다. 그럼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해볼만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세상을 뒤집어 놓는 일 말입니다. 다시 말해, '혁명'말입니다. 혁명은 이름을 갈아치우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더더욱 혁명해야 합니다. 오늘날 죄 많은 세상을 지배하는 이름은 사탄이요, 이간질하는 이요, 둘을 만들어내는 이 아닙니까? 심지어 가족끼리도 하나되지 못해서, 둘인 상황을 어찌하지 못하는 일이 이 명절에도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기독인은 더더욱 혁명해야 합니다. 세상을 둘로 쪼개는 저 거짓의 이름을 갈아치워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둘이 되었습니까? 돈입니까? 인정받지 못함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문안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서로 문안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낯섬을 예수 이름으로 뚫어냅시다. 그래서 우리 자꾸자꾸 문안합시다. 하나됨을 확인합시다. 세상은 자꾸 둘이어야 안심하고, 자꾸 둘만 확인하려고 합니다. 거짓 기준입니다. 갈아 엎엎으면 사람이 살 맛 납니다. 이 일에 100명이면 되지요. 서로서로를 찾아가 하나됨을 확인하며, 자신의 숨을 내어놓도록 사랑하는 100명이면 우리는 혁명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들을 뚫고 입맞추고 안아주는 100명은 세상을 뒤집고도 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서로서로 찾아가 안아주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낯설든, 내 맘에 안들든 상관 없습니다. 하나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 때부터 사랑이 시작됩니다. 복음이 이러한 방식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찾아가서 안아주기에 딱 좋은 날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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