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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1~13
우리 '할 수 있는 이들'은 '할 수 없는 이들'의 굳건히 서지 못한 면들을 짊어져야 할 빚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들에게만 들어맞는 것은 참기쁨이 아닙니다. 우리 각사람은 (서로를 위한) 집 짓기를 바라보며, 이웃이, 하나님과 뜻이 들어맞아 기뻐하도록 도웁시다.
이 단락은, 12장부터 시작했던 네번째 토막의 결론이 됩니다.
바울은 먼저 할 수 있는 이들이 할 수 없는 이들의 굳건히 서지 못한 면들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빚'이라 말한다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는 이들이 할 수 없는 이들을 섬기는 것이 빚진 이유는, 먼저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그 중에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면, 그 할 수 있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위해서 비롯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7
이는 이 잠재력의 넘어섬이 하나님께 속해있고 우리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여, 서로의 부족함을 서로 짊어지는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언약 프로젝트가 이어지고 있다는 확증이자, 완악한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긍휼 그릇입니다. 그리고 이 긍휼 그릇 안에서는 고기가 문제가 되었든, 날이 문제가 되었든, 할 수 있는 이들은 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서로를 위한 짊어짐에 대한 요구 뒤에는, 자기 자신만을 기쁘게 하는 일이 참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이, 다른 지체의 부족함을 짊어지려 하겠습니까? 다른 지체의 부족함을 짊어지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안, 기쁨은 자기 자신만이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집 짓기"는 시편 118편을 떠올리게 하는, 에클레시아를 에클레시아답게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집 짓기"에 관한 구절들
[1]
마태복음 21:40~42, 새번역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시온에 버려진 모퉁이돌로부터 새로운 집이 지어진다는 내용은, 시편 118편에서 시작되었고, 신약성경에서 여러 차례 인용됩니다.
[2]
사도행전 4:11,12, 개인번역
이 예수는 돌입니다.
그 돌은 건축자인 여러분으로부터 버림 받았으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틀림없이 구원할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 말고는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3]
베드로전서 2:4~6, 개인번역
그이를 향해 우리는 나아갑니다, 그이는 산 돌,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은 한편, 하나님 곁에서 영예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산 돌들로서 숨님으로 이뤄진 집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직을 위해, (그 제사장직은) 하나님께 잘 받아들여지는 숨적 제사들을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올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기록에 이렇게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영예로이 선택된 모퉁이 (역할)로,
그리고 그이에게 신실한 이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4] 그리고 로마서 9:30~33에서도 인용했었지요.
'보라, 내가 시온에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돌과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바위를 둘 것이니,
그에게 신실한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온에 놓인 모퉁이돌로부터 지어지는 집은 곧 말세에 등장하는 새로운 성전입니다(이사야 2:2). 그리고 이 성전은 사람이 벽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숨결로 세우신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예언하는 증인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성전의 기능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사십니다.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들 모두가 이웃의 기쁨을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메시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는데, 오히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의 비난이 나에게 떨어졌나이다." 무엇이든지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의 가르침이 됩니다. 기록들에 나오는 견딤을 통하여, 그리고 속삭임을 통하여, 우리가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견디게 하시고, 곁에서 속삭이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서로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같은 마음을 품게 해주셨기를 바랍니다. 이는 여러분이 같은 숨내쉼을 가지고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아빠를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의 기쁨을 추구하는 이 하나님의 성전, 에클레시아의 원칙을 메시아께 못박아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편 69:9를 인용하는데, 십자가의 극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입니다. 메시아께서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에클레시아로서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텍스트 해석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과거의 어떤 기록이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견디기 위해 읽습니다. 그리고 독려하기 위해 읽습니다. 또 소망하기 위해 읽습니다. 이 읽음은 "견디게 하시고, 곁에서 속삭이시는 하나님" 곧 성령과 함께 읽는 읽기입니다. 그리고 이 읽기는 공동체적 읽기입니다. 공동체가 같은 성령으로 다른 텍스트들에서 하나의 목적을 끌어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아빠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동양고전이 되었든, 동화책이 되었든, 우리의 지성을 통과하는 모든 텍스트들이,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가 정말 우리가 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서로서로를 받아들이십시오, 메시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드러내신바와 같이. 제가 그 이유를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하나님의 참을 머리에 이고, 할례에 속한 종이 되셨습니다. 이는 선조들의 약속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긍휼을 머리에 이고,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십시오. 나에게 익숙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서로'가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 안에서의 '서로'입니다. 바울은 이방사람들도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 곧 '유대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2:29).
메시아께서 이스라엘에서 나신 것은, 이스라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세계의 모든 이방인을 부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로마서의 세번째 토막에서 길게 풀어놓았던 것처럼). 그 증거가 바로 로마서를 받아보고 있는 유대-이방인 공동체,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럼 바울의 인용들을 살펴봅시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로
내가 모든 민족중에 당신께 고백하고,
당신의 이름을 노래하겠습니다."
바울은 먼저 시편 18:49를 인용합니다. 본문에서 "이런 이유"는 에클레시아의 탄생을 말합니다. 세계를 둘로 나누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하나될 수 있는 근거, 힘, 목적이 생겼습니다. 모든 민족들 안에서, 그 민족들을 위한 화합의 공동체가 출범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부르는 찬양의 이유가,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합의 공동체가 마침내 출범하기 위해선, 한 사람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신원이 있어야 했습니다.
시편 18:47. 48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바울이 이 시편을 어찌 읽었을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난 받는 한 사람, 그리고 그 한 사람 앞에 복종하는 전세계의 사람들, 미리 복종하기 시작한 일군의 공동체들.
또한 말하기를,
"즐거워하라 민족들아, 그의 씨알과 함께."
또한
"모든 민족들아, 주를 높이며,
모든 씨알들아, 주를 칭송하라!"
바울은 로마서 10,12장에서 인용했던 신명기 32장을 다시 가져옵니다(43절). 이 찬양의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서 1:18부터 여기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릅니다. 이 인용문에서 복수 표현과 단수 표현을 구분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민족들이 그의 씨알과 함께 기뻐합니다. 온 이스라엘과 함께 전 세계가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이 확장된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세계로부터 찬양을 받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신명기 32:43을 시편 117:1로 연결시킵니다. 시편 117편은 단 두절밖에 안되는 아주 짧은 시편입니다.
시편 117:1,2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 찬양에 동참하라 호소하는 이 시편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를 누구로 읽고 있을까요? 에클레시아 여러분.
또한 이사야가 말하길,
"이새의 뿌리, 곧 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일어나는 이,
민족들이 그이 안에 소망을 두리라"
소망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모든 기쁨과 평화로 믿음 안에서 흘러넘치게 하셨으니, 이는 여러분들을 거룩한 숨의 능력 안에서 소망으로 흘러넘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인용은 이사야 11:10입니다. 모든 찬양은 이 한 분께 귀결됩니다. "이새의 뿌리"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이고, "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일어나는 이"에서 '일어나는'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분입니다. 그 분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모든 민족들의 소망이 "그이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이 안에"라는 말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그리고 에클레시아가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이 모두 새롭게 됩니다.
에베소서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총괄갱신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 그 안에서 어찌 소망이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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