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23~25
"그에게 의롭다고 산정되었다" 라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 때문만이 아니요, 이제 막 선언 받을 우리,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 주를 일으키신 분께 신실한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예수는 우리의 삐뚤어짐 때문에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셨고, 또한 우리의 의를 위하여 일으켜지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를 봐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결론이자, 로마서 1~4장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이제 바울은 오랜 토라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그 진실을 오늘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그토록 길게 한 것은, 이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드러난 '신실함', '의', '산정' 같은 표현들이, 곧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를 산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신실함입니다. 그러니 '신실함-의'. 이것을 꼭 붙잡고 가야 합니다. 저 신실함을 특정 글자(심지어 하나님의 선한 율법 '토라'의 글자라도)나 자랑을 위한 행위(심지어 하나님의 선한 율법 '토라'를 지키는 것이라도)로 바꿔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신실함을 인간성 외의 것으로 바꿔놓으면, 반드시 분열이 생길 뿐만 아니라, 왜곡된 인간성은 끊임없이 문제의 양상을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판단'이 끔찍한 죄목이었던 이유는, 온전한 인간성이 없으면서도, 헛된 자랑에 기인한 판단이 온갖 분열을 확대 재생산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연결은 커녕(이스라엘 성전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와는 달리), 하나님과 끊어져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본문에서 보았듯, 신실함은 타락을 뒤집는 새로워진 인간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 한 길 뿐입니다. 새로운 인간성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것 뿐입니다. 저 길이 어렵기 때문에, 예수께서 다른 길을 마련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저 길을 걸으셨고, 우리 역시 저 길을 걸으라고 하시며, 성령은 저 길을 걷도록 우리 속에서 힘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신실함, 곧 새롭게 된 인간성의 기초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며, 그 신뢰의 대상이신 이는, '죽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 주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에서 예수의 부활이 처음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점은 주목할만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한 부분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흔히 부활의 얘기를 듣는 이들은 '그래서 예수가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지?' 라고서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만, 부활은 토라 이야기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우리의 신실함의 대상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신실하셨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신실함의 대상이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마침내 밝힙니다.(바울은 이 본문에서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기까지 가장 적절한 때를 참고 기다려왔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 중에서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의를 산정받는 신뢰의 형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부활시키신 그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이 신실함은 그저 노예로서의 무비판적인 복종으로 오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죽음 마저도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토라 이야기 전체는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해석으로 돌입하고, 에덴에서 아담에게 선언된 죽음 마저도 역전된다는 충격적인 결말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신실함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사실에 대한 전복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메시아 예수의 사건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말 그대로 새롭게 창조된 것, 새로움 그 자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을 뒤집는, 말 그대로 새 것입니다. 절망의 상황을 대하는 온전한 인간성은, 문제에 집어삼켜지는 두려움이나,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무상(無想)이 아니라, 부활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과 이러한 신뢰 관계는 죽음보다 굳건한 토대로서, 모든 절망의 순간 속에서 생각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이것이 본래의 인간성입니다. 본래의 인간성은 태어났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신실함이 창조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인간다워집니다. 창조의 좋음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살펴볼 단어는 '산정'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우리 속에 신실함이 새로이 창조되었지만,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정'이라는 표현은 판결과, 그 판결 이뤄짐 사이를 비집고 새로운 시간을 창조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를 산정'했을 때, 아브라함에게 의의 판결이 이뤄졌지만, 아직 그가 의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저 '의'가 이름 뿐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진리에 대한 이 시대의 태도가 이러합니다만)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세계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아브라함에게 선언하신 그 판결과, 아브라함 자신이 일치되기까지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시간, 전에는 없던 시간입니다. 죽음으로 침몰해가는 현시대로 돌입한 새 창조의 시간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말하면, 그 자신이 새로운 시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신실함으로 말입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는, 즉 자신에게 선언하신 의를 이루시는 시간입니다. 그 의가 자신의 살몸을 정복하고, 마침내 그 살몸이 새롭게 되는 날 그 의가 이뤄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신실함을 주시고, 그 신실함으로 그에게 자신의 언약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루시려는 거대한 과정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의 새로움은, 이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의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개인적인 고백을, 복음의 전부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에 들어감은, 곧 새로운 시간으로의 진입니다. 그 시간은 인간성 회복의 시간이고, 하나님의 언약이 마침내 이뤄질 것을 기대하는 시간입니다. 마치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녁과 같습니다. 태양은 떠오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아브라함이 들어간 이야기 곧 하나님이 자신의 판결을 이루시는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왔습니다.(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실함'이라는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는(한 글자로 표현하면 '의' 입니다.)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지만, 우리보다 먼저이므로 우리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과 우리는 같은 이야기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활로 뒤집으신 이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우리의 의가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의 신실함으로 드러났다면, 우리의 의도 예수의 신실함으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신실함은 하나님과 우리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날, 하나님은 더이상 우리에게 의를 '산정'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자체로 의롭게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바울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 - 우리
바울은 먼저 이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우리를 연결해기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에 바울은 아브라함과 우리 사이에 벌어졌던 충격적인 사건을 끼워넣습니다.
아브라함 - 메시아 에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우리
아브라함의 신실함의 정체는 죽은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그 신뢰가 날로 더해지며, 실천의 원동력이 되었을 때, 그는 아담을 뒤집는 진정한 인간으로 자라갔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는 한 분 하나님 신뢰는 정말로 사건이 되어 이 땅에 드러났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실함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침내 드러났습니다. 죽은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부활 사건은, 모든 신실함의 증명입니다. 신실함의 토대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신실함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 들어와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부활로 마무리 짓는 것은, 하나님의 토라 이야기가 부활로 시작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지평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정반대의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미래의 사건이었던 부활이, 우리에게는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신실함'의 대상은 갖습니다. 시간상 차이는 있어도, 같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죽은 몸을 극복해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하나님이요,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도 죽었던 자들 중에서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이요,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같은 하나님께, 같은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연결됩니다. 신실함입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이기시어 자신의 이야기를 이루시는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시신 분에 대한 신실함(곧 하나님이십니다)"을 언급하고나서, 곧장 십자가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넘겨지셨고" 라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말이고,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우리'라는 말을 제대로 읽길 바라고 있습니다.(오랜 시간동안 제대로 읽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입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나뉜 우리입니까? 특정 행위를 지키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서 분열된 우리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연합한 하나님의 우주 가족입니다. 바울이 설명한 십자가의 예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아래 있다는 준엄한 사실 속에서,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한 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한 어린양이었습니다. 그의 희생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탈민족적 연합을 위해서 이뤄졌습니다.
이런 상상은 어떻습니까? 열번째 재앙 때, 모세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서, 자기집 문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집트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는 출애굽의 백성이 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십자가는 보여줍니다. 그렇게 이집트를 떠나는 사람을 아무도 막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어린양의 피로서, 그의 혈통과는 상관없이 그가 하나님의 가족이라 선언된 것 아니겠습니까? 즉 십자가는 죽음을 생명으로 역전시키는, 위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그리고 그 참된 인간성의 입구로 들어가기 전, 모든 사람이 그릇된 기준을 벗어던지고 함께 연합하고 연대하기 위한, 모두에 대한 속죄제사입니다. 탈(민족)적 공동체. 저 괄호에 무엇을 넣어도 십자가는 출애굽을 이룹니다. 단 하나의 조건만으로 말입니다. 바로 신실함. 한 분 하나님을 신뢰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겠다는 하나의 발걸음, 하나님은 그에게 '의'를 산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이야기로 그를 덮으십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고개를 돌려, 아브라함과 같은 방향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이야기가 결말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 메시아 에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연합되어 살아난 우리 - ? - 의가 이뤄짐
바울은 1~4장에 이르도록, <로마서>라는 집의 구조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그 아래 모든 인류, 그 안에 있는 언약백성, 하나님의 이야기는 어찌 진행될 것인가? 십자가로 연합을, 부활로 신실함의 증명을, 의의 산정과 의로움의 사이에서. 그럼 이제 하나의 이야기가 남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제 이 새로워진 이스라엘을 통해서, 무엇을 이룰 것인가? '의의 산정'과 '의로운 존재' 사이에 시간을 펼치신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일을 이루실 것인가? 우리의 의는 어찌 증명될 것인가? 메시아 예수의 부활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예수와 연합되어 살아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저 물음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내일부터는, II. 5:1~8:39 참 인류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을 함께 들여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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