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님'께 드리는 기도에 우리의 모든 인격을 쏟아야 합니다. 왜 그간 이것을 생각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차원의 좋음'에 깨어있기 위함입니다. 개역성경에 '감사'로 번역된 이 말은 '에우.카리스티아'입니다. '에우'는 '잘, 좋음'이란 의미요, '카리스티아'는 '거저 얻는 호의'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새로운 차원의 좋음'입니다. 새로운 차원이라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과 무관한 차원이 아닙니다. 덮음입니다. 겹침입니다. 그 새로운 차원의 좋음이 이 땅에 내려지고 부어집니다. 기도가 그렇게 합니다. 이 새로운 차원은 전통적으로 '하늘'이라 불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중첩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은 겹쳐있습니다.
기도는 '프로스.에케'라는 말을 씁니다. '프로스'는 어느 대상을 지칭하는 전치사이거나, 동사의미 강조를 위한 전철로 쓰입니다. '에케'는 '간구와 맹세'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하시는 한 분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분은 우리에게 숨을 부어주십니다. '프로스.에케'의 '케'는 'X'입니다. 곧 '카리스티아(Xaristia)'의 'X'입니다. 숨을 거칠게 뱉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새로운 숨결로의 호흡입니다. 그 호흡 속에, 우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들어가는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는 본래 처음부터 그 차원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먼 자요, 비염환자인 우리가 이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다만 이제 웃님께 간구함으로 우리의 눈이 열리고, 코가 뚫리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하나님과 세상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었습니다. 온통 길이 막혔던 것같았지만, 새로운 차원은 모든 순간 속에서 뚫린 길, 왕의 대로를 보여줍니다. 이 힘으로 왼뺨을 댑니다. 왕께서 왼뺨을 대며 그 길을 걸으셨으니, 왼뺨을 대는 것은 필경 '왕의 대로'입니다. 그 길에 끝에 왼뺨만이 아니라 온몸을 내어놓으셨으니, 그이는 진정 인간과 세계의 왕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도는 문이다!" 그 문은 말과 숨이 통하는 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문'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문이니, 곧 '하늘 문'입니다.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는 그 문이 기도의 열쇠로 열립니다. 목사님들이, 권사님들이 으레 하시는 말인줄 알았던 이 말이 정말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도록 기도해주세요!" 하늘의 비밀을 이 땅에 말할 수 있는 것은, 말만 가지고 하는게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가 이 새로운 차원의 좋음을 알고, 이 비밀을 자신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보이지 않는 미래와, 보이지 않는 차원에 대한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것을 듣던 이가 이것을 믿고 받아들여, 그 보이지 않는 차원과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어찌 계산할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을 눈에 보이는 원리로 어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삐뚤어짐에 모든 삶의 국면이 틀어져 신음하는 이가,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좋음을 들이마십니다. 미래로부터 오는 시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신음을 멈추고 두 다리로 일어납니다. 곧 독립(獨立)입니다. 허나 눈으로 보기로는 홀로 섰으나, 그는 홀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를 일으켜 붙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어났으니 곧 부활입니다. 나 역시 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어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나는 이것을 알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을 반추해보니,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그 분께 매달려 있었습니다. 몸뚱이를 가지고 이 땅에 나왔는데, 왜 사는지 알지 못해 생각없이 살던 나는, 겉으로는 반항하고, 아무런 문제 없는 듯 센 척을 하고 있었지만, 내 속은 무언가 의미를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그이가 찾아오시어, 나의 의미가 되어주셨습니다. 나는 그 날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그 때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생각하면,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님을 압니다. 새로운 차원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일의 목격자요, 증인입니다. 나 역시 이 일에 단단히 묶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 일에 바울이 묶여 있고, 콜로사이에 있는 예수 공동체가 묶여 있고, 그리고 오늘 이 글을 보는 씻어난 이들과, 온세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친 자들이 모두 이 일에 묶여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일에 묶이시기 바랍니다. 곧 새로운 차원의 좋음을 호흡하며, 이것을 전하는 일입니다. 나는 더욱 묶이고 싶습니다. 이것은 나의 기도요, 맹세입니다. 나는 이 일에 더욱 묶여, 새로운 차원을 걷고 싶습니다. 나의 혀와 나의 말이 차원을 관통하는 문으로 쓰이기를 열망합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이 나를 통해 드러나니, 영광이요, 자격없는 자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나는 이 말들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는 받들어 내 속에 모십니다. 말을 모시지 않고, 말을 주신 이를 모시니, 나는 말 아래 있지 않고, 말 위에 있습니다. 그럼 달려야지요. 나는 말로 판단 받기를 거절합니다. 모든 죄책감과 옳고 그름에서의 해방입니다. 말 위에 오르니 제 3의 길이 보입니다. 곧 숨 길입니다. 말 타고 달리는 숨길입니다. 말로 하는 옳고 그름, 너와 나를 벗어난 제3의 길, '숨쉬는 우리'.
[2]
우리의 신체는 말에 의해서 재단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말 따라갈 몸 아니라, 숨 따라갈 몸이요. 말에 의해 정죄받을 몸이 아니라, 숨에 의해 말을 다스릴 몸입니다. 그러니 숨에 익숙한 몸은 지혜롭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오래 걸리고 복잡한 것이, 몸으로는 순간입니다. 말로 쌓고 체계를 만들어놓은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감옥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지금 <골로새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상황과 닮았습니다. 그는 지금 에베소 지역에 있는 감옥에 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자신의 신체로 증명하며 말입니다. 바울은 그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 말은 그를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갇혀있지' 않고, '있습니다'. 하늘숨으로 그는 감옥을 덮는 더 큰 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는 그 숨의 흔적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시작할 때,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이,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콜로사이 지역에 있는 씻어난 이들 곧 믿음직한 가족들에게
우리 아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저주심과 하나됨이 있기를!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적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빠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골로새서>는 수미상관입니다. 앞과 뒤가 같습니다. '기도'도 나오고, '감사'도 나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이제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분 아버지를 위로 두고, 하늘숨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과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톰라이트의 말을 인용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또한 그들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알면,
만나기 전에도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이어지는 유대가 생겨난다." <옥중서신> p.252
이 기도로 연결된 유대, 말로 다할 수 없는 연대. 그래서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연대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을 따라 말입니다. 서로를 적삼은 양편이 아니라, 그 양편을 모두 덮는 가운데 입니다. 숨으로 가득한 우리의 '가온'이 '가운데'로 걸으라 말하지 않습니까? 온통 니 편, 내 편으로 나눠놓은 세상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좋음은 제 3의 길을 보여줍니다. 왼뺨을 대는 길이요, 자신을 내어놓는 길입니다. 이 일을 홀로 하면 괴롭겠지만, 숨 쉬는 이들과 함께하면 거대한 연대를 이뤄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좋음을 아는 개개인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니, '예수'입니다.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지혜가 몸에 익어 있습니다. 머리로만 알지 않습니다. 이 지혜로 공동체 밖을 대합니다. 기존 개역성경은 이 공동체 밖 사람들 대하는데 시간낭비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공동체 밖 사람들을 대하기 위한 모든 기회를 매점매석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의 해석을 택하겠습니다. 모든 순간을 다해서 이 위대한 이름의 공동체로 오게끔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지혜가 몸에 익도록 해야겠습니다. 이것이 미래를 위한 참준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어도 아니고, 자격증도 아닙니다. 언약 공동체의 일원은 영어를 못해도 좋습니다. 스펙이 좀 남들보다 못하면 어떻습니까? 올곧게 제3의 길을 걸을 수 있으면, 십자가에 닿습니다. 진리가 몸에 익으면 막힐 것이 없습니다. 만약 남보다 나아지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면, 나도 양의에 빠진 것입니다. 제3의 보이지 않는 차원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을 둘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그렇게 가도 나는 그렇게 안가렵니다. 이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그 혼란스러운 걸음에서 벗어나렵니다.
진리를 몸에 익히고, 모든 순간들 속에서 그것이 익숙하게 하며, 진리를 행하기 위해 모든 순간들을 다 사버립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도 맡기셨다면, 시간 조차도 우리의 감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모든 날을 안식일로 만들어버립시다! 아니, 이 일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시작 하신 일입니다. 모든 날을 안식일로 만드는 위대한 노동이, 이미 예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최종적인 일곱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노동하나 노동하지 않고, 영원한 쉼 안에 있습니다. 노동하나 노동하지 않는 신비가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일에는 시급과 연봉을 매길 수 없습니다. 사랑은 노동을 노동이 아니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진리가 몸에 익는다는 것은 그러한 것입니다. 사랑이 몸에 익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옳습니다. 말로 재단할 수 없는 더 큰 차원의 옳음입니다. 거룩한 호흡니다. 그러니 매일이 안식이요, 그 안식속에 누구보다 열심히 사랑합니다.
이것이 되면, 그 다음 '소금'이 필요합니다. '소금'이라 함은, 새로운 차원의 좋음을 표현할 수 있는 양념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들이 소금이 됩니다. 사람들이 그 보이지 않는 차원의 좋음을 느낄 수 있게 돕는 모든 것들도 소금이 됩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그 안과 밖을 높은 성벽으로 갈라놓지 않습니다. 소금은 언약 공동체와 세상의 연결을 뜻합니다. 양념을 치는 것은, 그들의 입맛을 맞춰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입맛을 만족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결국 맛을 넘어서 뜻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무색무취의 그 뜻. 그러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그 뜻. 몸에 익은 지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소금입니다.
[3]
바울은 튀키코스와 오네시모를 보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감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까? '나 이렇게 고생하고 있어'를 말하고자 합입니까? 그런데 뒤를 보니, 바울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면, 사람들이 바울의 사정을 알게 되고, 그들의 마음이 격려를 받는다고 써있습니다.
무언가가 벌어진 것입니다. 감옥에서조차, 새로운 차원의 좋음으로 벌어지는 충격적인 역전이! 이 소식을 들으면, 감옥 조차 막을 수 없는 그 숨결의 힘에 씻어난 이들이 격려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일은 바울과 콜로사이 지역의 씻어난 사람들 사이의 추억으로 남겨두었나봅니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도 알게 되겠지요. 세상 모든 일은, 창조자의 정신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은 소멸되지 않고, 모두가 몸적 차원으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세상을 창조한 이가 기억하고 있으니, 그 분이 말씀만 하시면, 그 분의 기억이 다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이 이렇게 일어날 것입니다. 최종적인 심판도 그 날에 벌어질 것입니다. 이 말이 성경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God knows!
오늘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두었음 합니다. 바로 '오네시모'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골로새서> 이후에 다룰, <빌레몬서>의 주인공입니다. 이 사람에게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우리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될 것입니다. 바울과 콜라사이 지역의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한 힌트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