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유대사람들입니다. 유대사람들 중에서는 이들만이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다스림을 위해 일합니다. 고작 세 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로부터 위로를 얻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예수 공동체를 보는 유대인들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신고하고, 핍박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던 유대 사람이 본인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로마서>에서 보았듯, 그는 이제 유대인들이 완고함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를 정말 바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바울에게 유대인 동역자 세명은 정말 각별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 세명은 무슨 일인지 함께 갇혀 있습니다.
익숙한 이름들이 보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언약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은 '격려의 아들' 바나바가 보입니다. 또한 그의 사촌, <마가복음>을 썼고, 바울과 전도 여행을 함께 하기도 했었던 '마가'도 보이고요.
B의 에팝라는 이미 <골로새서> 맨 처음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사랑으로 섬기는 에팦라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들을 머리에 인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믿음직한 사람이에요.
또한 여러분이 거룩한 숨결 속에서 사랑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이에요.
에팦라는 고향이 콜로사이이자, 그 곳의 공동체 식구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게 콜로사이 지역의 상황을 전달해주고, 다시 이 <골로새서>를 들고 콜로사이 지역으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을 짤막하게나마 소개합니다.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사람들이 '텔로스(끝)를 이루고', '그 이룸으로 흘러넘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라오디케아와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사람들도 섬기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쓴 의사 '누가'와 데마도 콜로사이 지역의 씻어난 이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이렇게 총 여섯 친구가 등장합니다. 세 명은 감옥에 함께 갇혀있고, 세 명은 면회를 온듯 합니다.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이 <골로새서>와 다른 편지들을 받아들고서, 공동체들에게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납니다. 이렇듯 각기 떨어진 공동체들에게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는 일은 중요한 사역이었고, 심지어 바울이 갇혔을 때에도 친구들의 도움으로 바울의 편지들이 다른 지역의 공동체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바울의 또다른 몸이라 하겠습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이 몸을 감옥이 가둘 수 없음이 자명합니다. 가두어놔도 이들을 찢어놓을 수 없고, 가두어놔도 이 몸을 통해서 복음은 전파됩니다.
또한 이 몸은 점점 커져갑니다. 떨어져 있는 각기 공동체들을 바울의 편지가 서로 연결하고 있으니까요. 이 고대의 공동체와 오늘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바울의 편지로 이렇게 연결되듯 말입니다. 떨어져 있다고 다른 공동체가 아니고, 시대가 다르다고 다른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 공동체의 중심은 죽고 산 사람이요, 함께 숨님으로 호흡하기에 한 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 몸은 실재합니다.
또한 이 본문을 통해서 가정에서 모였던 공동체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눔파와 그 부인의 집에서 모이는 공동체'.
[2]
바울의 편지가 여러 공동체들을 묶어주는 끈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는, 이 편지들을 공동체들마다 서로 돌려보았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은 다음에는,
라오디케아 공동체에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
라오디케아 공동체에서 오는 편지도 읽으세요.
아, 그리고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이 여섯친구만이 아니었습니다. 명단에서 빠진 사람이 있는데, 앞에서 등장했었던 '오네시모'라는 사람입니다. 그럼 바울은 왜 "오네시모도 안부를 전합니다" 이런 말을 쓰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골로새서>와 함께 전달되고 있는 '또 다른 편지'에서 그 자세한 내막을 밝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편지가 다음 주부터 다룰 <빌레몬서>입니다. 오네시모는 거기 가서 만납시다.
아르킵보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바울은 그에게, "주 안에서 네가 맡은 것을 확실히 알아, 그것을 이루라!"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 친구에게 영어 문장을 설명하던 도중에, 'see to it that'이라는 표현 나와 설명해준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밤에 <골로새서>를 연구하는데, 이 아킵보에게 했던 바울의 말의 영어번역이 "See to it that"인거 있죠? 문장 전체는 이러합니다.
"See to it that you complete the work you have received in the Lord."
그래서 잠시 흠칫했습니다. 오늘 하루의 이런 저런 사건들 속에서 제 마음에 see to it that이 남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주께서 우리가 주께 받은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받았습니까? 그것을 어찌 이루시겠습니까? 주 안에서 우리가 받은 것을 확실히 알아, 그것을 이룹시다!
[3]
적어도 이렇게 말하는 바울은 자신이 주로부터 무엇을 받았고, 그것을 어찌 이뤄나갈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있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써서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바로 '그 이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골로새서> 맨 뒤에 나오는 이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알고자, 계속 골로새서를 들여다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룸'이 무엇이고, 바울이 '이룬 것'은 무엇인지 알고자 말입니다. 허나 글자로는 늘 부족하고 모자르기만 합니다. 어쩌면 '그 이룸'은 2차원의 지면이 아니라, 릅니다. 3차원의 시공간 안에서만이 생생히 드러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몸되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그리고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룸'을 '그 이름'이라 부르면 어떨까요? 우리가 삶으로 이뤄야 할 것을 , 저더러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 한다면, 나는 '그 이름' 뿐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루겠습니다. 나의 나된 것이 바로 그 이름 때문입니다. 내가 이룰 것도 그 이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