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대한 구약의 약속이 새 창조의 약속으로 확장됨(로마서 4:13 "코스모스의 상속자" 아브라함, 8:17~25)
-"그리스도 안에서, 어둠의 세력을 쳐부수고 그 자리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믿는다"[각주:1]
-부활/승천으로 출범하여, 모든 적이 굴복할 때까지 지속되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궁극적인 나라의 완성(고전 15:23~28)
-"그의 사랑의 아들의..." : 세례로 왕으로서 임명되었음이 선언되었기 때문. 마태복음 2:15에서 인용된 호세아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풀려남을 얻어요" : 예례미야 31:31, 에스겔 36:16~36
[1]
어제 정말 중요한 내용이 있었는데, 고작 몇줄로 퉁치고 지나간듯 하여 오늘 다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때문에"라고 나오는 부분이, 바로 어제의 그 부분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숨결 속에서 사랑하고 있다" 는 구절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하나님의 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자주 들었지만, 그 십자가와 부활 사건 마저도 우리에게 숨 주시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숨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던 방법이요, 또한 말과 함께 나와 그 말이 이뤄지게 하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곧 성령님입니다. 성령하면 다른 말 아니라 한자 표현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입니다.
그 숨결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던 그 숨결을 우리도 호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을 호흡할 때마다 새 사람이 됩니다. 그 거룩한 숨결의 호흡은, 우리에게 힘만 주는 것이 아니라 깨침도 줍니다. 하늘로부터 부어진 숨결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의 소망을 갈망하게 하며, 그 하늘 소망에 대한 갈망은 우리를 사랑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 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숨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지금 들이 마시고 있는 공기처럼 말입니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이 있는 공간에도 숨님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비염환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님을 들이마시지 못하고, 그 숨님으로 힘내지도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진리에 올곧지 못함의 이유가 바로 이 영적 비염에 있습니다. 이것을 뚫어내는 일은 간단합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3장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바꾸고, 돌이켜, 여러분의 비뚤어짐으로부터 벗어나 기름칠을 받으십시오.
이같이 하면, 주의 얼굴로부터 다시 시원하게 숨쉬는 순간들이 올 것이며..."
생각을 바꾸고, 돌이켜, 여러분의 비뚤어짐으로부터 벗어나, 숨님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비염이 치료되어 시원하게 성령으로 숨쉬는 순간들이 온다고 말합니다. 지금 콜로사이에 있는 씻어난 이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들은 숨님으로 호흡하며 새로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 숨님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그들의 일상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이 소식을 바울과 디모데가 들은 것입니다.
온세계에 '이 숨님으로 호흡하는 인간다운 삶' 전하기 위하 고분분투 하는 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날부터 숨주시는 하늘의 주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2]
기도는 다른 것 아닙니다. 숨줄입니다. 권사님이신 저희 어머니가 자주 말씀하시기를, "기도는 호흡이야" 하셨습니다. 이 말 참 맞는 말입니다. 기도는 호흡이지요. 성령으로 호흡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에베소서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엡 6:18, 개역)
무시로 성령, 그 하늘과 연결된 숨줄로 호흡하고 있으면 그것이 곧 기도하는 말입니다. 무릎을 꿇어도 기도요, 걸어도 기도요, 가만히 있어도 기도입니다. 성령으로 호흡하면 말입니다. 콜로사이의 씻어난 사람들이 그 거룩한 숨결 안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에, 바울이 그 숨줄을 붙잡아 하늘의 아빠께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다음의 내용으로 말입니다.
1) 여러분이 숨님을 따라 모든 지혜와 같은흐름으로
하나님의 뜻 깨닫는 것이 가득 하기를,
왜 이 기도가 나오는줄 아시겠지요? 숨님을 따르는게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숨님을 따르면,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 뜻 깨닫는 일이 날로 날로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혜'라는 말은 '경험으로 체득한 앎'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숨님과의 추억으로 일상을 채워간다는 말입니다. 어렵거나 곤란한 순간 속에서도 숨님을 따르면, 그것이 잊을 수 없는 나의 지혜가 됩니다.
그리고 '같은 흐름'이라 풀어놓은 말은, 개역성경에는 '총명'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흐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숨결의 방향에 따라 나도 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원어로는 '쉬네시스'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나중에 '이해하다'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총명으로 푼 것 같은데, 그저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 뜻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혜도 총명도 숨님과 같이 살아가는 우리네 모든 일상을 뜻하는 말이지, 머리 좋은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해해선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숨님을 삶속에서 경험하고, 그 분과 함께 흘러, 하나님의 뜻을 깨칩니다. 책상머리에서가 아니라 숨님을 호흡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를 몸으로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2) 주께 걸맞게 살아서 모든 일에 그를 기쁘게 하기를,
그럼 이 기도내용도 이해가 됩니다. 숨님을 따라 사는 삶을 먼저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숨님 따라 사는 삶이었습니다. 병자들을 일으킨 힘도, 귀신을 쫓아낸 심도, 그 분의 말씀의 능력도, 겟세마네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힘을 따랐던 의지도, 십자가를 묵묵히 지닐 수 있는 인내도, 최후에는 그 죽었던 예수를 일으키는 전무후무한 힘은 바로 숨님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숨님으로 교통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호흡을 맞추어가며 세상의 타락을 뒤집는 역사적 사건을 이뤄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걸맞게 산다"는 말은 성령을 따라 산다는 말입니다. 숨님을 따르면 우리는 주와 같이 삽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이 말을 이상하게 듣지 마세요. '그리스도'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의 기름이 상징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 성령을 부음받아, 그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승천하신 예수는 안계셔도, 숨님을 따라 엄마 뱃속에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일으키는 베드로는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베드로 능력있네" 하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한게 아니라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숨결 따라 행했을 뿐이고, 그 병자를 일으킨 능력은 하나님 거룩한 숨결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이름 뒤에 그리스도를 붙여야 합니다. 재덕 그리스도. 숨결 따라 사는 저는 그리스도로서 오늘 이 땅을 삽니다. 그 기름바른 길을 올곧이 따라가려 합니다. 숨님을 들이마시기 위해 저의 속알을 넓힙니다. 넓혀진 속알로 밀어 들어오는 그 숨결로 힘입어 일상을 새롭게 살아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처음엔 이게 잘 안되겠지만, 그래도 날마다 하는겁니다. 비염환자가 코로 숨을 쉬기 어렵지만, 그래도 날마다 코로 숨을 쉬도록 애쓰고 애써야 콧속 점막이 강해집니다. 날마다 숨님으로 호흡하는거 연습하지 않으면, 주께 걸맞게 사는 삶은 영원히 요원합니다. 그러니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숨님은 이미 공기와 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3) 모든 하나님닮는 일로 열매 맺게 하시며
하나님 깨닫는 것에 쑥쑥 자라게 하시기를,
거보세요. 숨님으로 살고자 애쓰면 자라남이 있잖아요? '하나님닮는 일'이라고 풀어놓은 말은 개역성경에서는 '선한 일'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선(善)'에 대해서는 로마서 풀이할 때 자주 설명했으므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여간 숨님따라 살면 우리는 주께 걸맞는 삶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깨닫는다는 말도 머리 굴려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닮은 일로 열매를 맺는데 어찌 머리로만 알 수 있습니까? 몸으로 아는 것입니다. 일상의 차원입니다. 생각과 생활이 유리된 내가 아니라, 정말 달라진 새 사람으로의 나입니다. 숨결을 따르면 그렇습니다.
4) 뚜렷이 드러나시는 그이의 다스림을 따라 모든 힘으로 힘있게 되어,
모든 버티고 오래 참는데 이르기를.
"뚜렷이 드러나시는" 이라는 말은 '영광'이란 말의 번역어입니다. 영광은 다른게 아니라 뚜렷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숨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날마다 자라남이 있고, 열매 맺음이 있고, 따라서 그를 통해 그이의 다스림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 공동체를 칭찬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칭찬합니까? 진정으로 선한 것이 뚜렷이 드러나니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첨언하면, 우리가 하는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래를 불러재끼는게 찬양이 아닙니다. 찬양은 '칭찬'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상 속에서 숨님으로 호흡하며 사는 것만이 그이를 뚜렷이 드러냅니다. 그렇게 산 사람의 찬양이 정말 삶과 꼭 들어맞는 칭찬이 됩니다. 그러니 찬양하는 이들은, 더욱 삶속에서 숨님으로 호흡하고자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숨님으로 호흡하며 살면, 힘이 생깁니다. 더불어 어려움도 생깁니다. 호흡하지 않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호흡하며 사는 일은, 마치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도 같습니다. 온갖 오해를 뒤집어 쓰고 독배를 마셔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당장 돈되는 일도 아닌데, 숨님따라가야 한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려움이 옵니다. 눈 앞의 이익만을 쫓는 사람들은 역사 전체를 이끌어가시는 성령을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은 버티고 오래 참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얼마나 버티셨습니까? 얼마나 오래 참으셨습니까? 끝까지입니다. 성령은 그치지 않으니, 그 성령을 끊임없이 호흡하면, 끝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9가지 열매중 하나가 '인내'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기도가 이렇게 끝났습니다. 정리해보면,
1) 먼저는 숨님을 숨쉬는 일상입니다.
2) 그리고 숨님 따른 주께 걸맞는 삶 사는 일입니다.
3) 그 숨님 들이마셔 날마다 자라나며 열매 맺습니다.
4) 그렇게 예수의 다스림을 자신의 삶으로 뚜렷이 드러내고,
5) 혹여나 이러한 삶을 끝장내려는 세력과 움직임에 대해서
견디고 참아내는 것입니다.
결국 요약하면 숨님으로 호흡하는 것 하나만은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3]
그 다음 내용이 충격적입니다.
"여러분의 조건을 만족시키신 아빠"가 등장합니다. 즉 콜로사이 사람들은 이제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당연히 숨님으로 숨쉬는 삶에 대한 모든 조건이 구비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바로 출애굽입니다. "씻어난 이들의 밭의 몫을 빛 속에서 얻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치 가나안 같은 것입니다. 가나안은 어떠한 곳입니까?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들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주신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에게 호흡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숨보다 말을 앞장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을 속에 담아, 그것을 삭여서 힘을 내도록 하는 것은 숨님으로의 호흡입니다. 이것 없이는 말씀 못지킵니다.
이 말을 하면 가나안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뜻따라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입니다. 땅이 있고, 내가 있고, 숨이 있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계십니까? 그럼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서 있는 자리가 가나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나안 땅 수복하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땅끝까지 가라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즉 이 지구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 성전이 하나님 임재의 구름으로 가득찼다는 말입니다. 쉐키나 입니다. 곧 숨님이십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가나안 땅을 얻게 된 시작은 출애굽이었습니다. 어린양이 죽고 백성이 구출받아 마침내 가나안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출된 백성을 날마다 '숨님기둥'이 그들을 덮고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 이후에, 성령이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럼 온 세계를 숨님으로 덮은 그 위대한 출애굽 사건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가 어린양이요, 어린양의 죽음은 어둠의 왕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어둠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다스림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풀려남(개역에는 '구속'이라 되어 있습니다)을 얻었고, 비뚤어짐(개역에는 '죄'라 되어있습니다)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풀려남은 성령으로 숨쉬기 위한 풀려남이요, 그 자유는 성령으로 숨쉬어 더이상 비뚤어진 삶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입니다.
오늘 할 말 다했습니다. 이제 일상으로 살아내는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애굽을 믿는 이들이여! 숨님을 따라 이 광야를 지납시다. 여기는 괴물과 해산한 여인만 남은 땅입니다. 그럼 다른 것 있습니까? 하나님의 숨결따라 살고 참고 끝내 이기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도 그러한 날 중 하나입니다. 나는 살겠다 하겠습니다.
예수의 출애굽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본 블로그에 있는 <성경 전체 이야기>를 한 편씩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자세히 써놨습니다. 아마 '출애굽'으로 검색만 해도 그동안 해왔던 많은 말들이 나올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