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3일(난지 13339일) 갈라디아서 강의를 마치고, 골로새서를 다시 연구한다
골로새서 1:1~8
*톰 라이트가 나눈 목차에 의하면, 내가 번역한 본문은
I. 인사말(1:1,2)
II. 바울의 소개와 주제 도입(1:3~2:5)
1. 감사(1:3)~8
에 해당한다.
[1]
하나님의 뜻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이,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콜로사이 지역에 있는 씻어난 이들 곧 믿음직한 가족들에게
우리 아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저주심과 하나됨이 있기를!
-"콜로사이 지역에 있는 씻어난 이들 곧 믿음직한 가족들"이란 표현이 가지고 있는 책임
-그들에게 카리스(공급)와 샬롬(효과)
[2]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적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빠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직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여러분이 하늘들에쌓아둔 소망에 기대어
모든 씻어난 이들에게 사랑을 품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이 소망은 여러분이 일전에 복음의 참말 속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망이죠.
-감사(1:3~8) - 기도(1:9~23) - 실천(1:24~2:5)로 긴밀한 연결. "2:6의 '그러므로'는 하나님의 복음과 골로새 교인의 상황, 그리고 자신의 소명을 한데 묶음으로써 신중하게 세워진 토대 위에 권면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음을 가리킨다"[각주:1]
"재덕아, 너는 왜 일 터지지기 전에 나를 찾지 않니?"
-믿음-소망-사랑의 정식(fomular). 이 '믿음'은 헌신이라는 동적인 실천과 신념의 내용을 모두 지시한다(로마서 4:24). '사랑'은 모든 성도로의 확장. "하늘들에 쌓아둔 소망"(벧전 1:4, 딤후 4:8). 갈라디아서 4:26과 연결되는, 씻어난 이들의 결말.
[3]
그 복음은 여러분에게 이미 왔듯이, 온 세계 속에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가고 있고요.
마치 그 날 같아요. 여러분이 듣고, 참 속에서 하나님의 거저주심을 깨닫기 시작하던 그 날.
이런 내용들을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사랑으로 섬기는 에팦라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들을 머리에 인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믿음직한 사람이에요.
또한 여러분이 거룩한 숨결 속에서 사랑하고 있다고 우리에게전해준 사람이에요.
-'세계 속에서 자라나는 식물'로서 교회
<골로새서>를 시작한다.
<골로새서>를 쓰고 있는 바울과 디모데는 당시 에베소에 있는 감옥에 갇혀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골로새서>를 비롯한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를 묶어서 옥중서신이라 부른다. 바울이 에베소 감옥에 갇혀있던 때가 A.D. 62년이고, 64년이 네로의 박해가 있던 시기이며, 바울은 67년에 참수형을 당한다. 로마시민은 고문없이 참수형에 처하는 것이 당시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골로새서>의 부제를 붙인다면 이렇게 붙이고 싶다. '죽음 앞에서'.
그는 왜 감옥에 갇혔으며, 왜 죽임당했으며, 왜 죽음 앞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그는 도대체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가? <골로새서>를 읽으면서이러한 질문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붙잡아야 한다. 분명히 뭔가가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혹은 알아도 붙잡지 않는. 죽음을 꿰뚫고 나가는 한 줄기 무엇. 진정 절망을 뒤집는 것은 근거없는 긍정이 아니라 바로 이것일 것이다.
[1]
바울은 서신서의 인삿말에 자신의 사상을 압축시켜 놓기로 유명하다. 일상적인 인사가 아니다. 바울 생각의 전모를 드러낸다. 그는 자신과 디모데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 이 말은,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요, 과정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다. 그의 인생사 안에서 말한다면, 시작은 다메섹이요, 과정은 이후 시작된 전도여행이다. 다시말해 시작은 마음을 바꿔 예수를 받아들인 그 날이요, 모든 날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가 콜로사이 지역에 있는, 바울 자신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자들에게 편지한다. '씻어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다. 믿음직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산다는 말이다. 바울과 같은 걸음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거저주심'과 '하나됨'이다. 하나되자는 말은 숱하게 들어왔다. 가정 속에서, 집단 속에서, 나라 안에서, 민족과 민족이, 피부색과 국경을 넘어. 다들 싸움없이 하나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거저주심'이 없으면 하나될 수 없다. 우리가 왜 하나될 수 없는지를 생각하면 분명하다. 하나될 수 없는 것은 분배의 문제 때문이다. 두 가지 차원을 생각해보자.
하나는 물질적 차원의 분배다. 서로 더 가지려고 하고, 혹은 갖지 못한 사람이 빌어먹고 있는데, 이 상황 속에서 하나될 수 있겠는가? 거저줌이 필요하다. 곧 함께 갖는 일이 필요하다. 이 '함께 갖음'이 희랍어로 '코이노니아'로 공동체다. 교회다. 함께 갖지 않으면 공동체 아니다. 함께 재화를 소유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소유물에 대한 제3자의 권한이 필요하다.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야. 우리꺼야.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안된다. 그럼 우리는 누구꺼야? 여기에 답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또다른 우리가 하나될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나됨을 위해서 우리는 신께 요청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모두의 제3자가 되어주시라고. 제3자의 자리가 곧 왕의 자리다. 모든 이를 판단하시는 자리.
다른 하나는 비물질적 차원의 분배다. 사람의 내면에 대한 분배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알아줌'이다. 사람은 서로 알아줘야 산다. 그래야 산다. 그런데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하다. 이 서운함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들끼리 편을 나누는 정서적 기재로 작용한다. 따라서 서로 알아줘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아주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가 있어서 그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면, 그 사람의 내면이 병든다. 그래서 남들이 알아주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알아주는 공동체만이 균열없이 하나될 수 있다. 그러나 알아주기 전에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지금 '가치'라고 뭉뚱그리며 말한 이것은 무엇인가?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 사람의 사람됨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는가?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가치부여는 '신'이다. 흔히 '천부인권'이라 말하지 않는가? 왜 '천부'인가? 모든 인권은 이 하늘에 빚져 있다. 하늘 없이, 인간의 인간됨을 말할 수 있는 인간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래서 모든 인간의 물질적, 비물질적 필요를 채우시는 한 분. 그 분의 거저주심 안에서 만이 하나됨을 누릴 수 있다. 또한 '거저'가 아니어도 안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끝도 없이 부어주기를 원한다. 그 부어주심을 우리가 무슨 수로 갚는가? 부모 역시 은혜 갚음을 바라고 부어주는게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오늘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바로 '사랑' 때문에. 그래서 사랑은 거저 주는 것이다. 거저 주는 것은 하나되게 한다. 만약 부모가 나중에 자식이 은혜 갚을 것을 바라고 그렇게 한다면, 그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온전하겠는가? 서로 책임을 지우게 하고 따지는 관계 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니 거저가 아니면 안되지. 이 '거저'의 가치에 대해서는 자끄엘륄의 <하나님이냐, 돈이냐>라는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2]
감옥 안에서 바울은 콜로사이 지역의 씻어난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바울은 앞에서는 "우리 아빠"라고 하나님을 부르더니, 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빠"라 부른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빠라서 우리가 씻어난 이가 되면 예수와 한 아버지를 둔 형제가 된다.
바울은 우선 감사하는데, 그 감사의 내용은 믿음, 소망 사랑이다.
먼저 믿음이다. 콜로사이 지역에 있는 씻어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직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믿음직함은 신실함이다. 믿음으로 속알이 꽉 차있는 상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믿을만하다. 그들이 그리스도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서 한 길 올곧게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삐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망이다. 그 소망은 하늘에 쌓아둔다. 하늘은 무엇인가?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가 계시다. 우리가 싸움없이 하나되어 살기 위한 모든 것이 그 하늘로부터 온다. 하늘에 소망을 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 하늘이 내려와 땅과 하나된다. 그래서 땅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하늘에 계신 예수는 땅에 자신을 뚜렷이 드러내신다. 모든 정의가 바로잡히고, 진실이 드러나는 때다. 이것이 소망이다. 사랑과 정의가 마침내 이긴다는 소망이다.
이 소망이 사랑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왜 사랑하는가? 사랑이 옳고,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이다. 최후에 드러나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주의 날을 위한 지혜로운 배팅이다. 그 날을 믿고 건다. 그 날을 믿고 다른 이를 알아주고, 거저준다. 하늘이 땅과 하나된다. 그 하늘은 사랑이요, 정의요, 옳음이요, 진실이고, 미래다. 그 하늘이 땅과 하나될 것을 소망하고, 이 땅을 살아낸다. 마치 이 나라의 독립을 믿고, 자신의 삶을 내어놓아 독립운동하는 것과 같다. 사랑이 그렇다.
이 소망에 대해서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참말로 하는 복음은 하늘을 말한다. 미래를 말한다. 소망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믿음직스럽게 그 길을 걷게 한다.
[3]
A.D. 1세기. 예수의 이야기는 폭발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왜 일지를 생각해보라. 그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사람들이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그 '옳음'이 한 사람의 삶으로 뚜렷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죽었던 그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하늘에 분명한 소망을 두게 하신 이 이야기는 참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소망이었다.
콜로사이 지역에 있는 씻어난 이들은 에팦라를 통해 이 복음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바울은 감옥에서 그 첫날을 회상한다. 복음을 전해들었던 그 날, 그 사람들은 듣고 깨달았다. 그리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은 의미심장한데, 그들이 듣고 깨닫고 사랑할 때, 그들은 거룩한 숨결 속에 있다. 그 숨결을 호흡하며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받는다. 즉 그들은 하늘이 정말 있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힘주는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음을 몸소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콜로사이 지역의 사람들을 머리에 이고 섬기는 에팦라가 감옥에 있는 바울과 디모데에게 전달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