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서는 두 가지 말이 등장한다. 먼저는 '속이는 말'이다. 순수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유용하고 유창한 말이다.다른 말은 '가르침'이다.
속이는 말은 가르침에서 나온다. 역설적이게도 기준이 되는 말 없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단들이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사설로 속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여기서 '왜곡'이라 풀어놓은 말은 본래 '덫, 올가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 중에 함정을 파둔다는 말이다. 또한 '분쟁'은 '디코스타시아'인데, '두 패로 나누어 맞선다'는 뜻이다. 결국 왜곡과 분쟁은, 사람들을 둘로 만들어,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짜먹자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떠올려보라. 그 태고적 시절에도, 가르침의 말이 있었고, 속이는 말이 있었다. 속이는 말은 가르침을 왜곡함으로 힘을 얻었다. 즉 기생이다. 악은 악 그 자체로 힘이 없다. 언제나 선에 기생해서 그 힘을 이용하고자할 뿐이다. 그런데 최초 인류는 가르침이 아닌 속이는 말을 먹었다. 그 결과가 순수한 사람들은 속고, 악인들은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을 두 패로 갈라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착취하게 되었다. 착취하고 배불리는 쪽은 자꾸 사람들을 속여서, 자신들은 문제가 없는듯, 세상은 안전한듯, 하나님 닮음을 왜곡한다. 인류의 역사는 분쟁과 역사가 아니던가.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주시하고 떨어지라 한다. 주시하려면 먼저 스스로가 가르침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하겠고, 떨어지려면 여러 유혹들을 끊어낼 수 있는 단호함이 필요하겠다.
[2]
바울은 '말'얘기에 이어서, 이제 '들음'을 언급한다. 로마에 있는 예수 공동체는 경청하는 공동체였다. 가르침을 내치지 않고, 그 옳은 말에 자신들의 귀를 내어준다. 진리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 않는가? '순종'이라 번역된 단어의 본래 뜻은 '경청'이다. 잘 듣는데서 행동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위에서 얘기했던 '잘 아는 것'과 '단호함'이 여기에 등장한다. 잘 알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미 잘 듣고 있다. 들음으로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 닮아갈 단초를 얻었다. 그럼 이제 단호함이다. 단호할 수 있는 근거는 미래에 있다. 속이는 말의 결말이 무엇인지 보라. '평화'의 하나님은 사탄을 이 잘 듣는 순수한 사람들의 발 아래서 완전히 박살내실 것이다. 평화와 진실은 함께 간다. 진실하지 않고는 참으로 평화할 수도 없다. 속이는 자중에 으뜸은 사탄이다. 그 사탄의 말로를 보라. 평화가 이뤄지는 그 날, 사탄의 자리는 없다. 이 미래 소망을 붙들면, 현실 속에서 단호할 수 있다. 악과 섞이지 않을 수 있다.
이 잘 아는 것과 단호함을 위해서 힘을 구한다. 왜냐하면 아직 사탄이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잘 알고, 단호해져서, 끝까지 진실과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사탄이 우리 발 아래서 박살날 때까지, 그 힘으로 버틴다.
[3]
그 버팀의 정체는 진실로 하나됨이다. '문안하다'라는 말을 "~와 하나입니다"로 풀어보았다. '문안하다'의 본래 의미는 "하나로 끌어안다"인데, 어제 본문에서는 "찾아가 안아주다"라 풀었다. 같은 지역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 요구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직접 찾아가 는 맥락이 아니기에, "~와 하나입니다"로 한다.
다른 이를 속여서 짜먹으려는 그 거대한 둘이 세상이다. 그런데 그 세상 속에서 속임없이 사람과 하나를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하나가 둘을 이길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이 하나된 공동체의 발 아래 놓일 것이다. 이것을 믿고 하나됨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라. 그리고 이 사람들의 명단에 우리도 들어가자. 이 명단에 들어간다는 말은, 우리가 진실과 평화를 추구한다는 말이요, 우리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어 그 분으로부터 날마다 힘을 얻는다는 말이다. 무엇을 위한 힘인가? 자기 자신이 잘 되기만을 위한 힘이라면, 속이는 자와 다를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