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니아에 가는 것보다 더 긴급한 임무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있는 공동체에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은행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바울은 돈을 나른다.
본문에서 "나누겠다"로 풀어놓은 단어가 '코이노니아'다. 곧 '교회'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나눔이다. 개역성경에서는 '동정', KJV에서는 'contribution'으로 풀어놨는데, 다른 말 아니다. 나눔도 여러 나눔이 있다. 그런데 이 나눔은 '정신의 나뉨'은 아니다. 니 말, 내 말 따지다가 서로 의 갈리고 분열하자는 그 따위 나눔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나뉘지 않는다. 하나의 정신, 하나의 생각 아래서, 우리가 가진 물질이 나뉜다. 생각이 나뉘지 않고, 물질이 나뉜다. 반대로 세상은 물질을 하나의 자리에 놓아, 정신이 분열한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생각이 하나면, 무엇이든 나눌 수 있다. 나누고 나눌수록 오히려 이 정신의 하나됨은 더욱 단단해진다. 우리가 하나되면 하나될수록 못나눌 것이 없다.
지금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의 예수 공동체는 정신으로, 생각으로, 마음으로, 하나되었다. 그래서 돈을 나누기로 결정했다. 곧 부의 재분배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런 말이 대단히 하기 어렵게 되었다. '부의 재분배'를 말하면, 공산주의라는 라벨이 함께 따라온다. 그러나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공산주의의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보다 무려 2천년전에 만들어진 기독 공동체의 것이다. 본래 우리의 것을 말하고 실천하는데 머뭇머뭇거려서는 안된다. 어느 교회에서는 성도간의 금전관계를 금지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덮어놓고서 교회와 무관한 일이라 할 수 있느냐? 결국 우리가 힘들다 말하는 것은 자본의 문제인데, 교회가 이 문제와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 일이 우리의 일이다. 교회가 이 일을 해결하고자 달려들고, 마음을 쏟아서, 교회를 통해 부가 재분배 되어야한다. '교회'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말이다.
피라미드꼴의 관료집단에서는 노동의 정도와 분배되는 부가 노동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에어콘 바람 맞아가며 펜대 굴리는 CEO와 현장에서 땀흘려가며 종일 일하는 노동자의 수당은 비교조차 우습다. 그러니 다들 노동하지 않고 머리써서 높은 자리 앉으려는 것이지. 우리가 살고 있는 기업도, 국가도 모두 이러한 피라미드꼴의 관료제다. 위에 앉아 짜먹자고 하는 이들이 부와 명예를 쥐고 있으며, 그 아래 사람들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헛된 꿈을 꾸는 사회다. 그러니 이 부의 재분배 문제를 국가도 정치도 해결할 수 없다. 국가를 통해 복지가 제대로 이뤄졌으면, 복지국가 운운할 이유도 없다. 못하니까, 국가 앞에 '복지'자를 붙여놓았지. 그런데 오늘날은 잘 하냐? 피라미드 구조의 명령하달로 사회 밑바닥의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
힘이 없다. 못 일어난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어디서 일어나 부활하느냐? 공동체다. 희망이 여기에 있다. 이름부터가 '나눔'이니까 전세계 경제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학문과 정치로 접근하려면 복잡하고 끝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그 어려운 그 문제가, 진리에 헌신하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바로 코 앞에서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는 말이다. 누가 하는가? 교회가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가 했다. 우리의 텍스트가 그 증거다.
[2]
바울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자랑하거나 칭찬할만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돈을 주는데 오히려 그게 빚이라고? 이러한 가치 판단은 어찌 가능한 것인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목숨을 걸었다. 아니, 목숨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목숨들을 내놓았다. 그래서 무엇을 이뤘나? 그저 개죽음이었나? 아니다. '거룩한 숨'을 드러냈다. 목숨이 끝이 아니라, 목숨 죽어도 얼숨으로,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산다는 믿음이다. 예수를 조롱하고 부정하는 정치권력이 가장 활개치는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이들은 꽃피웠다. 그 결과 예수와 거룩한 숨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같은 믿음을 따라, 같은 숨을 쉬는 타지역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빚이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도들의 가난은 그들자신만의 문제일 수 없다. 그들의 가난 자체가 예수 공동체 전체의 고난이었고, 견딤의 내용이었다. 그들의 가난을 통해서 거룩한 숨이 전달되었다면, 거룩한 숨을 받은 지체들이 다시 예루살렘을 돕는 일이 당연하다. 같은 호흡으로 숨쉬는 이들이니, 서로 지역이 다르고, 삶의 환경이 달라도, 모든 몸이 고루 영양분을 공급받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로를 위해 고난받는 공동체들은 서로 숨이 돌고, 피가 돈다. 그래서 하나다. 한 몸이다.
좀 더 넓게 생각하자면, 이것은 돈의 제대로된 순환을 위한 범세계적 연대이기도 하다. 돈 뿐인가? 거룩한 숨줄로 연결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가족된 이들이 서로의 정신적 육체적 빈곤을 돕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 바울은 "잘 생각했다"고 말한다. "잘 생각했다"는 말은 '에우.도케오'인데, '도케오'는 '여기다. 생각하다'라는 말이고, '에우'는 '잘, 좋게'라고 푼다. 이 '잘, 좋게'라는 말은 하나님과 닿아있는 말이다. 정말 잘 되는 일이라면 특정 개인이나, 특정 부류만 좋아선 안된다. 모두가 좋아야지. 모두가 좋은 일이라면 그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 분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원한 진리를 주시는 우리 아버지시다. 따라서 '잘 생각함'은, 그 아버지의 뜻에 들어맞는 생각이다. 모든 경계를 넘어, 서로의 육적, 영적 가난을 돌보는 일은 잘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기쁘게 생각하신다.
[3]
그런데 아마도 예루살렘 공동체는 이러한 사실에 그다지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멀리 떨어져있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곤경을 위해서,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가진 돈을 나누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복지나 기부의 개념이 없었을 시절이었으니까. 게다가 먼 거리로 부터 돈이 전달되기까지는 여러 믿음이 필요하다. 먼저는 거액의 돈을 보내는 사람들을 믿어야 하고, 그 많은 돈을 가지고 먼 길 걷는 전달자도 믿어야 한다. 오늘날 처럼 전화가 있나, 계좌추적이 있나, 그저 중간에 먹고 나르면 그만이잖아? 바울이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라. '예루살렘 바깥에도 예수 공동체가 있는데, 그들이 너희들의 새로운 가족이야.' '아 정말 가족이네요. 정말 마음에 와닿는 말씀입니다' 이럴 수 없지. 글로는 만났는데 실제로는 얼굴 한 번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의 가족되었다니! 바울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이러한 일의 열매를 저들에게 확실하게 도장 찍은 후에" 무슨 말인가? 정말 그들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서로 떨어져 있으나,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곤경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범세계적 가족 공동체가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분명히 주지시키겠다는 것이다. 말로만? 아니 실제적인 도움으로! 이순간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 제국의 중심으로만 흘러가던 돈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물줄기가 생겨난다. 그 물줄기는 이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새로운 흐름이다. 가난한 이에게 돈이 흘러가는 것이다. 돈은 그때서야 '제대로' 사용된다. 권력의 도구가 아닌, 사람을 살게 하는 일에 쓰이게 된다. 이 일이 국가의 범주를 넘어 예수의 이름으로 이뤄진다. 2000년전의 일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이미 오래 전에 예수 공동체는 본질을 관통하는 창조적인 방법을 가지고,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세계시민, 곧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들이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그럼 오늘날은 어떠한가?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들을 흘러 넘치도록 가지고 가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할 말이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로 우리의 삶이 흘러넘치고 있냐는 말이다.